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17화 (17/80)

17.

에시엘은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을 감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좀 전의 바보 같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부끄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는 건가.”

“네, 네! 옷도 부드럽고 색깔도 엄청 예뻐요. 완전 최고로요!”

어쩐지 머뭇거리듯 묻는 롬포드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쳐들며 단숨에 대답했다. 그의 홍안은 여전히 아이에게 닿아 있었다.

“그래 놓고 나한테 먼저 달려오질 않았군.”

“아, 그건…….”

다시금 롬포드의 시선을 피한 에시엘은 눈동자만 힐끔힐끔 움직이며 그를 훔쳐보았다. 무미건조한 투로 말을 내뱉은 롬포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프니를 째려보았다. 이에 마른침만 삼키고 있던 도프니가 흠칫 몸을 떨었다.

“됐다. 그리고?”

“네에? 뭐, 뭐가요……?”

뜻밖의 말이 따라붙자 한껏 당황한 에시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롬포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물음에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하나 건조한 말투와 달리 어쩐지 롬포드의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을 보자 에시엘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잘만 웃더니, 왜 안 웃지?”

에시엘이 그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순간, 귓가에 롬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끝을 희미하게 올린 터라 집중하지 않으면 질문임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네……?”

그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하지 못한 에시엘이 되물으며 멍하니 입을 헤― 벌렸다. 와중에 머릿속으론 롬포드의 물음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고 있었다. 차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 순간 도프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가, 각하!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마주치니 놀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예!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요, 놀라서 그런 겁니다!”

이어 주방의 수많은 고용인이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런데 도프니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전과 달리 어색한 느낌이었다. 마치 억지로 웃음을 짓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시엘은 도프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웃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롬포드를 바라봤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선 여전히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 무서워……!’

마음을 다잡은 에시엘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헤, 헤헷.”

억지로 끌어 올린 볼살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헤헤. 대, 대공님 감사합니다―!”

에시엘은 굴하지 않고 얼굴 근육을 한껏 움직여 눈매가 초승달처럼 접힐 만큼 방긋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에 롬포드의 한쪽 입꼬리가 미약하게나마 끌어 올려졌다. 아쉽게도 에시엘은 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래.”

간략한 대답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는 롬포드의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에시엘은 고개를 들고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주방의 고용인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 *

한차례 해프닝이 지난 뒤, 방으로 돌아가는 에시엘의 자그마한 손엔 투명한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속엔 쿠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뜻밖의 횡재다!”

도프니가 대뜸 잠시 기다리라더니 고맙다며 손에 쥐여 준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 말뜻을 이해하고 행동한 에시엘 덕에 무사히 상황을 벗어나 주는 것인 듯했다.

포장지는 에시엘의 머리칼처럼 붉은색 끈으로 리본 매듭을 지어 묶여 있었다. 군데군데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의 달콤하면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매듭지어진 틈을 비집고 풍겨 나왔다. 절로 군침이 돌게 만드는 냄새였다.

에시엘은 쿠키를 한번 쳐다보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걸었다. 추후 도망칠 날을 위해 비상식량으로 숨겨 놓으려는 생각이었다.

결국 자린고비처럼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쿠키를 한 번씩 쳐다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에 돌아가면 다른 옷들도 입어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바삐 걷던 에시엘이 갑자기 멈춘 채 가만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에시엘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 연무장에서 봤던 남자아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던 날쌘 검의 움직임, 그것을 따라 흩날리던 지푸라기. 거기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따라 찰랑거리던 검은 머리칼까지. 마치 무협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도 있을까?’

에시엘은 길목을 빤히 바라봤다. 아이의 움직임은 분명 화려하지 않았음에도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은 장소의 특성 때문에 천장이 높고 면적이 드넓었다. 그만큼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아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에시엘은 높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쭉 빼내어 살피며 작은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였다.

“야호!”

아이의 호기심 강한 본성에 따른 외침이었다. 고운 미성을 따라 희미한 메아리가 울려 퍼지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금세 장난스러운 미소가 생겨났다.

뒤이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시야에 가지런히 꽂힌 훈련용 목검들이 들어왔다. 에시엘은 쿠키 꾸러미를 내려놓곤 목검 하나를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들 수 없어 양손을 사용해 낑낑대며 뽑아야 했다.

아무렴 당연했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자가 이끄는 기사단이 흔해 빠진 목검으로 훈련할 리 없었다. 외관은 나무가 분명하나 그 내부는 철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훈련의 단계별로 그 비율이 달랐다.

물론 그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에시엘이 뽑아 든 검이 가장 가벼운 초보자용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거 나무 맞아……?”

에시엘은 겨우 뽑아 든 목검을 질질 끌고 훈련용 짚 인형이 자리한 곳을 향해 갔다. 그리고 남자아이가 검을 휘두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멋진 움직임을 대충이라도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끄응.”

하지만 뽑아 들기조차 쉽지 않았던 목검은 휘두르는 것 또한 무척 어려웠다. 에시엘은 더욱 뻗치는 오기에 아등바등하며 용을 썼다. 간절함이 이뤄 낸 것인지 배꼽쯤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한 목검을 휘두르려 몸을 살짝 돌렸을 때였다.

“어, 어?!”

에시엘은 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남자아이와 돌연 눈이 마주쳤다.

철푸덕―.

“아야…….”

갑작스레 등장한 아이를 신경 쓴 탓에 놀란 그녀의 체중이 뒤쪽에 실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만 것이다.

목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하필이면 목검을 자그만 몸집 위로 내동댕이친 탓에 다리가 짓눌리는 듯했다.

이러한 모습을 봤음에도 남자아이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으며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한 손엔 검을 든 채였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는 에시엘을 바라봤다.

“…….”

“하핫. 아, 안녕. 나는 에시엘 아나이스야. 여덟 살!”

에시엘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손가락 여덟 개를 펼쳤다. 자빠지는 모습을 보여 괜히 민망했다.

남자아이는 목검과 에시엘을 번갈아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의 눈에는 연무장에 멋대로 침입한 웬 조무래기로 비칠 뿐이었다.

“…….”

잠깐 멈춰 섰던 남자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지나치려는 듯 휑하니 몸을 돌려 섰다. 이에 에시엘이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붙잡았다.

“어어? 그, 그냥 가는 거야? 있잖아,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좀 전에 목검을 휘두르려 용을 쓴 탓에 남아 있는 체력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에시엘의 간절한 투에도 제자리에 멈춰 서서 꿈쩍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심지어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에시엘은 또 한 번 다급히 덧붙이며 말했다.

“도, 도와주면 그냥 갈게! 귀찮게 안 해!”

“…….”

“저, 정말로!”

과연 이 방법이 먹힐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주저앉아 있을 수도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또 어린아이의 뼈는 단단하지 못해서 목검의 무게를 오래 버텨 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에시엘은 불안한 눈으로 남자아이의 눈치만 살폈다.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연신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말 지켜.”

머지않아 고민을 끝낸 듯한 남자아이가 손을 뻗어 목검을 집어 들었다. 나자빠진 에시엘이 민망할 정도로 목검은 너무도 쉽게 남자아이의 뜻대로 움직였다.

‘다, 다행이다.’

에시엘이 안심하는 사이 남자아이는 다시 목검을 제자리에 꽂아 놓기 위해 발걸음하고 있었다. 이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대충 털곤 그 뒤를 쪼르르 쫓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가 할 땐 안 되던데, 어떻게 한 거야?”

“…….”

“힘이 엄청 센가 봐, 좋겠다…….”

“…….”

둘의 키 차이만큼이나 확연히 차이 나는 보폭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에시엘은 작은 발로 남자아이의 걸음을 열심히 쫓으며 대꾸가 돌아오지 않아도 열심히 떠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아이의 성격에 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레고니스 가문의 장남. 붉은 눈이나 새카만 머리칼같이 외향적인 특징만 본다면 남자아이는 롬포드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나 에시엘은 원작의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쌀쌀맞은 행동을 주로 보이는 이유는 제 진짜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것을. 제 모습을 꼭꼭 숨긴 아이는 사실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

“간다며.”

순간 걸음을 멈춘 남자아이는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어, 응, 그랬는데…….”

에시엘은 머뭇거리며 답을 회피했다. 초록빛의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던 그때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붉은색 끈으로 매듭지어진 투명한 봉투였다.

가문을 세습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통제받은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일찍이 깨달았다. 추후 가문을 이끌고 전쟁 상황에서 최전방에 서서 수많은 기사를 통솔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더욱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숨긴 채 살아가려 했다.

이를테면 이런 달콤한 쿠키가 아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자! 이거 먹어.”

에시엘은 바닥에 놓아둔 쿠키 꾸러미를 다시 주워 들곤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그의 얼굴 가까이 쿠키 꾸러미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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