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남자아이는 에시엘이 들이민 쿠키 꾸러미를 말끄러미 바라봤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맞닥트린 그것에선 달콤한 냄새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남자아이의 손가락이 잘게 꿈틀거렸다. 곧 손이라도 뻗으려는 듯 보였다.
에시엘은 그 움직임을 눈치채곤 쿠키 꾸러미를 더욱 들이밀었다. 자신도 참기 힘들었던 냄새였으니 아이도 좋아할 거라는 약간의 자신감이 있었다.
“됐어. 저리 치워.”
하지만 남자아이는 무심한 투로 에시엘의 팔을 쳐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쿠키 꾸러미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어어……!”
에시엘은 텅 빈 손을 거둘 생각도 못 하고 허망한 눈으로 땅에 떨어진 쿠키 꾸러미를 망연히 바라봤다.
남자아이 또한 놀란 눈치였다. 아무래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새빨간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지만 애써 진정시키려는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걸음을 재차 움직였다.
“내 쿠키…….”
에시엘은 가벼워진 손을 꼼질거리며 처연하게 말했다. 이에 남자아이는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다시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훈련용 짚 인형 쪽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끄응.”
산산조각이 난 쿠키를 보며 앓는 소리를 내던 에시엘은 그것을 주워 들곤 재빨리 남자아이의 뒤를 따랐다.
“괜찮아! 도프니한테 배워서 만들면 돼. 걱정하지 마!”
“…….”
“도프니는 최고의 주방장이거든! 헤헤…….”
에시엘은 남자아이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도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했다. 훈련용 짚 인형에 다다를 때까지도 작은 입술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떠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아이의 걸음이 멈추었을 때 에시엘도 그를 따라 자리에 서서 아이를 힐끔 쳐다봤다.
“있잖아, 이름 알려 주면 안 돼?”
에시엘은 망설이면서도 꼭 알아내야겠다는 듯 질문을 건넸다. 남자아이를 힐끔거리는 시선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스며 있었다.
“테이시 레고니스.”
“…….”
“열두 살.”
기대에 부응하듯 답이 들려오자 에시엘은 놀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시 시선으로 테이시를 좇았다.
“이름 멋지다! 어……?”
테이시는 흑색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드는 중이었다. 붉은 보석으로 눈을 나타낸 휘황찬란한 금박 뱀이 있는 검은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테이시의 눈과 같은 붉은 보석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것이 순간 빛을 받아 반짝이자 오싹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테이시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우, 우와. 나도 검술 알려 줘!”
에시엘이 방방거리며 외치는데도 테이시는 고개를 갸우스름하게 기울이곤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어떻게 이런 아이가 있나 싶은 눈빛이었다. 보통의 아이라면 진작에 물러났거나 제풀에 지쳐 포기하기 마련일 텐데.
“알려 줘, 알려 주라. 응?”
에시엘은 마치 참새가 짹짹대듯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그 생떼는 머지않아 테이시의 야멸차게 쏘아보는 눈빛에 의해 멈추었다.
하지만 그도 일시적일 뿐이었다. 에시엘은 테이시를 쪼르르 쫓아다니며 계속해서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 * *
새벽녘과 아침의 사이쯤 되는 시각에 낯선 이의 방문으로 인해 이른 기상을 한 참이었다.
에시엘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잠이 쏟아졌지만 얼핏 들었던 롬포드의 낮은 목소리에 눈이 번뜩 뜨였다.
몽롱한 정신 탓에 꿈인 줄만 알았다. 롬포드와 렌테, 신관까지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깼군.”
롬포드의 짧은 독백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렌테의 눈짓이 신관을 향했다. 그러자 에시엘의 이마 위로 신관의 손이 덮였다.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상황에 에시엘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만 뻥긋거릴 뿐이었다. 신관에게 신력을 내보이니 마니 하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곧 눈앞이 새하얗다고 느낄 만큼 환한 빛이 시야를 덮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도 잠시, 누군가 자신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는 듯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방엔 아무도 없었다.
“신관이 왜 또 왔다 간 거지? 이젠 안 아픈데…….”
에시엘은 미약한 온기가 남은 자신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테이블 위에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배숙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 주는 듯했다.
그 후론 잠들지 못하고 뒹굴뒹굴했다. 그러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유난히 부산스러운 소음에 문을 살짝 열어 동향을 살폈다. 눈이 부신 태양이 이제 막 떠오른 새벽녘이 분명한데, 복도를 쏘다니는 사용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무슨 날인가……?”
웬 소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신관까지 불러 준다 한들, 이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사건건 볼모에게 알려 줄 아량 넓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시엘은 은연중에 차라리 이럴 때 페루딘이 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페루딘은 항상 툴툴대긴 해도 왠지 모르게 제 행동을 다 받아 주는 아이였으니까.
목을 쭉 빼낸 에시엘이 복도를 좌우로 살폈다. 여전히 자기 일로 바쁜 사용인들만 보일 뿐이었다. 에시엘은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 * *
롬포드의 거친 손길에 의해 서류가 한 장 팔랑거리며 넘어갔다. 벌써 세 시간째였다. 그가 집무실에 틀어박혀 꼼짝없이 업무를 보고 있던 시간이.
하지만 롬포드의 머리칼과 같은 흑색의 정장엔 일말의 구김조차 생기지 않았다. 지친 기색 없는 롬포드의 붉은 눈동자가 빠르게 글씨를 훑었다. 방대한 업무량은 제게 쉴 틈 따위 주지 않으려는 듯 하면 할수록 더 쌓이기만 했다.
똑똑―.
“들어와.”
롬포드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에 들어선 사람은 집사 렌테였다.
“각하. 거의 다 모이셨다고 합니다.”
“빠르군.”
곧이어 롬포드는 책상의 한 곳에 올려놓았던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시침과 분침의 조합이 2시 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린 롬포드는 남은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그럼에도 롬포드는 서류에서 시선을 거두곤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렌테가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집무실을 빠르게 나섰다.
오늘은 가신들의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해마다 분기별로 진행되는 회의는 이곳 대공저에서 이루어졌다.
일전에는 대공저 말고 다른 곳에서도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각 가신의 저택에서 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일을 설렁설렁 그르치려는 가신들의 태도를 지켜보다 못한 롬포드가 대공저로 모이라 명령한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롬포드는 본인의 뒤를 따르는 렌테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엔 롬포드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북적북적 대화가 끊기지 않았으나 그의 등장과 함께 물을 끼얹은 듯 적막이 흘렀다. 곧이어 제 자리에 앉아 있던 가신들이 모두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쯧.”
롬포드의 혀를 차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경거망동한 가신들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은 탓이었다. 롬포드는 기다란 모양으로 길게 놓인 테이블의 가장 상석으로 뚜벅뚜벅 향했다.
롬포드가 자리에 앉은 후에도 가신들은 이전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중 몇몇은 허리를 따라 고개가 숙여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앉지.”
롬포드가 턱을 괸 채 여유롭게 말했다. 이에 가신들이 서둘러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여전히 말이 많군.”
“…….”
“정작 떠들어야 할 땐 조용하고 말이야.”
서늘한 눈빛으로 가신들을 훑던 롬포드가 한쪽 입꼬리를 샐쭉이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곧 표정을 갈무리한 그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회의를 시작하지.”
* * *
에시엘은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살금살금 걷는 제 모습이 퍽 웃기다고 생각했다. 저 스스로에게 이 복도를 언제쯤 당당히 거닐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봤지만, 도무지 상상되지 않아 마땅한 답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도둑고양이라도 이토록 조심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방에 딸린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져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결국 들뜨는 마음을 참다못한 에시엘은 방을 뛰쳐나와 몰래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의 소란스럽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복도는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런데도 에시엘은 걸음을 주의하고 있었다. 아무렴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다.
‘비밀 통로를 이용하자.’
페루딘 덕에 알게 된 그곳을 통한다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해가 지기 전에 방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오랜만에 다시 오게 된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다. 찬란한 햇빛이 드리워 물을 뿜어내는 분수대에선 마치 별빛이 쏟아져 나온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와, 전보다 더 예쁜 것 같잖아?”
설레는 맘이 깃든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에시엘은 이 순간을 만끽하려는 듯 천천히 거닐던 걸음을 점차 즐겁게 폴짝이며 정원을 구경했다.
‘조금만 앉아 있다가 돌아가자.’
에시엘은 그러던 도중 발견한 벤치를 향해 다가가 앉았다. 땅에 닿지 않는 다리를 그네를 탈 때처럼 앞뒤로 움직이자 더욱 기분이 들뜨는 것만 같았다.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머지않아 에시엘의 지척까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머, 너 누구니?”
처음엔 온갖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여인.
“그래! 왜 여기 있어?”
그다음엔 그 여인을 내세워 당돌하게 말하는 작은 키의 남자아이.
‘누구지?’
둘 다 대공저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