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집사인 렌테가 생각하기에 오늘 제 주인의 컨디션은 유난히 좋아 보였다. 이마저도 렌테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짐작건대 그 이유가 비단 많은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할 만큼의 좋은 날씨 때문은 아닌 듯싶었다.
렌테는 가만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제 주인이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이른 새벽녘부터 볼모를 위해 신관을 부른 것이 여전히 의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어린 볼모에겐 다친 구석이 없어 보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신관을 내방하라 명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제 주인은 심지어 치유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 굳이 함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관이 떠나가고 난 후, 신전에 평소보다 많은 기부금을 후원하라 명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신전과의 원만한 유대 관계를 위해서라면 타당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회의에서도, 놀라운 일은 계속되었다. 평소였다면 몇 번이고 큰 소리로 역정을 냈어야 할 롬포드는 답지 않게 순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모습이었다.
“대공 각하. 베이틀라인 영지가 재해로 인해 흉작을 겪어 평민들이 먹을 작물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롬포드는 턱을 괴고 앉은 채 심드렁히 답했다.
“그, 그게, 레고니스 영지라면 항상 평균 이상을 웃도는 풍등이니 베풀어 주신다면…….”
“그대의 생각이 그런가.”
“예? 예, 예.”
말꼬를 튼 가신은 불호령이 돌아올 것이 두려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럼 그렇게 해.”
이에 당황하는 건 가신들의 몫이었다. 물론 롬포드의 옆에 서 있던 렌테 역시 생각지도 못한 그의 대답에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롬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회의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통창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선 레고니스 가문의 내로라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널찍이 자리한 통창은 회의로 인해 피로한 심신을 정화시키는, 그야말로 안구 정화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기분을 누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원을 보고 있던 롬포드의 얼굴빛이 매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짙은 그늘이 서리더니 그 어느 때보다도 험상궂은 낯이 되고 말았다.
“잠깐.”
“예, 예?”
“왜 그러십니까?”
저들끼리 속닥이며 대화를 주고받던 가신들은 롬포드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맘속으로는 혹시나 했을지 모르는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롬포드의 뒷말이 따라붙었다.
“다들 대기해.”
롬포드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주인의 모습에 이를 의아하게 여긴 렌테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등을 내보인 여인이 작은 볼모의 뺨을 내리치려는 듯 손을 높게 쳐들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렌테는 서둘러 제 주인의 뒤를 따랐다.
* * *
불안정한 호흡을 내뱉던 에시엘의 시야에 체리아나의 손바닥이 보였다. 에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맞는 일에 익숙했다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으으.”
에시엘이 악문 잇새 사이로 불안한 마음이 조용히 새어 나왔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닐 것을 알아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지척에서 멈춘 듯 끊겼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뺨에선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에시엘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굳은 표정의 롬포드와 그 뒤를 따르는 렌테가 보였다. 롬포드의 크고 투박한 손이 체리아나의 손목을 거세게 그러쥐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에시엘은 제 작은 손바닥으로 탄성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뭐 하는 거지.”
롬포드의 손을 힐끗 쳐다본 체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섬찟할 만큼 붉은 눈동자가 체리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체리아나는 단숨에 알아봤다. 제 남편을 처음 따라왔을 적 본 기억이 있던 이 남자를.
“대, 대…….”
“인사는 됐고, 뭐 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체리아나 자작 부인.”
롬포드는 어쩐지 화가 난 듯 보였다. 이에 체리아나는 눈에 보일 만큼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득의양양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처량한 모습이었다.
“우,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마요…….”
블레게스는 어느새 킬킬거리던 웃음을 홀연히 지우곤 말했다. 제법 용맹하게 쏘아보는 눈에 비해 한없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밀러먼드 가문의 어린 영식이던가? 쯧…….”
롬포드의 한마디에 블레게스는 입매를 씰룩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내 다리를 붙이고 선 블레게스의 바지 가운데가 짙은 색으로 물들더니 바짓단 아래로 물이 새어 나왔다.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이에 롬포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철부지인 제 막내아들도 밖에서 오줌을 지린 적은 없었다.
“참 가지가지 해.”
“우우…….”
블레게스는 전과 달리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는 것이었다. 롬포드는 찡그린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턱짓으로 블레게스를 가리키며 렌테에게 말했다.
“어떻게 좀 해야겠군.”
“예, 알겠습니다.”
이어 블레게스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렌테의 말에 울음을 참으며 어기적어기적 뒤따라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체리아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평소 남편에게 말재간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자주 들은지라 이 상황을 모면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이 잔뜩 화가 난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그의 심기를 거슬린다면 제 남편에게 칭찬은커녕 혼이 날 것은 분명했다.
“대, 대공 각하.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이에 롬포드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슨 오해?”
“이, 이건 이 아이를 때, 때리려던 것이 아니라…….”
체리아나는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말을 더듬는 자신의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헛것이라도 보았다는 건가.”
“아, 아니요! 이 아이가 정신을 잃었길래 도와주려 했습니다…….”
차마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체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곤 말했다. 롬포드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벌벌 떨며 진실을 토로할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잃었다고.”
롬포드가 매서운 눈빛으로 에시엘의 행색을 훑었다. 대답이라도 요구하는 듯한 눈짓에 에시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게요, 저는…….”
순간 에시엘의 말소리를 뒤덮으며 체리아나가 다급히 외쳤다.
“대공 각하! 블레게스와 저는 그저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우, 우연히 이 아이가 쓰러지는 모습을 봤어요.”
“…….”
“그, 그래서 도와준 것이지요. 제가 이 아이를 해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말을 마친 체리아나는 롬포드에게 제법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붙들린 손목이 점차 욱신거려왔기에 그가 얼른 속아 넘어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표정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내가 널 도와줬잖아!”
체리아나는 다급하게 에시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험악하게 눈짓했다. 마치 사실대로 말한다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
에시엘은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실을 고하려면 자신이 몰래 정원을 나왔다는 사실까지 말해야 했다. 더불어 진실을 고한다 한들 롬포드가 그것을 믿어 줄지도 의문이었다.
야구도 삼진이면 아웃인데 자신은 이미 그 한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이번이라면 정녕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체리아나는 에시엘의 모습을 보며 롬포드가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 롬포드가 손목을 그러쥔 손에서 점점 힘을 풀어 내는 것이 느껴졌다. 체리아나는 마지막 한 방이라는 생각으로 말을 덧붙였다.
“어머, 가여워라! 아직 충격에서 못 벗어났나 봐요!”
그리고 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다.
“신관이라도 부르는 것이……. 아, 볼모에게 신관은 너무 과분하겠죠?”
롬포드의 손이 체리아나의 손목을 완전히 떠나자, 그녀는 절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며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로써 남편에게 혼날 일은 면했다는 생각이었다.
머지않아 침묵을 유지하던 롬포드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밀러먼드 가문 사람들은 죄다 말이 많은 것 같군.”
“네, 네?”
“변명은 잘 들었다, 체리아나 자작 부인.”
롬포드의 예리한 눈빛이 체리아나에게 향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은 섬찟하기까지 했다. 순간 체리아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착각이 일었다.
“벼, 변명이라니요. 제 말이 거짓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체리아나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억울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대공이 상황 전부를 보고 있던 것은 아닐 테고 확실한 증거 또한 없었다. 그러니 절대로 대공에게 거짓을 들켜선 안 되었다, 절대로.
“거짓을 그럴싸하게 잘 늘어놓더군.”
“거짓이 아닙니다!”
서슴없이 거짓을 말하는 모습에 롬포드는 가소롭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빽 소리를 지른 체리아나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한없이 무시당하는 기분에 눈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은 듯한 태도였다.
“그런가. 혼자 쓰러진 아이치곤 꼴이 엉망이라 누군가 패악이라도 부린 것 같지 않은가?”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는 에시엘의 행색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붉은 머리칼 사이사이 엉겨 붙어 있는 흙모래와 잔디 풀, 더불어 흙바닥에 갈려 팔뚝과 종아리 곳곳에 생긴 생채기까지. 에시엘의 모습은 누군가의 패악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공교롭게도 같이 있던 이가 체리아나 자작 부인뿐이군.”
“저, 저……. 볼모가, 볼모 주제에 먼저 블레게스를 밀쳤어요! 장차 소자작이 될……!”
체리아나는 몹시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내리 평정을 유지하는 척하다가 제 거짓이 탄로 나자 순식간에 말을 뒤바꿔 분노를 표출하기 바빴다.
“아차. 밀러먼드의 어린 영식도 같이 있었던가. 그래, 소중한 자제분을 잊어선 안 되지.”
롬포드의 싸늘한 시선이 체리아나를 내리훑었다. 일찍이 거짓임을 눈치챈 롬포드가 체리아나의 허황된 말 따위를 귀담아들을 리 없었다.
“대, 대공 각하! 대체 왜…….”
“그만. 남은 얘기는 오스월 자작과 하도록 하지.”
롬포드는 단호한 어투로 체리아나의 말을 끊어 냈다. 더 이상 거짓된 말을 들을 가치는 없었다. 원인과 결과는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