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29화 (29/80)

29.

다음 날.

라비아나까지 제 방으로 돌아간 늦은 저녁 시간, 에시엘은 온종일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빈둥빈둥하며 하루를 다 보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본인의 온전한 의도는 아니었다. 이유인즉, 아까 잠시 연무장을 찾았음에도 테이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곧장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개미 한 마리 나돌아 다니지 않아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또 어제는 페루딘에게 업혀 방으로 돌아온 후, 괜찮다 해도 신관을 불러야겠다며 호들갑 떠는 통에 그를 말리는 것만으로도 꽤 애를 먹었었다. 그랬기에 다소 지친 에시엘이 오늘 하루 가만 시간을 보낼 만했다.

겨우겨우 돌아간 페루딘은 어찌 된 이유인지 그 후로 에시엘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제 방에 오지 않은 날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에시엘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어느새…….’

볼모로 잡혀 와 어쩌다 보니 입적까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대공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에시엘은 목숨을 부지하고 저택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렇기 위해선 테이시와 친해지는 것이 현재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책이었다. 장차 레고니스 가문을 세습할 아이와 친해진다면 도망치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테이시 성격에 아무렴 자신 같은 사람이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쓸 테니까.

‘좋아. 그럼 보육원으로 가는 거야.’

만약 제 뜻대로 순탄히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에시엘은 가장 먼저 보육원에 갈 생각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최종 목표가 되리라.

롬포드 대공이 말하길 보육원은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고 했지만 제가 아는 소설 속의 마카이른 제국이라면 그럴 리 없었다. 마카이른 제국은 분명 산과 바다, 뭐 하나 빠지지 않으며 입지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위치에 있어 모든 것이 번영한 대제국이었다.

‘아무래도 대공은 귀족 생활만 해서 잘 몰랐던 걸지도 몰라.’

이러한 제국이라면 한낱 보육원일지라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었다. 롬포드 대공의 말은 그저 그런 소문에 그쳐야 했다. 에시엘은 잡다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에시엘의 방문을 노크했다.

“어?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 있던 에시엘은 몸을 일으키며 소리가 들려온 문을 바라봤다. 그러곤 방의 한쪽에 나 있는 창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해가 길게 뜨는 여름이건만 지금 창밖엔 캄캄한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간엔 저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페루딘인가……?”

에시엘은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면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마주한 사람은 페루딘도 롬포드 대공도 라비아나도 아니었다.

“에, 에시엘 님? 느,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에시엘은 어색한 투로 인사를 건네는 이를 따라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이 사람은 페루딘의 뒤를 늘상 따르던 그의 시종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에시엘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빼꼼히 내민 고개를 들어 시종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가 페루딘도 아닌 그의 시종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의아했다.

“그게, 다른 게 아니라 페루딘 공자님 방에 좀……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별로 멀지 않거든요. 잠깐만 시간을 내 주시면…….”

페루딘의 시종은 말 사이사이에 침묵을 곁들이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주어진 대사를 읊는 사람처럼 종종 허공을 보기도 했다.

“이 시간에요? 페루딘의 방에는 왜요?”

에시엘의 물음에 수상한 행동거지를 보이던 시종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삐질 흘렀다. 에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뒤를 돌아 다시금 창밖을 확인했다. 역시나 어두컴컴한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그, 그게……. 공자님이 아프셔서…….”

시종은 계속해서 뭉그적거리면서 말하길 주저했다. 말을 끝맺지 못하는 모습이 어딘가 수상해 보이기도 했다. 에시엘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던 시종은 제 손바닥을 바지에 연신 문질렀다.

“아파요? 페루딘이요?”

살풋 인상을 찡그린 에시엘이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페루딘은 오늘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거뜬히 업을 만큼 멀쩡하다 못해 튼튼했는데, 고작 하루 사이에 아프다는 사실은 조금 믿기 어려웠다.

“예, 조금 아프셔서……. 아! 아니, 많이요. 굉장히 아프십니다. 그것도 엄청나게요.”

“어디가 아픈데요?”

“예?! 거, 거기까지는 잘…….”

에시엘은 동그란 눈을 끔벅거리며 시종을 쳐다봤다. 시종은 연신 왜인지 모르게 무척이나 어색한 행동을 보였다. 마치 고장이 난 로봇 같은 말투뿐만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손짓과 더불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퍽 미심쩍었다.

“에, 에시엘 님……?”

시종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에시엘의 태도가 불안했는지 재차 되물었다.

‘왜 나를 찾아왔지?’

에시엘은 페루딘이 아프다는 말을 하는 내내 어쩐지 양껏 수상함을 풍기는 시종의 행동에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더욱이 수상한 점은 아픈 아이를 위해 신관을 부르기는커녕 자신을 찾아왔다는 부분이었다.

‘본 적은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이 사람의 옷차림이나 외양적인 것을 보았을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페루딘의 시종임이 확실했다. 에시엘은 여전히 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간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다 자그만 입술을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 해요?”

* * *

시종은 걸음걸이마저 마치 갓난아기처럼 서툴러 보였다. 넘어지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는 에시엘을 앞서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며 그녀가 잘 쫓아오는지를 확인했다.

머지않아 시종은 걸음을 멈춰 선 곳 앞에서 노크한 뒤 잠시간 뜸을 들이곤 문을 열었다.

이에 에시엘은 시종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자신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널따란 방이었다. 아무래도 정말 페루딘의 방으로 데려다준 게 맞는 듯했다.

에시엘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평소의 페루딘이라면 시끌벅적하게 맞이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정말 많이 아픈 모양인지 예상과는 달리 그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도 늘 우렁차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페루딘이 아프다던 시종의 말과 다르게 너른 방 어디에서도 땀을 닦아 내기 위한 물수건이나 그를 간호하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이상함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으며 방의 주인을 찾았다.

“페루딘?”

이름을 부르자 볼록이 솟아오른 이불이 언뜻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에시엘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새하얀 이불을 살짝 그러쥐며 말했다.

“페루딘, 많이 아파?”

“…….”

“진짜 많이 아픈가 보네…….”

에시엘의 걱정 서린 목소리에도 페루딘은 다시금 미약한 움찔거림만 보일 뿐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에시엘은 이불의 끄트머리로 빼꼼히 보이는 금색의 머리칼을 바라보며 작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대공님께 얘기하고 올게. 얼른 신관을…….”

그 순간이었다.

“아, 안 돼!”

몸을 벌떡 일으킨 페루딘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에시엘의 옷자락을 다급히 붙잡으며 소리쳤다.

“…….”

“…….”

에시엘의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과 페루딘의 다급함이 깃든 눈빛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헛!”

페루딘은 저도 모르게 소리쳐 당황한 듯 흔들리는 새빨간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곧 정신을 차리듯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내며 다급히 붙잡았던 그녀의 옷자락을 순식간에 내팽개쳤다.

그러곤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느 때보다도 재빠르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에시엘은 일련의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왕방울만 해진 눈만 끔벅였다. 아프다고 전해 들었던 페루딘이 대뜸 안 된다고 소리친 원인이 제 아버지인 대공에게 얘기하겠다는 것 때문인지, 신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침대의 새하얀 이불은 또다시 볼록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것을 가만 보던 에시엘은 롬포드에게 향하려던 생각을 접어 두곤 근처의 의자를 질질 끌어와 침대 가에 두고 앉았다.

“페루디인. 혼날까 봐 그래?”

에시엘은 말끝을 늘이며 집게손가락으로 유독 솟아오른 부분을 콕콕 찔렀다. 이에 그 속에 몸을 숨겼을 페루딘이 희미하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해야 할까…….”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에시엘의 머릿속엔 롬포드 대공이 페루딘을 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장차 레고니스가의 차남으로서 위상을 떨쳐야 하는데, 고작 아프다는 이유로 벌써부터 시답잖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해선 안 된다며 말이다.

평소 제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페루딘이기에, 롬포드 또한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이기에 세울 수 있는 가설이었다.

에시엘은 콕콕 찌르던 행동을 관두곤 작은 손으로 새하얀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부름에 그저 움찔거리기만 할 뿐,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페루딘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좋은 방도라도 떠올린 듯 양손을 맞부딪히며 손뼉을 쳤다. 이에 도통 모습을 드러낼 기미를 보이지 않던 페루딘은 마음이 바뀌었는지, 슬그머니 이불을 내리곤 새빨간 눈을 빼꼼히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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