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38화 (38/80)

38.

‘이 분위기 어떡해!’

에시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다리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손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불안한 눈동자는 한곳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새하얀 가방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페, 페루딘! 이거, 이거. 나한테 해 줄래?”

에시엘은 가방을 뒤적거려서 꺼낸 파란색 상자를 들이밀었다.

“엉? 내, 내가?”

페루딘은 얼떨결에 받아 든 상자를 답지 않게 조심스레 열었다. 깃털 모양을 한 머리핀은 여전히 눈이 부실 만큼의 찬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곧 페루딘이 어색한 손길로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여기!”

그러자 에시엘이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방긋 웃으며 짤막한 검지로 자신의 옆통수를 가리켰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어어……?”

“얼른, 얼른.”

이어 들려오는 재촉에 페루딘은 멍하니 에시엘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봤다. 어딘가 모르게 넋이 나간 듯한 페루딘의 모습은 조금 의아했지만, 에시엘의 머릿속엔 마차 내부에 들어찬 미묘한 분위기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차, 참 나. 이런 건 혼자서도 할 수 있잖아.”

페루딘은 이내 빠르게 시선을 거뒀다. 동시에 고개를 푹 숙이면서 어색하게 쥐고 있던 머리핀을 보곤 평소처럼 툴툴거리며 중얼댔다.

그러곤 어떤 결심이라도 하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머지않아 붉은 머리칼을 향해 뻗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페루딘은 이런 게 서툴겠구나.’

에시엘은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여자 형제가 없을뿐더러 엄마의 온정을 느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새에 머리칼 위로 깃털 모양의 머리핀이 단정히 자리했다.

“고마워! 헤헷.”

“우, 웃지 마! 너……. 너…….”

“뭐어? 내가 뭐?”

“뭐냐면……. 으음……. 너 바보 같아!”

페루딘은 제법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국엔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었다. 끝내 고개마저 반대쪽으로 돌려 버리는 모습은 꽤 얄밉기까지 했다.

“바보……? 치. 너도 완전! 바보 같거든!”

에시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씩씩거리다가 토라진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 탓에 그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페루딘의 붉게 물들어 있는 귀 끝이었다.

* * *

“못됐어, 못됐어.”

심통 난 걸음의 에시엘이 둔탁한 소음을 내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뜀박질하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길목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주방이었다. 그곳의 주방장인 도프니는 제국 제일의 뛰어난 셰프이기도 하나, 에시엘에게는 둘도 없는 스승 겸 친구였다.

“진짜 그런가……?”

내내 페루딘의 말을 되새기던 에시엘이 돌연 급브레이크를 밟은 듯 우뚝 멈춰 섰다.

“뭐냐면……. 으음……. 너 바보 같아!”

고개가 절로 갸울어지고 살풋 인상이 찌푸려진다. 기억을 지우려는 듯 에시엘은 빠르게 도리질 쳤다. 그리고 또다시 한 걸음 디디려는 찰나, 제법 큰 말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프니다!”

에시엘은 금세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곤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도프니로 추측되는 인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후다닥 달려간 에시엘이 그의 옆에 서서 숨을 골랐다.

“헥……. 도프니, 어디 가는 거야? 혹시 바빠?”

“오, 에시엘! 무슨 일이냐? 딱히 바쁘진 않다만…….”

주방과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한 도프니는 에시엘을 반기면서도, 목에 걸고 있던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이내 어딘가로 향해야 하는 듯 보였다.

“으응. 그게,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거? 허허. 나도 궁금해지는 걸? 얼른 얘기해 봐!”

이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춘 도프니는 에시엘의 장단을 맞춰 주듯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덩달아 자리에 선 에시엘의 희미한 고갯짓에 따라 머리핀이 반짝거렸다.

“그게…….”

말하기를 머뭇거리는 아이의 모습은 알 수 없는 긴장감마저 유발했다. 도프니는 아이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이에 에시엘이 결심한 모양인지 제법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 웃을 때 말이야. 바보 같아?”

“아…….”

하지만 곧장 대답하려던 도프니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른 이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뚜벅뚜벅.

“누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지?”

서늘한 구둣발 소리만큼이나 냉정한 목소리가 둘의 대화 사이를 파고들었다.

롬포드가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냉혹하고 매서웠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불과 몇 초 전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롬포드는 어느새 에시엘과 도프니의 코앞까지 다가와 재차 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롬포드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듯 집요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전에 서둘러 아무 답이라도 먼저 내놓아야 했다.

“저, 주인님, 그게…….”

도프니는 다급히 서두를 꺼내곤 우물쭈물 롬포드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모시는 주인의 행동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롬포드는 머뭇거릴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폭발해 버리는 지뢰나 다름없었다.

곧 롬포드의 무감한 시선이 도프니를 향했다. 이에 무어라 입을 떼려는 찰나, 에시엘이 한발 먼저 선수를 쳤다.

“대, 대공님! 그게……. 제가요, 제가 궁금해서 그런 거예요.”

“네가?”

“네에! 도프니한테 물어볼…….”

“잠깐.”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롬포드는 손을 들어 에시엘의 말을 저지했다.

그러자 정적이 흐르고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에시엘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은연중에 혹여나 말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 왜, 왜 그러십니까?”

결국엔 도프니가 불안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롬포드가 쏘는 분노의 화살이 이 작은 아이보단 본인에게 향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하지만 롬포드의 시선은 여전히 에시엘을 향해 있었다.

“네?”

“이자를 뭐라 부른 거냐고.”

“네……?”

에시엘은 롬포드가 하는 뜬금없는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멍하니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방금까지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던 머릿속은 초조함에 점차 새하얗게 물들고 말았다.

“아, 하하……. 그게, 별다른 건 아니고 에시엘이 그저 순수하게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구원 투수라도 자처한 듯한 도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연하지 못한 핑계에 롬포드의 매서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에시엘이?”

“예? 예…….”

도프니는 선뜻 답을 하면서도 연신 롬포드의 눈치를 보았다. 재차 되묻는 짤막한 말은 가시라도 돋친 양 날카로웠으나 섣불리 나선 본인의 행동을 후회하긴 늦었을 때였다.

에시엘 역시도 긴장한 나머지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드레스 자락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맞닥트린 대공이 별안간 압박해 오는 이 상황의 묘책이 나지 않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대공은 그녀에겐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때에, 한층 누그러든 듯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반말이 자연스럽군.”

“…….”

“꽤나 친근해 보이고.”

롬포드는 난데없이 반말에 초점을 두었다. 더군다나 왜인지 모르겠으나 도프니와의 친분을 눈여겨본 듯했다.

의외의 논점에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롬포드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누그러든 말투와 달리 눈빛은 여전히 매섭게 이글거렸다. 어떠한 답이라도 내놓길 바라는 듯이.

“유독 이자에게만 말이야.”

“네? 무슨…….”

“네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이가 누구지?”

“그야…….”

눈치를 살피듯 머뭇거리는 에시엘을 보는 롬포드의 눈빛은 더욱더 이글거렸다. 에시엘은 그가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입적했기로서니 감히 볼모 주제에 사용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문제 삼는 걸까. 혹은 입적까지 하고 나니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든 것일지도 몰랐다.

에시엘은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럴싸한 이유들 때문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쯧.”

“…….”

그런 거라면 잘못을 빌면 된다. 아직은 이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에시엘도 대처할 방도가 없었다.

“아직 잘 모르는군.”

“뭘……요?”

길게 뻗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에시엘은 움켜쥐었던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 긴장감에 자꾸만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닦아 내기 위함이었다.

“반말도, 친근하게 구는 것도, 네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우선시되어야 해.”

“하, 하지만 대공님은…….”

“문제 있나? 고작 사용인에겐 잘만 하는 것을 내게만 못 하진 않겠고.”

롬포드는 에시엘의 말을 단박에 잘라 냈다. 그는 어쩐지 에시엘의 행동을 강요하고 있었다. 제삼자인 도프니가 보기엔 마치 질투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롬포드의 눈치가 보여 그저 아무 말 못 하고 불안하게 분위기만 살필 뿐이었다.

“그건요, 도프니는 친구라서…….”

변명이라도 하듯 에시엘이 고개를 숙이며 조그만 입을 오물쪼물 움직였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는 결국 끝맺어지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시선만이 롬포드의 뾰족한 구두코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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