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24화 (24/80)

24.

“나는 클레드인이야. 너는?”

“으응. 나는 에시엘.”

클레드인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곤 높게 쌓여 있는 지푸라기 더미 중 하나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그 위에 털썩 앉아 빈 옆자리를 가지런히 정돈한 뒤 에시엘을 바라보며 톡톡 두들겼다.

“에시엘! 나랑 잠깐 놀아 주라.”

“어어? 그, 그래.”

에시엘은 왠지 모르게 거절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쭈뼛거리며 클레드인의 옆자리로 향했다. 조심스레 앉은 뒤, 일순 흐르는 적막을 느끼며 땅에 닿지 않는 다리를 그네를 탈 때처럼 앞뒤로 연신 흔들었다.

“나 수업 듣기 싫어서 여기 숨어 있었어. 이 저택이 마카이른 제국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집이라던데?”

“뭐어? 수업을?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으려고? 들키면 위험한데…….”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비록 제 처지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업이 싫어서 이곳까지 숨어든 클레드인이 사뭇 걱정되었다.

이유인즉, 롬포드 대공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만둘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라 해도 봐주지 않을 것이었다. 만일 들킨다면 하다못해 발톱이라도 뽑힐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으음, 계속 있고 싶다.”

“너 완전 문제 학생이구나? 푸핫.”

떼를 쓰는 듯한 클레드인의 대답이 들려오자 에시엘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에는 클레드인이 그저 수업이 싫은 평범한 아이로 비치는 듯했다.

클레드인으로선 참 다행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싶었다. 혹여 어디선가 ‘차기 대신관 클레드인 루아네즈’라는 말을 듣더라도 자신을 떠올리지 않길 바랐다. 적어도 이 아이만큼은.

“이거, 에시엘 줄게.”

에시엘의 흔들리는 작은 발을 가만히 바라보던 클레드인이 제 품을 뒤적거렸다. 품에서 꺼낸 것은 손에 꽉 들어찰 만큼 동그랗고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사과였다. 클레드인은 자신의 소매 춤으로 혹여나 먼지라도 묻어 있을지 모를 사과를 반질반질 닦아 냈다.

“자.”

“나, 나한테?”

뜬금없이 건네는 사과가 의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클레드인은 그저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대체 이걸 왜 주지?’

에시엘은 얼결에 받아 든 새빨간 사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법 집중하는 탓에 입술이 일자로 앙다물려졌다. 그런 에시엘의 모습을 보고만 있던 클레드인이 시원시원한 입매를 끌어 올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먹어도 괜찮아! 몸에 엄청 좋을 거야.”

“몸에 좋은 거라고……?”

그녀는 클레드인이 못 미더웠으나 왜인지 모르게 먹을 때까지 쳐다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사과에는 에시엘의 잇자국을 따라 앙증맞은 홈이 파였다.

그 사과가 클레드인의 강한 신력이 깃든 것이라는 사실을 에시엘은 미처 알 수 없었다.

* * *

휘황찬란하게 금테가 둘린 새하얀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주변에 흙모래가 일만큼 매서운 속도였지만, 어쩐지 마차의 내부에는 약간의 흔들림도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 평범치 않은 마차에 몸을 실은 사람은 마카이른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황제는 자신의 지위도 잊은 채, 몹시도 불안한 심리 상태를 표출하듯 연신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롬포드……. 이, 이 거만한 놈!”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거세게 내뱉는 투와 달리 황제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황실의 마차는 레고니스 저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롬포드 대공이 황성을 찾아온 그날 이후, 황제는 베르게일 공작과의 교섭을 단번에 끊어 냈다. 물론 황제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이에 베르게일 공작이 황제와 연락을 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불발되고 말았다.

황제는 빠르게 달리는 마차만큼 열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황제의 머릿속엔 롬포드 대공을 적으로 두었다간 그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말 거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에게 약점 아닌 약점을 잡힌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멍청한 베르게일 공작은 버리더라도 황제인 자신만큼은 빠져나와야 했다.

“황제 폐하.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도착을 알리는 신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는 내내 온갖 두려운 티를 내던 황제는 제 행동을 서둘러 갈무리했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자 황제는 한껏 위엄을 꾸며 낸 과장된 움직임으로 찬찬히 내려섰다. 그의 앞에 절로 롬포드를 생각나게 하는 위압적인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느끼기에 저택에선 마치 냉혹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에 주변의 신하들이 흘긋거렸지만 잔뜩 긴장한 그는 그것마저도 눈치채지 못했다.

앞장선 신하는 곧장 저택의 문 앞까지 황제를 안내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연 렌테의 뒤로 롬포드의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

“하하. 우리 사이에 예를 갖춰 인사할 필요가 있는가?”

황제는 롬포드의 인사를 저지하며 가식적인 너스레를 떨었다. 반면 롬포드의 표정은 더없이 건조했기에, 황제가 그의 눈치를 보며 점차 표정을 굳혔다.

수하들을 모두 물린 뒤 창문까지도 전부 가린 응접실에는 황제와 롬포드 대공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그곳에선 이따금 황제가 차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황제는 롬포드에 의해 벌써 세 번째 채워진 차를 빠르게 들이켜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던 황제가 초조한 눈빛으로 롬포드를 훔쳐보려다 별안간 시선이 마주쳤다. 황제는 눈에 띄게 놀라는 모습을 보이곤 괜스레 찻잔을 어루만졌다.

“하하, 차 맛이 좋군. 무슨 차인지 알고 있는가?”

나름대로 고심 끝에 한다는 말이 고작 차의 맛에 관한 이야기였다. 황제는 애써 무던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과장된 손짓까지 더해 가며 친근함을 가장하는 그의 행동은 몹시도 작위적이었다.

이에 롬포드는 본인 앞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처음의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찻잔의 바닥에 채 걸러지지 않은 침전물이 가라앉아 있었다.

“홍차입니다.”

롬포드는 가볍게 한 모금을 홀짝인 뒤 말했다. 특별할 것이 없어 귀족들에게는 그냥 흔하디흔한 홍차였다.

롬포드의 답을 들은 황제의 낯에 옅게나마 붉은빛이 돌았다. 그제야 자신이 내뱉은 말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곧 다리를 바꿔 꼬며 무르팍 위로 손을 올렸다.

“그래, 홍차였군……. 하하…….”

황제의 어색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또다시 고요함이 흘렀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머지않아 어떤 결심이라도 한 듯이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황제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롬포드 대공.”

“예.”

곧장 들려온 대답에 황제는 검지로 제 무르팍을 두들겼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응접실 안에는 사뭇 긴장감이 흘렀다.

“장부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속삭이듯이 말했다.

“장부가 걱정되어 이곳까지 발걸음하셨습니까.”

“큼, 흠, 크흠.”

정곡을 찌르는 롬포드의 말에 황제는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혹여나 문밖에까지 소리가 새어 나갈까 걱정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황제가 이렇게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장부는 황제에게 있어 치부 그 이상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폐위까지 가게 될 가능성도 높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지금만큼은 롬포드 대공이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설령 그것이 한 가문의 몰락이라 하더라도.

“……혹시 원하는 게 있는가?”

“…….”

“말만 하게나. 내 자네를 괴롭히는 베르게일 공작을 당장 감옥에 보내 버릴 수도 있다네!”

하지만 롬포드 대공에게 있어 베르게일 공작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본인의 털끝조차도 건드리지 못하는 그저 별 볼 일 없는 인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베르게일 공작을 처치하려 애쓰는 이는 오히려 황제였다. 탈세와 더불어 롬포드 대공을 몰아내려 황제와 동조한 당사자가 바로 베르게일 공작이었으니까. 황제로선 멍청하게 뒷일을 들킨 자보다는 제 목줄을 쥐고 흔드는 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

“그게 아니라면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

“내 가능한 것이라면, 아, 아니! 뭐든 들어주겠네!”

황제는 초조함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롬포드의 눈빛이 변함없이 무미건조한 탓이었다.

“그럼.”

롬포드가 신중을 기하려는 듯 답을 유보하며 갸우스름하게 비튼 제 턱을 매만졌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참전 명령을 철회해 주십시오.”

“이, 일단……? 하, 하하! 그래, 그 전쟁은 어차피 이 제국에 중요한 것도 아니었지!”

롬포드의 말에 황제는 짐짓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제 엉덩이마저 들썩이며 말했다. 이미 뭐든 들어주겠다고 마음먹은지라 애당초 한 개가 되었든 두 개가 되었든, 가짓수는 중요치 않았다. 황제는 장부를 돌려받아 그것을 파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아나이스 소왕국의 멸망을 바랍니다.”

“아나이스 소왕국이라니……?”

황제로선 뜬금없는 요구였다. 끽해야 베르게일 공작의 몰락이나 요구할 줄 알았는데 대뜸 소왕국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황제는 제국에 떠돌았던 볼모에 관한 소문과 롬포드를 연관 짓다가도 애써 그 생각을 지워 냈다.

“혹시 내가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롬포드의 말 한 마디마다 일희일비하던 황제가 몹시도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저 하찮은 소왕국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렇긴 하다만…….”

“아, 이참에 그곳을 점령하면 제국의 무역이 더욱 용이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롬포드는 아나이스 소왕국을 몰락시키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기며 이에 대한 장점까지 덧붙였다. 이에 황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선 손해 볼 것이 없는 요구였다. 어쩌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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