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잠깐의 쇠 마찰음이 들리고 열린 문 뒤, 방 안의 풍경은 조금 낯설었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생겨나는 기대와 걱정을 반씩 품고 천천히 들어섰다.
그곳은 서재였다. 벽을 가득 메운 서가와 더불어 한쪽에 놓인 책상 뒤로 커다란 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로이 들어차 책상 위를 비췄다. 실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에이, 아무도 없잖아.”
따스한 기운과 상반되게 실망감 섞인 말이 새어 나온다. 에시엘은 방 안을 휘 둘러보며 책상 가까이 다가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누군가 읽다 말고 펼쳐 놓은 책이 있었다.
“낙서인가……?”
내용을 살피던 에시엘의 인상이 점차 찌푸려졌다. 책 속에는 한눈에 알아차리기조차 힘든 꼬부랑글씨가 가득했다. 이내 관심이 사그라든 그녀가 시선을 돌릴 때였다.
“뭐 해.”
테이시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살짝 열려 있던 문을 그대로 밀고 들어와 가만히 에시엘을 바라봤다.
오후 3시는 에시엘과 테이시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이었다. 장소는 연무장 대신 바로 이곳, 서재였다. 훈련이 있는 기사들과 혹여 마주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훈련 후 지친 몸에 당을 충전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막무가내로 약속을 정한 그녀였다. 그런데도 어쨌든 테이시는 그 약속에 응한 것이었다.
“어어……? 안 오는 줄 알았어. 다행이다, 헤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 에시엘은 놀라는 기색도 잠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테이시를 반겼다. 그리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서재를 보며 했던 불안한 생각을 지워 냈다.
“오해 마. 책을 읽으려고 왔을 뿐이니까.”
테이시는 짐짓 무심한 투로 말했다. 이어 에시엘을 바라보던 시선 또한 거두곤 책상을 향했다. 아무래도 그는 꼬부랑글씨 가득한 책을 펼쳐 놓은 당사자인 듯했다.
“채, 책이라고?”
당황한 듯 되묻는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테이시는 아무 말 없이 책상에 놓여 있던 책을 덮었다. 파란색의 딱딱한 겉표지가 드러났다.
“무슨 책이야? 다 지렁이 같은 글씨만 가득하던데?”
“…….”
“이, 이렇게……?”
답이 들려오지 않자 에시엘은 책에서 보았던 글씨를 떠올리며 제법 신중한 손짓으로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포기한 듯 움직임을 멈춘 그녀는 손가락을 거두고 말았다.
자그만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힐끔 바라보던 테이시가 양장본의 거친 표면을 손으로 훑었다. 곧 그의 입에서 느릿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제학.”
“뭐어?!”
뜻밖의 단어에 한껏 벌어진 작은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더불어 한층 동그래진 눈이 테이시를 향했다. 에시엘은 놀란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걱정이 앞섰다.
‘이 아이…….’
에시엘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렴 열두 살이라지만, 아직 어린아이가 경제학이라는 어려운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할지 의문스러웠다.
원작 소설의 테이시 레고니스는 가문의 세습을 위해 모든 것을 억압받는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레고니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했다. 그렇게 테이시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못한 채 철저히 숨겨야 했다.
테이시는 부당한 억압을 그저 군말 없이 따를 뿐이었다.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어린아이는 옳고 그름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끝내 벗어나지 못한 굴레는 추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 되겠어.’
그것을 알아챈 에시엘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사명감이 생겨났다. 어쩌면 이 가여운 아이에게 즐거움을 찾아 주고 말겠다는 선량한 마음일지도 몰랐다.
“에이, 듣기만 해도 재미없어.”
에시엘이 따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인위적인 하품을 하며 제 작은 입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들겼다. 가늘어진 눈에 숨긴 눈동자로는 테이시의 반응을 살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발끈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여전히 무신경한 태도를 보였기에 정말 원해서 책을 읽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들었다.
그녀가 골몰하는 동안 테이시는 서재 한쪽의 책상으로 향하려는 듯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저기서 이거 같이 먹자!”
당황한 에시엘은 다급히 발랄한 목소리로 간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았던 스콘이 담긴 접시를 잽싸게 테이시에게 들이밀었다.
이내 움직임을 멈춘 그는 가만히 서서 접시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약한 온기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스콘은 먹음직한 냄새를 가득 풍겼다.
“마음대로 해.”
“좋아!”
곧이어 테이시의 붉은 눈동자가 무심히 에시엘에게 닿자, 그녀는 명쾌한 대답만큼 신이 난 발걸음으로 간이 테이블을 향했다. 그 뒤를 느릿한 걸음으로 저벅저벅 뒤따른 테이시는 곧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에시엘은 테이블 위에 놓았던 동그란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스콘 하나를 집어 들곤 한 입을 야무지게 베어 물었다. 스콘이 일정 부분 사라지며 작은 잇자국이 남았다.
“세상에……. 테이시도 먹어 봐. 얼른, 얼른!”
작은 입 사이로 감탄이 새어 나오는 것도 잠시, 에시엘이 서둘러 테이시를 재촉했다.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라도 든 모양인지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
하지만 테이시는 미동 없이 가만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왜인지 모르게 집요한 눈길로 에시엘의 움직임을 좇았다.
“왜, 왜?”
이상한 낌새에 고개를 들자 돌연 눈이 마주친다. 괜스레 멋쩍어진 에시엘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채 다 먹지 못한 스콘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고개를 숙이곤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검술.”
“으응?”
나지막이 들려오는 음성에 에시엘이 저도 모르게 슬몃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테이시의 빨간색 눈동자가 온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려 줄게.”
어쩐지 자꾸만 시선이 닿는 아이의 가녀린 목은 그저 희게만 보였다. 일전에도 확인했었던 그날의 흔적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이 역시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함께 먹자며 가져온 스콘을 그저 맛있게 먹을 뿐이었다.
오히려 의연하지 못한 이는 본인인 듯했다. 그렇기에 훈련도 집중하지 못한 채 휘둘리듯 자꾸만 끌려다니는 것이리라.
붉은 머리칼의 아이는 마치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처럼 스콘을 먹는 데 집중했다. 제가 무섭지도 않은지 모든 경계심을 허문 듯 일말의 두려운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테이시는 눈앞의 그런 아이를 보며 제 감정의 의미를 명명하려 애썼다.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만이건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왜일까. 제가 느끼기에도 이상스러운 행동이었다.
지난날, 아이가 기사도 대동하지 않은 채 페루딘과 둘이서 야시장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발길도 하지 않을 곳이었다. 가 보고 싶은 마음도, 관심도 없는 그곳에 가는 일은 오히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함께 나서는 기사들 역시도 눈에 띄지 않게 그의 눈치를 살살 보았더랬다.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할 즈음엔 먼저 움직인 몸이 이미 야시장에 당도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의 분명한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라 결론지을 뿐이었다. 아이가 제게 여느 누구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의문스럽기도 하거니와, 아직 어린 그는 모든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검술을……?”
“알려 달라고 했잖아.”
언젠가 에시엘이 생떼 부리던 것을 여태 잊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은근히 건네는 섬세한 말과 달리 테이시는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에시엘은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내포하는 바를 모두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의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땐, 그녀에게 그저 관조적일 뿐 일련의 행동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 듯했다.
“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에시엘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잔뜩 기대감이 서렸다. 당황한 탓에 되묻긴 했으나, 서둘러 자세를 고쳐 앉는 그녀의 입가엔 금세 미소가 피어오르며 해사한 웃음이 생겨났다.
“…….”
테이시는 가만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소 짓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운 듯도 했다.
“고마워!”
여전히 답이 없는 모습에 에시엘은 혹여나 그가 약속을 물리기라도 할까 싶은 맘에 서둘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테이시는 추후 저택을 빠져나가 도망을 치기 위해 도움을 받을 우군으로 점찍어 둔 상대였다. 그렇기에 그와 좋은 관계를 쌓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게다가 검술과 같이 몸을 쓰는 운동을 배워 둬서 나쁠 건 없었다.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훗날, 아주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자, 이건 내 답례!”
반달처럼 예쁘게 휘어지던 눈웃음을 서서히 거둔 에시엘은 스콘이 담긴 동그란 접시를 들어 다시금 테이시 쪽으로 건넸다.
“됐어.”
“어어? 마, 맛있는데…….”
에시엘은 내밀었던 손을 어정쩡하게 거두었다. 어쩐지 그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즐겁던 기분이 사그라지는 듯도 했다.
“네 몸이나 잘 챙겨.”
“엉?”
순간 이어지는 테이시의 말은 귀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어쩐지 걱정하는 듯한 투로 들렸기 때문이다.
에시엘은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내려놓곤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가 뱉은 말의 의중을 헤아리려 나름 애를 쓰는 모양새였다.
다정한 듯 무심히 건네 온 말에선 지난날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았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성가시게 굴지 말란 얘기야.”
당황한 채 멍하니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 테이시가 재차 말을 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거면 일을 벌이지도 말고.”
“어, 어……?”
“……계속 도와주진 않을 거니까.”
이내 부딪히던 시선을 거둔 테이시는 고개를 돌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서가를 바라봤다. 그 움직임을 따라 롬포드를 빼다 박은 듯한 칠흑빛 머리칼이 살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