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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39화 (39/80)

39.

“친구?”

조금은 생소한 단어에 롬포드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롬포드는 여태껏 친구라 여긴 사람이 없었다. 가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면 그런 것 따윈 사치였다.

데뷔탕트 후 이제껏 만나는 사람도 전부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조막만 한 아이의 말을 쉬이 이해할 순 없었다.

“그, 그럼요. 저는 고작 사용인일 뿐이지만, 주인님께선 어찌 이 어린아이와 친구를 하겠습니까? 다른 이들의 시선도 있고…….”

도프니는 롬포드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히 이야기의 틈을 파고들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 롬포드로선 그런 것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나 마냥 무시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레고니스가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대공가인 만큼 늘 여러 가문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더더욱 이목이 쏠린 상황이었다.

“…….”

“저…….”

기가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시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도프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대, 대공님께도 그렇게 해 볼게요.”

맞잡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끝내 롬포드와 시선을 맞춘다. 마주한 레드와인색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다잡은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좋군.”

* * *

이른 오후, 테이시는 평소보다 일찍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평소보다 이르게 기상을 하고, 이른 아침 식사를 하는 등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덕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빠른 시각에 늘 향하던 곳을 가는 것뿐이었다.

광대한 연무장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적막함이 흘렀다. 분명 오후에도 기사들의 검술 연습이 있을 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맞물리지 않는 일정 덕에 그들을 마주칠 일은 없었다.

“후…….”

테이시는 늘 그렇듯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지금 손에 쥔 검의 의미는 조금 특별했다. 여섯 살 생일 무렵 롬포드에게 이 검을 받게 된 테이시는 남들보다도 조금 일찍 검술을 배웠다.

달갑지 않은 선물이라는 생각은 잠깐뿐이었다. 테이시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였다. 그날 이후, 손잡이에 덧댄 가죽마저 닳고 닳아서 해질 만큼 수차례 손에 쥐었던 검이었다.

테이시는 양손으로 붙든 검의 손잡이를 쓸어내렸다. 굳은살이 무성한 손가락 마디마디에, 가죽에 각인된 레고니스 가문의 상징인 뱀 문양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연무장의 한쪽 벽에 자리한 창을 통해 햇살이 내리쬔다. 그 햇살을 받은 날렵한 검의 날은 눈이 부실 만큼 빛이 났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칼날만큼은 무뎌지지 않도록 매일같이 관리했다.

테이시는 충분히 뛰어난 실력에도 본인을 채찍질하기 바빴다. 가문을 세습해야 하는 테이시에게 그만큼 검술이 가지는 의미는 남달랐다.

“…….”

훈련용 짚 인형 가까이 다가간 그는 검을 휘두르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문득 연무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어쩐지 아이의 생생한 구두 굽 소리를 들은 듯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광대한 연무장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테이시는 그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둬 훈련에 집중했다.

“하…….”

하지만 연신 휘두르는데도 검은 왜인지 모르게 오늘따라 자꾸만 훈련용 짚 인형을 엇베었다. 그것마저도 평범한 이가 보기엔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를 실력이었지만, 테이시의 성엔 차지 않는 듯했다.

테이시는 결국 검을 거두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난히 멀쩡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훈련용 짚 인형을 괜스레 노려봤다.

이내 시선을 옮기던 중, 연무장 한 곳에 자리 잡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와 동시에 작은 아이의 잔상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만히 앉은 채로 발장난을 치는 행위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듯이 부릅뜬 눈과 야무지게 앙다문 입술.

“큭.”

그 모습이 퍽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가 어색하다고 느낀 테이시는 그것을 금세 얼굴에서 지워 냈다. 불현듯 그 아이의 잔상이 왜 떠올랐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테이시는 또다시 연무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훈련 중에는 항상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길 바라지만 어쩐지 허전한 기분에 자꾸만 눈길이 향했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익숙하지 않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문득 느껴지는 이상함에 살풋 인상을 찡그리는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지금 오지 않는 아이를 걱정한다기보단, 단지 맛이 좋던 디저트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애써 부인했다. 실로 부적절한 자기 합리화였다.

결국 테이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연무장을 나서기 위해 평소보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훈련을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단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테이시는 내딛는 걸음마다 힘을 주며 지르밟았다. 그것은 혼나기 위해 교무실에 불려 가는 학생처럼 무거운 발걸음과는 달랐다.

걸음 사이사이 간혹가다 새어 나오는 바람 빠지는 것 같은 가벼운 웃음은 오히려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음을 나타내는 듯했다.

어떤 이유인지 들떠 보이는 테이시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노란색의 동그란 통이었다. 이를테면 지난번 주방장이 에시엘에게 전용 도시락 통이라며 준비해 준 것과 몹시 흡사했다.

지르밟는 걸음마다 노란색의 동그란 통에서 희미하게 나는 달그락 소리가 뒤따랐다. 그 통의 반투명한 뚜껑을 통해 보이는 내용물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일러두신 대로 만들긴 했지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도련님께서 드시려는 겁니까?!”

“이만 가겠습니다.”

테이시가 수하에게 미리 준비하라 명해, 주방장이 만들어 놓은 쿠키였다. 얼핏 꽃처럼 보일 법한 모양의 가운데에는 노르스름한 파인애플 잼이 발려 있었다.

쿠키를 들여다보던 그는 반색하며 호들갑 떠는 주방장을 힐끔 쳐다보곤 그저 덤덤히 쿠키가 담긴 통을 가져갈 뿐이었다.

주방장이 그토록 호들갑을 떨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저택에서 누군가 무엇을 만들라 명한 것은, 그가 레고니스가의 주방장 자리에 갓 들어왔을 적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테이시라고 해서 처음부터 매사 무관심한 성격의 아이는 아니었다. 어릴 적 그 또한 여느 아이들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어린이였으리라.

점차 변하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한때 맑게 웃을 줄 알던 아이에게도 좋아하는 것들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부드럽고 달콤한 디저트, 작고 귀여운 동물 등이었다. 그러한 것들만 보아도 아이의 유순한 심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이시는 이 가문의 장남으로서 그러한 자신의 취향을 점차 감추려 했다. 누군가 그에게 강요한 적은 없으나 아마 여섯 살 생일 무렵 아버지에게 선물로 검을 받을 즈음부터 스스로 깨달았는지 모른다.

아이는 차츰 감정을 다스리는 법 또한 스스로 알아 갔다. 해가 갈수록 내색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며 본인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애를 썼다.

“……나쁘지 않네.”

테이시는 바삐 옮기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반투명한 뚜껑이 덮인 통 속을 들여다봤다. 한데 어우러진 꽃 모양의 쿠키가 언뜻 꽃밭을 연상케도 했다.

주방장이 유난스럽게 방정을 떨면서 갑작스레 만든 쿠키는 테이시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한 쿠키와 함께 재차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낯선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침실과 집무실, 서재가 밀집된 2층 한편의 어느 방.

똑똑―.

그 앞에 선 테이시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제법 힘 있게 노크했다.

“누구세요?”

방 안쪽에서 들려오던 우당탕하는 소리와 달리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곧 에시엘이 좁은 문틈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보였다.

“어어……?!”

놀란 에시엘이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자 녹옥빛 눈동자가 한층 선명한 색을 띠었다. 제 방에 온 손님이 무척이나 의외였던 모양이다.

“테이시! 어쩐 일이야?”

에시엘은 금세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유난히 반가워하는 기색은 단순히 누군가 찾아왔기 때문인지, 방문한 인물이 테이시라는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테이시는 제 발로 찾아왔음에도 에시엘의 반색이 무색할 만큼 선뜻 서두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에이, 다리 아프겠다. 일단 들어와!”

그를 가만 바라보던 에시엘은 결국 테이시의 손목을 끌어당겼고, 그는 얼떨결에 방 안까지 들어서고 말았다.

‘저 아이가 웬일일까.’

의자에 자리 잡고 앉은 에시엘이 고민에 잠긴 채 발을 까딱였다. 그런 그녀와 달리 테이시는 방에 들어선 후에도 붉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릴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에시엘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일부러 찾아온 손님을 내칠 순 없었다.

그러던 중 테이시의 손에 들린 노란색 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딘가 무척 낯익은 느낌의 노란색 동그란 통이었다.

“어어……? 어!”

에시엘이 어정쩡한 모양새로 집게손가락을 뻗어 동그란 통을 가리켰다. 이내 떠오를 듯 말 듯 하던 기억이 어느새 또렷해져 확신에 찬 그녀가 손가락을 꼿꼿이 뻗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모양만 살짝 다를 뿐인 도시락 통은 분명 도프니가 준 것인 듯했다. 만일 그렇다면 통 속의 내용물을 유추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이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

기대감이 들어찬 목소리에선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이에 테이시는 들고 있던 도시락 통의 뚜껑을 느릿한 손길로 열었다. 에시엘은 괜스레 침을 꼴깍 삼키며 테이시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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