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제 기분에 빠져 있느라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에시엘은 그대로 갑자기 걸음이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뒤를 돌아봤다.
“헉…….”
“어딜 그렇게 신나게 가?”
페루딘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서 있었다. 페루딘 특유의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새빨간 눈동자에선 유난히 생기가 돌았다.
“너 아까 내 말도 못 들은 척하더니!”
“말? 무슨 말?”
식사 시간, 제가 듣지 못한 페루딘의 소곤거림을 기억할 리 없었다. 때문에 에시엘은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을 뿐이었다.
“쳇, 됐어. 부리나케 사라지더니…… 화장실이라도 급했던 거야?”
페루딘은 고개를 돌려 킥킥거리곤 다시 에시엘을 마주했다. 한 손으론 여전히 에시엘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은 채였다.
“아, 아니거든?! 그리고 손은 놔 줄래?”
얼굴을 붉은색으로 옅게 물들인 에시엘이 말했다. 페루딘의 손에 들린 드레스 자락 탓에 종아리가 빼꼼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를 본 페루딘은 화들짝 놀라며 옷을 떨치곤 양손을 자신의 뒤로 감췄다.
“아! 미, 미안.”
페루딘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아 미안하단 것인지, 평소답지 않게 선뜻 사과를 건넸다. 머지않아 허공을 응시하는 페루딘은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작은 귀 끝 또한 붉게 물들어 그것을 방증해 주고 있었다.
“큼, 흠. 야! 나가자!”
이내 페루딘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곤 다시 본래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와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무뚝뚝한 아버지 앞이라 숨겨 두었던 개구짐을 마구 방출하는 듯했다.
“어딜 가려구?”
에시엘이 저보다 조금 키가 큰 페루딘을 바라보며 말했다. 페루딘은 팔짱을 끼곤 앓는 소리를 내며 제법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갈 곳도 생각지 않은 채 말부터 내뱉은 모양이었다.
“바보. 따라오기나 해!”
하지만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페루딘은 또다시 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몹시도 개구쟁이처럼 웃음 지었다.
* * *
페루딘은 에시엘이 수차례 질문해도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명확한 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가 보면 알아!’ 같은 애매모호한 대꾸만 할 뿐이었다.
‘대체 어디를 가는 거지?’
이에 에시엘은 페루딘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원과 연결된 경치 좋은 산책로를 나아가던 이들의 주변엔 점차 길게 솟은 나무만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앞서가는 페루딘의 샛노란 머리칼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빛이 나고 있었다. 에시엘이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만져 볼까 싶은 생각을 하는 찰나, 페루딘이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봤다.
“너! 이거 보면 깜짝 놀랄걸?”
그는 가만히 서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찾고 있는 물건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지 쪼그려 앉아 주머니에 든 온갖 것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페루딘이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한 모양인지 주머니엔 온통 잡다한 것들뿐이었다. 작은 주머니에 어떻게 욱여넣은 것인지 신기할 정도였다. 가령 길에 굴러다니는 흔해 빠진 돌멩이나 베개 속에서 빠진 듯한 하얀 솜뭉치, 심지어는 작은 티스푼도 보였다.
페루딘은 그것들을 전부 내버려 둔 채, 그중 검은색 물체만을 집어 들었다.
“어어…….”
에시엘이 저도 모르게 집게손가락을 뻗으며 뱉은 소리였다. 검은색 물체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이에 페루딘이 씨익 미소 지었다.
“잘 봐.”
페루딘은 검은색 물체의 한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그것은 점차 커지며 본래의 제 형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두 번째 접하는 마법이 깃든 새총이었다.
“그, 그걸 쓰려고? 여기서?”
“집 안도 아닌데 뭐 어때? 죄다 나무뿐이잖아.”
에시엘의 당황스러운 물음에도 페루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만 으쓱였다.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봤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고는 오직 두 사람뿐인지 사방엔 고요함만 흐르고 있었다. 페루딘의 말처럼 나무만 가득한 이곳이라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괜찮겠지?’
페루딘이 새총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던 에시엘의 고개가 살풋 갸우스름해졌다. 이내 자꾸만 드는 불안한 생각을 지우며 약간의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야?”
“이런 것도 모르냐? 잘 봐 둬!”
의기양양해진 페루딘은 시범이라도 보이듯 제 새총의 고무줄을 쭈욱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치 총알처럼 보이는 검은 구슬이 절로 생겨났고, 곧이어 페루딘이 손에 쥔 고무줄을 놓았다.
검은 구슬은 쏜살같이 날아가 수많은 나무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와아!”
“쳇. 시시해.”
신기해하며 감탄사를 뱉는 에시엘과 달리 페루딘은 툴툴거림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토록 원하던 새총 놀이임에도 어쩐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 시시해? 전부터 하고 싶어 했잖아?”
“바보냐? 이런 건 움직이는 걸 맞춰야 재밌는 거거든!”
에시엘은 지난날 페루딘의 모습을 떠올렸다. 새총을 쏘고 싶어서 저녁까지 자신을 기다렸던 아이였다. 그런데 왜인지 지금은 고작 한 번 쏘아 놓곤 입술을 내민 채 시시하다며 툴툴대고 있었다.
“음……. 나도 줘 봐!”
잠시 고민하던 에시엘은 페루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페루딘은 자신의 것과 같은 새총을 건네주었다.
에시엘은 방금 전 페루딘이 새총을 쏘던 모습을 떠올리곤 똑같이 고무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검은 구슬이 생겨났다.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가녀린 팔이 잘게 떨리는 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고무줄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놓았다.
퍽―. 우지끈―.
곧 구슬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나무가 쓰러졌다.
“너, 너, 뭐야? 괜찮아?!”
페루딘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잔뜩 벌어진 입은 도무지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옆에서 본 광경이기에 더욱 놀랐을 게 분명함에도 그는 서둘러 에시엘을 살폈다.
하지만 당황한 건 에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새총을 쏴 봤는데 나무 한가운데를 맞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쓰러트릴 줄이야.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어어, 어어……?”
“크, 큰일 날 뻔했잖아!”
페루딘이 손을 낚아채듯이 쥐어 살피는 와중에도 에시엘은 그저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그녀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파악할 순 없었다.
‘뭐지……?’
페루딘은 짐짓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에시엘을 쳐다보다가 여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새총을 날렵하게 뺏어 들었다.
“에이씨. 왜 이런 걸 가져온 거야…….”
자조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뺏어 든 새총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냅다 바닥에 집어 던졌다. 고가의 장난감이 분명할 그것은 곧 볼품없는 모양새로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혹시 신력 때문인 걸까?’
에시엘은 여전히 넋이 빠진 채로 쓰러진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눈만 끔뻑거리던 그녀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운용 가능한 신력. 어쩌면 그 힘이 발동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신력은 무척이나 미약한 정도에 그치지 않을 터인데. 이게 도통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야! 진짜 괜찮아? 아, 아니다. 그냥 돌아가자.”
곧 수심에 찬 에시엘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연신 새총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둔 페루딘은 사뭇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시엘을 바라봤다.
“난 괜찮은데…….”
에시엘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눈길은 여전히 쓰러진 나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따라오기나 해!”
“…….”
페루딘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잠잠한 에시엘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껴진 탓이었다. 그리고 제자리에 선 채 가만있을 뿐인 그녀에게 돌아갈 것을 거듭 재촉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답이 없자 페루딘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에시엘의 손목을 붙들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멈추곤 등을 내보인 채 쪼그려 앉았다.
“야, 에시엘! 빨리 업혀!”
“어……?”
페루딘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에시엘의 시야 앞에 작지만 너른 등이 보였다. 아직 어린아이의 등이지만 체구가 작은 에시엘을 업기엔 충분할 것이었다.
페루딘은 쪼그려 앉은 채 에시엘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도통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돌려 뒤를 힐끔거렸을 땐, 여전히 멍한 채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에시엘이 보였다.
“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루딘은 에시엘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목에 두르곤 ‘끙차’ 하는 소리와 함께 업었다. 그의 두 다리가 잠시 잘게 흔들렸으나 곧 안정을 되찾아 조심스럽게 저택을 향해 내디뎠다.
“어어? 자, 잠깐만. 내가 갈 수 있는데…….”
“가만있어. 안 그래도 너 완전 무겁거든?”
에시엘은 페루딘의 말에 버둥거리던 다리를 멈췄다. 그러나 성큼성큼 내딛는 그의 걸음엔 무겁다던 말과 다르게 일말의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끽해야 비슷한 체구이거나 조금 작은 정도일 뿐이라 버거울 법한데 말이다.
작은 머리통의 금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에시엘이 입을 열었다.
“고, 고마워……. 페루딘, 너 굉장히 힘세다!”
에시엘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맘에 부러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작은 손으로는 페루딘의 어깨를 포옥 말아 쥔 채였다.
“그럼 다, 당연하지! 이 몸은 무려 레고니스 가문의 사람이라고!”
페루딘은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도 에시엘의 말에 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늘 그렇듯 자랑스럽게 가문의 위상을 스스럼없이 뽐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작은 머리통 옆, 귀 끝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