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25화 (25/80)

25.

“정말 그거면 되겠는가?”

“예. 그렇습니다.”

롬포드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베르게일 공작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황제가 초조해진 듯했다.

“하하, 우리 대공은 참 너그러워! 그럼 이리 충직한 신하를 괴롭힌 베르게일 공작은 내가 벌하도록 하지.”

황제는 롬포드 대공을 치켜세우다가도 은근슬쩍 베르게일 공작을 몰아내고자 하는 내색을 비추었다. 어떻게든 결판을 지으려는 모습은 눈에 띄게 가증스러웠지만, 롬포드에겐 그 둘의 관계든 베르게일 공작의 몰락이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롬포드의 단호한 목소리에 황제는 얼굴에서 즐거움을 빠르게 지워 냈다. 그리고 잠시 신음하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사흘 내로 기사들을 보내도록 하겠네.”

“좋습니다. 장부는 그 후에 다시 얘기하시지요.”

이어지는 롬포드의 말에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상보다 일이 쉬이 진행된다는 생각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레고니스 저택.

렌테가 쌓인 업무도 미뤄 두고 급히 받아 든 서신에는 내리쬐는 햇볕이 그려진 황금색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을 뜻하는 인장이었다.

갑작스레 황실에서 서신이 온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지난번 황제가 직접 발걸음한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렌테는 서둘러 롬포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그래.”

롬포드의 허락에 안으로 들어선 렌테가 인사를 건넸다. 롬포드는 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곧 렌테는 그가 자리한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 서신을 전달했다.

“황실에서 온 서신입니다.”

이에 롬포드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입구를 거침없이 뜯어냈다. 손에 가장 먼저 툭― 하니 떨어진 것은 열쇠였다. 열쇠 머리 부분의 장식으로 보아 아나이스 소왕국을 뜻하는 듯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렌테는 고개를 살풋 갸웃하곤 롬포드가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았다. 롬포드는 한 손에 열쇠를 쥔 채 동봉된 서신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서신을 한 곳에 내버려 두곤, 롬포드는 다시 만년필을 쥐어 빈 종이 위에 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종이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뒤 레고니스 가문의 인장까지 찍고는 렌테에게 건넸다.

“황제 폐하에게 전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볼모의 입적을 준비하지.”

“예. 예……?”

렌테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한껏 놀라 쳐다본 롬포드의 얼굴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들은 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렌테는 다리가 땅에 박히기라도 한 듯 가만 서서 롬포드를 쳐다보기만 했다.

“뭘 가만히 서 있지?”

“예? 아, 아니, 그게…… 소왕국의 볼모를 가문에 입적하시겠단 말씀이 맞습니까?”

“갈 데가 없어졌으니 내가 데리고 있어 줘야지 않겠나.”

롬포드의 단호함에 렌테는 더 이상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채, 입만 뻥긋대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롬포드의 한쪽 눈썹이 꿈틀하며 미간 사이에 살풋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가해? 꾸물거리지 말고 나가 봐.”

롬포드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도 렌테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자꾸만 롬포드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벙긋거리는 것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각하.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렌테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나이스 소왕국은 멸망했다. 뭐가 문제지?”

롬포드는 한쪽에 두었던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렌테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에 렌테가 서신을 건네받곤 내용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렌테는 서신을 읽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당황스러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소왕국이 멸망했다고 해서 한낱 볼모를 입적하는 게 타당한 일이 되진 않기 때문이었다. 롬포드는 여전히 황당해하고 있는 렌테의 모습에 더욱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오늘따라 참 성가시군.”

“각하, 그것이…….”

“나가.”

롬포드는 렌테의 말을 더는 들을 마음이 없다는 듯이 단숨에 끊어 냈다. 렌테는 그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 번에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롬포드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을 나선 뒤에도 렌테는 한참이나 그 앞에 서 있었다.

제 주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탓이었다. 평소의 롬포드라면 아이를 냉정하게 내칠 뿐 아니라 진즉 죽음으로 내몰았어야 마땅했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입적하겠다 선언하는 롬포드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렌테는 사뭇 심각한 표정을 하곤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고작 볼모에게 신관이며, 재단사를 불러 주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왕국이 멸망했기로서니 아이를 입적하겠다고까지 하다니.

확실히 롬포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볼모로 잡혀 온 자그마한 아이 하나 때문에.

* * *

에시엘은 마치 교무실에 불려 가는 학생처럼 앞서가는 렌테의 뒷모습만 힐긋힐긋 보고 있었다. 쭈뼛대는 걸음으로 뒤따르며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해 짤막한 손가락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대뜸 따라오라는 말뿐이었기에 행선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방에서 멀어질수록 에시엘의 마음속에 불안함과 의구심이 점차 커져만 갔다.

‘또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기억을 되새겨 봐도 떠오르는 잘못은 없었다. 가신들이 다녀간 후론 잠자코 방에만 있었기에 에시엘은 혹시나 그 행동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렌테는 어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에시엘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렌테는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사리 내뱉지 못하다가 고르고 고른 듯한 말을 내뱉었다.

“각하의 앞이니 언행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네에.”

에시엘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큰 눈을 끔벅거리면서도 순순히 답했다. 그러자 문손잡이를 잡고만 있던 렌테가 그것을 당겨 문을 열었다.

그곳은 응접실이었다. 방의 가운데에 길게 놓인 테이블의 상석에 롬포드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곧 렌테가 에시엘이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이에 에시엘이 눈치를 보며 조금씩 천천히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덩그러니 바닥만 보고 있을 때,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앉아.”

에시엘은 고개를 들어 롬포드를 한 번, 렌테를 한 번 쳐다보곤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걸음을 옮겼다. 그 움직임을 빤히 보고 있던 롬포드가 턱을 괴었다.

이내 에시엘이 조심스레 소파에 앉자 그 앞 테이블에는 손잡이가 달린 어린이용 컵이 놓였다. 그리고 시종이 다가와 우유를 따라 주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며 컵이 채워졌다. 이와 동시에 다른 시종은 상자에서 꺼낸 초콜릿을 컵에 넣어 주었다.

“와…….”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작은 입을 헤벌리며 멍하니 감탄을 내뱉었다. 뜨거운 온도에 초콜릿이 녹으며 점차 색이 변하는 우유를 보자 무의식중에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새하얀 우유가 진갈색이 될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 생에서야 이런 것을 종종 먹었으나, 소왕국에서는 생초콜릿은 물론이거니와 따뜻한 우유도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이기에 줄 수 없다는 그런 뻔하지만 말도 안 되는 핑계 때문이었다.

“먹을 생각은 없는 건가.”

롬포드는 제 앞의 찻잔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에시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얼핏 듣기론 어린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초콜릿 우유를 준비했건만, 저 아이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네? 아, 그게……. 먹어도 되나요?”

“…….”

에시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롬포드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까딱일 뿐이었다. 마치 빨리 먹으라는 듯이.

“가, 감사합니다.”

에시엘은 작은 손으로 서둘러 손잡이를 쥐어 컵을 살포시 들었다. 얼굴 가까이 들어 올릴수록 뜨끈한 김 사이로 달곰한 냄새가 풍겨 왔다. 이내 그녀는 우유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아는 맛이 더 맛있어!’

만족스러워진 에시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생겨났다. 갑자기 이런 것을 주는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달콤한 음료를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려 롬포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을 보고 있던 그와 돌연 눈이 마주쳤다.

“아, 그게, 마, 맛있…….”

“그래. 얼마든지 먹어.”

롬포드는 마치 에시엘의 말뜻을 알겠다는 듯 대답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뒤덮었다. 에시엘의 낯이 우유의 뜨거움 탓인지 괜스레 불그스름해졌다. 머지않아 롬포드가 오른편에 서 있던 렌테에게 손을 뻗자 그가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서류를 건네었다.

그는 받아 든 서류를 휘리릭 넘겨 본 뒤, 테이블 위에 올려 에시엘 가까이 밀어 냈다. 하지만 에시엘이 집어 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자조적인 말을 덧붙였다.

“서류보단 말이 편한가.”

이에 렌테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제 허리춤에 끼고 있던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슬몃 목을 가다듬었다.

“큼, 흠……. 아나이스 소왕국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아나이스 왕의 표명하에, 에시엘 아나이스 왕녀님은 레고니스 가문에 입적될 예정임을 알립니다.”

“……네?”

잠시 멍하니 있던 에시엘이 되물었다. 그저 단순하게 듣지 못했다거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포, 포기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에시엘은 렌테의 말을 되새겼다. 포기와 입적이라는 단어가 들린 것은 분명했으나, 당황한 나머지 순간 제가 아는 의미로 쓰인 게 맞는지조차도 헷갈렸다.

“아나이스 소왕국은 멸망했습니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는 새에 재차 인지시켜 주려는 듯한 렌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 멸망……? 왜요? 아, 아니, 누가요? 대체 누가……!”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나이스 소왕국에서의 삶이 즐겁지는 않았으나, 그곳은 어쨌든 제 가문이고 집이었다.

그리고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을 만든 장본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바로 제 앞에 있다는 이유가 더욱 전율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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