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19화 (19/80)

19.

대공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에시엘은 의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의 행색을 살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감과 절로 빛을 내고 있는 화려한 장신구는 그들이 귀족임을 알려 주는 듯했다. 에시엘이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또다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루딘 공자님은 어디 가고 네가 여기 있니?”

“그래! 나 페루딘 형한테 보여 줄 거 있는데!”

그들은 대공의 자식인 페루딘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한낱 볼모일 뿐인 에시엘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주변을 빠르게 휘휘 살피는 그녀는 다소 위축이 돼 있었다.

“모, 모르는데…….”

“모른다고? 아니, 잠깐. 너 지금 감히 나한테 반말한 거니?”

재촉하듯 쏘아보는 여인의 눈빛이 에시엘에게 닿았다. 에시엘이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여인은 그녀의 차림새를 노골적으로 훑더니 수상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다 번뜩 떠올린 듯한 말을 내뱉었다.

“아! 설마 너 소문의 그 볼모인 거야?”

“에에, 볼모? 엄마, 그거 완전 더러운 거잖아!”

“세상에! 볼모 주제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니?”

부채를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리고 돌연 여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에시엘을 향했다.

“어머, 새빨간 머리칼 좀 봐……. 너 정말 미천하구나.”

“이게 뭐야? 케첩이라도 묻힌 거야? 크크.”

남자아이는 여인의 말에 한 수 거드는 듯 행동했다. 한 걸음 성큼 다가와 에시엘의 머리카락에 삿대질하며 즐겁다는 양 웃었다.

“……나한테 왜 그래? 가던 길 가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노려봐도 조금도 겁먹지 않는 모습이었다. 에시엘은 화가 나는 마음을 참으며 큰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소란을 피우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머, 내 아들 블레게스. 이 어미가 더 좋은 것을 알려 줄게요.”

부채를 소리 나게 접은 여인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여인은 무릎을 굽혀 앉아 흰 장갑을 벗고는 맨손으로 흙을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에시엘의 어깨 위로 흩뿌렸다.

에시엘의 고운 드레스 사이사이 흙모래와 쥐어뜯긴 잔디가 뒤섞였다. 뿐만 아니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에도 더러운 것들이 엉겨 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블레게스라 불린 남자아이가 킬킬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짜증 나. 손이 더러워졌잖아?”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에시엘을 흘기며 손을 탁탁 털곤 다시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에시엘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절로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자신의 잘못이라면 방을 몰래 빠져나와 정원을 온 것밖에 없었다. 그저 잠깐 산책하려 했을 뿐인데 다짜고짜 낯선 이들의 습격을 받은 상황이라니.

그럼에도 참고 참으며 작은 머리통을 흔들며 머리칼 속을 마구 헤집었다. 이런다고 해서 머리칼에 엉겨 붙은 흙모래와 잔디 풀이 털어질 리는 없었다. 잔뜩 화가 났지만 볼모로 잡혀 온 처지였기에 소란을 피우는 건 꿈도 못 꿨다.

“엄마! 나도, 나도!”

블레게스는 킬킬거림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들뜬 얼굴로 팔까지 휘저으며 말했다. 발돋움과 함께 방방 뛰는 모습은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잔뜩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에 엄마라 칭해진 여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자신이 허락이라도 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여인은 오스월 자작의 부인, 체리아나였다.

이들은 밀러먼드 가문 사람이었다. 가신의 정기 회의 날이면 오스월 자작은 언제부턴가 빠짐없이 부인과 자식을 대동했다. 목표는 눈에 보이듯 뻔한 것이었다. 롬포드 대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식들끼리 어울릴 만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의도였다.

더구나 체리아나 자작 부인은 흔한 말로 ‘극성 엄마’에 속했다. 금쪽같은 제 아들, 블레게스에 관한 일이라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한사코 함께했다.

남편을 따라 정기 회의를 동반한 것이 벌써 한 손의 손가락을 모두 굽힐 만큼 되었다. 심지어 지난번 회의 때는 페루딘이 제 아들을 먼저 찾기도 했으니, 체리아나의 기세가 더 등등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 그녀가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한낱 볼모를 얕보는 행동쯤은 숨 쉬듯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옳지, 내 아들. 알려 주지 않아도 잘하네요!”

곧 블레게스는 체리아나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녀의 말이 사기를 북돋웠는지 무릎을 굽히는 행동부터 흙을 한 움큼 쥐는 것까지 전부 순조로웠다. 이내 그는 제 손에 가득한 흙을 에시엘을 향해 흩뿌리려 했다.

“하지 마!”

에시엘이 그 행동을 막아 내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그녀의 움직임은 뜻하지 않게 블레게스의 팔에 적중했다. 반동으로 인해 중심을 잃고 뒤로 밀려난 블레게스는 허우적거리다 쥐고 있던 흙을 오히려 자신에게 뿌리고 말았다.

“어, 어…….”

“으, 으…… 으앙! 으아앙!”

블레게스는 자신의 옷이며 얼굴 위로 뿌려진 흙을 보며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곧이어 블레게스가 입매를 씰룩이더니 머지않아 쩌렁쩌렁한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에시엘의 목소리를 뒤덮고도 남는 기세였다.

체리아나는 제 아들이 우는 모습을 보며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에시엘의 귓가에 울음소리 사이로 은연중에 ‘아, 시끄러워’ 같은 말이 들린 듯도 했다. 에시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블레게스에게 쭈뼛쭈뼛 손길을 뻗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게…….”

“너 지금 장차 밀러먼드 가문을 이을 소자작을 밀친 거야?”

앞을 가로막은 체리아나 탓에 당황한 에시엘의 몸이 주춤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체리아나의 태도는 에시엘을 괴롭히기 위한 빌미라도 잡은 듯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러는 새에도 블레게스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토록 쩌렁쩌렁한 울음이라면 저택의 누군가 이 소리를 듣고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령 그 누군가가 롬포드 대공이 될지도 몰랐다.

에시엘은 체리아나를 힐끔 쳐다보곤 블레게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상 떠나가라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기 위함이었다.

“저기, 미안해. 혹시…….”

“얘 봐라! 이젠 나까지 무시하는 거니?”

체리아나는 팔을 뻗어 에시엘의 앞길을 막았다. 아까보다 훨씬 적극적인 방해였기에 놀란 에시엘의 작은 몸은 밀려나는 정도를 지나, 바닥 위로 털버덕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넘어진 에시엘을 향해 체리아나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절로 우러러보게 된 체리아나와 울음을 그치고 그녀의 다리 뒤로 몸을 숨긴 블레게스가 함께 보였다.

“푸하핫! 넘어졌네? 엄청 웃겨!”

블레게스는 에시엘을 가리키며 배까지 부여잡고 웃었다. 인위적이라 생각될 만큼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자신이 언제 울었냐는 듯 실컷 웃는 통에 새어 나온 눈물까지 닦아 내고 있었다.

“흥, 꼴 좋다. 이게 네 처지야, 알겠니?”

가소롭다는 듯 팔짱을 낀 체리아나가 콧방귀를 꼈다. 에시엘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매몰차게 느껴졌다.

에시엘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전생의 어른일 적 강건하던 정신과 달리 지금 어린아이의 몸은 너무나도 유약했다. 흙바닥에 쓸린 탓에 손바닥이며 무르팍에 흙모래가 묻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생채기들 또한 잔뜩 생겨나 간혹 핏방울이 맺힌 곳도 보였다.

분명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에시엘이 잊고 지내 왔던 아픔이 느껴졌다. 더불어 치유를 받아 모두 사라진 흉터와 함께 자연스럽게 잊은 줄 알았던 학대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짜 부모가 맞나 싶을 정도로 쌀쌀맞은 태도와 제아무리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던 가혹한 매질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더욱이 극악무도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롬포드 대공이 아닌 처음 마주한 이들에게서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될 줄이야.

“아, 아니야, 여긴…….”

분명 외형도 목소리도 다르건만, 일순간 왕비와 체리아나의 모습이 비슷하게 보였다. 그러자 에시엘은 고개를 연신 도리질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겁을 먹은 가녀린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엥?”

“뭐라는 거니?”

킬킬대던 블레게스도, 에시엘의 행동거지를 가만 쳐다보고 있던 체리아나도 에시엘의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얘, 정신 차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니?”

에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간 체리아나는 허리를 숙이곤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신 차려!”

그들의 재촉에도 에시엘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무언가에서 벗어나려는 듯했다.

“또 흙이라도 뿌려 줘야 정신 차릴 거니?”

“그래! 흙 뿌려 줄까? 엉?”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체리아나는 금방이라도 흙을 움켜쥘 기세였다. 하지만 다른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제 손바닥에서 소리가 나게끔 맞부딪쳤다.

“후후. 정신 차리기엔 이만한 게 없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은 체리아나는 에시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가녀린 팔뚝을 그러쥐었다. 워낙 왜소해 한 줌에 다 쥘 수 있을 정도였다.

체리아나는 에시엘을 우악스레 이끌어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에 앉혔다. 체리아나가 그 옆에 자리하자 블레게스도 후다닥 달려와 쪼그려 앉았다. 제 엄마가 하는 양을 지켜보려는 듯했다.

“얘, 얘!”

체리아나가 에시엘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곤 그녀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에시엘의 엉망진창인 머리칼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허억!”

거친 움직임이 멈춘 잠깐 새에, 에시엘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체리아나가 손바닥을 전과 달리 높이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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