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37화 (37/80)

37.

“혀, 형……?”

소란스러움에 찬물을 끼얹듯 페루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대립하던 이들의 이목이 페루딘을 향해 쏠리는 것도 잠시, 남자는 다시 에시엘을 높이 쳐들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손을 깨무는 것도 모자라서 내 턱수염까지! 이걸 어쩌나, 이젠 그냥 보내 줄 수 없겠는데?”

남자는 만면에 야비한 웃음을 띠며 테이시를 향해 잇자국이 난 손등을 내보였다. 고른 치열을 따라 야무진 홈이 패어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돈은 다 드릴게요……!”

에시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얼굴 가까이 가방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다.

“저게, 에시엘한테 뭔…… 아야!”

페루딘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한 발을 내디뎠지만 다시 픽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곤 자신의 발목을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페루딘! 괜찮아?”

“넌 가만있어!”

페루딘의 앓는 소리에 깜짝 놀란 에시엘이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에시엘을 붙든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한심하네요.”

가만히 관망하던 테이시의 새빨간 눈동자가 남자에게 닿았다. 그는 여전히 어느 감정도 나타내지 않으려는 듯 건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곧 천천히 걸음을 옮긴 테이시가 남자의 앞까지 당도했다.

“뭐, 뭐야.”

남자는 저도 모르게 조금씩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저보다 어린 남자아이일 뿐인데 섣불리 대응할 수 없었다.

비단 날이 선 검을 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의 담담한 태도와 상반되는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절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잠시 실례.”

테이시는 에시엘을 붙든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이의 손에 비해 굵직한 손목이 한 번에 잡히진 않았지만, 움켜쥔 힘만큼은 단연 성인의 악력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으, 으윽…….”

곧 남자의 입에선 고통스러운 신음이 내뱉어졌다. 이와 동시에 에시엘의 뒷덜미를 붙든 손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고, 그것을 눈치챈 테이시는 남자의 손목을 서서히 끌어 내렸다. 일말의 표정 변화조차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제, 젠장!”

당황스러운 듯 비속어를 내뱉던 남자는 이윽고 에시엘을 완전히 내려놓기에 이르렀다. 한참 어린아이에게 조금도 응수하지 못하는 모습이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테이시는 그녀의 발이 땅에 닿고 난 후에야 남자의 손목을 놔 주었다.

“괴, 괴물……. 이놈은 괴물이야!”

그는 얼이 빠진 채로 자신의 손목을 문지르며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머지않아 그 걸음은 줄행랑이 되어 남자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달아났다.

“…….”

“구, 구해 줘서 고마워.”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 붉어진 에시엘의 얼굴에 채 닦아 내지 못한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테이시의 가까이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건넸다. 남자에게 붙잡혔던 목덜미에 생겨난 붉은 자국이 그녀의 뽀얀 피부와 더욱 대비되어 안쓰럽게만 보였다.

하나, 자신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테이시의 모습에 에시엘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뒤쪽에서 페루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아! 나 발목이 아파…….”

잔뜩 기운이 빠져 풀이 죽은 듯한 음성이었다. 이에 테이시는 오랫동안 바라보던 에시엘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시의 움직임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페루딘이 입술을 빼죽 내민 채, 칭얼거리며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테이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고분고분 제 동생의 투정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자신과 동행하던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머지않아 테이시가 앞장을 선 채, 페루딘을 등에 업은 기사와 함께 에시엘 가까이 다가왔다.

“따라와. 이제 갈 거니까.”

테이시가 에시엘에게 무심한 투로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야! 그게…… 돌아가야겠는데…….”

기사의 등에 업혀 있던 페루딘은 에시엘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우물쭈물 말했다. 그러면서 괜스레 기사의 어깻죽지를 만지작거렸다. 자신 때문에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 짐짓 미안한 기색이었다.

“와, 잘됐다! 마침 나도 지겨웠거든. 헤헤.”

“그, 그렇지? 그럴 거 같아서 내가 먼저 말한 거다?”

“근데 너 발목은 괜찮아?”

에시엘은 내심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페루딘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그리고 좀 전에 언뜻 아프다고 말했었던 그의 발목을 쳐다봤다. 피부가 살짝 부어오른 듯 벌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냥 살짝……. 아, 아니! 괜찮으니까 빨리 따라오기나 해!”

하지만 페루딘은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테이시에게 어리광 부리던 때와는 달리, 고개마저 홱 돌리며 오히려 일부러 말을 돌리는 모습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눈치였다.

곧이어 그는 자신을 업은 기사의 어깨를 때리며 ‘출발, 출발!’ 하는 말을 반복하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에시엘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테이시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이 빨개.”

그렇게 말하며 그는 에시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자신의 품에 있던 상아색 체크무늬 손수건이었다.

덜컹, 덜컹. 수레바퀴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들을 태운 마차는 안전하면서도 신속하게 대공저를 향하고 있었다.

어쩐지 마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테이시는 고개를 살짝 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페루딘마저도 평소처럼 실컷 떠들기는커녕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그의 살풋 찡그린 미간과 꾹 다문 입술이 그것을 방증해 주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에시엘은 자신의 하얀 가방을 다리 위에 놓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양손으로 천천히 어루만졌다. 페루딘이 선물한 머리핀이며 귀금속이 가득한 가죽 주머니, 라비아나가 챙겨 준 쌈짓돈까지 모두 온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이 모든 것은 갑자기 나타난 테이시 덕분이었다. 테이시가 때마침 야시장에 있던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목이 빨개.”

에시엘은 이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테이시가 건넨 상아색을 띠는 체크무늬 손수건은, 자신의 목에 매여져 있었다. 에시엘이 어설픈 솜씨로나마 벌게진 목이 옷깃에 쓸리지 않도록 동여매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목에 두른 손수건이 어색한 듯 자그만 손을 들어 올려 살살 매만졌다. 그러면서 마차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슬몃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야.”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페루딘이 집게손가락으로 에시엘의 무르팍을 콕콕 찔렀다.

“으응?”

“뭐야, 이거?”

어색한 대답이 들려오자, 페루딘의 집게손가락이 이번엔 에시엘의 목 언저리를 콕콕 찔렀다. 갑자기 생겨나 목에 둘러진 손수건의 정체를 묻는 것이었다.

“아, 이거 테이시가…….”

“뭐? 형이?”

에시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놀란 듯 조금 커진 목소리로 되묻는 음성이 돌아왔다. 페루딘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시엘과 손수건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본인의 고개를 홱―, 빠르게 돌려 마주 앉아 있는 테이시를 바라봤다.

“형아.”

페루딘이 나지막이 테이시를 불렀다. 느닷없는 행동을 하는 페루딘은 입술을 야무지게 다문 채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했다.

“야시장엔 왜 왔어?”

“…….”

테이시는 시선을 맞춰 오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눈을 천천히 두어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가 빠르게 달리는 만큼 창밖의 풍경도 흐릿해진 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형아!”

“아잇, 깜짝이야.”

페루딘의 커진 목소리에 에시엘이 화들짝 놀라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녀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뜬 채 바라보자 페루딘은 이를 힐끔 쳐다보고 말 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왜 왔냐니까?”

불퉁하게 말하는 페루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제법 매섭게 쏘아보는 눈초리에선 마치 레이저라도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새 검이 필요해서.”

“새 검이 필요해?”

“…….”

마침내 들려온 테이시의 간결한 답에도 뭔가 마땅치 않은 듯, 페루딘은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의아해졌는지 본인의 고개를 어렴풋이 기울이면서 테이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에시엘은 불안한 눈빛으로 형제를 번갈아 봤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의 테이시와 달리 페루딘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또다시 페루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몹시도 의아해하는 투로.

“연무장에 널리고 널린 게 검이잖아?”

페루딘이 석연치 않게 여기던 점은 아무래도 이 부분인 듯했다.

그가 의문을 품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제국의 검이라 칭송받는 레고니스 가문에 검이 부족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치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았다.

대공가에선 양질의 검을 늘 구비해 두는 것은 물론이고, 시시때때로 더 뛰어난 검을 제련하기도 했다. 훌륭한 검이 차고 넘치는데 고작 야시장에서 파는 장난감 같은 것으로는 테이시의 성에 차지 않을 터였다.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그렇기에 의외의 대답이었다. 테이시는 또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길게 뻗은 수풀 사이로 어느새 대공저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듯했다.

“뭐어? 벼얼로? 마음에 드는 검이 없다니, 그게 말이 돼?”

페루딘은 비아냥거리며 부러 테이시의 말을 따라 했다. 여태껏 잘 붙이고 있던 엉덩이마저 들썩이며 흥분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좋을 대로 생각해.”

테이시는 그 말을 끝으로,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시엘을 한번 쳐다보곤 소음을 차단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돌연 눈이 마주쳤던 에시엘만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이씨…….”

페루딘은 귀여운 투정을 내뱉으며 본인의 아랫입술을 야무지게 깨물었다. 그러곤 이전보다 더욱더 열렬하게 테이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둘 사이에 오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야시장에 검을 빌미로 들른 테이시와, 그런 테이시의 행동을 사사건건 꼬투리 잡으며 마뜩잖게 여기는 페루딘.

페루딘이 조금 더 일방적이긴 하나, 형제는 어쩐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탓에 결국 에시엘만 괜히 좌불안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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