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테이시는 지난 야시장에서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금품을 노리고 나타난 괴한의 습격.
그날은 운이 좋게 때마침 나타난 테이시 덕분에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후에 벌어졌을 상황은 아찔하기만 했다.
“응, 알겠어!”
에시엘은 괜스레 더욱 밝은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러자 서가를 바라보던 테이시는 시선을 살짝 돌려 잠시간 그녀를 쳐다봤다.
“네가 알려 주는 검술이라면 걱정 없잖아, 그치?”
곧장 말을 덧붙인 에시엘은 그를 향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이에 재차 그녀를 바라본 테이시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
“잘― 알려 줄 거지?”
대꾸하지 않는 그에게 익숙해진 것인지, 에시엘은 미소 띤 얼굴을 살짝궁 기울이며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잘’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는 에시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기대감에 찬 듯 유난히도 반짝였다.
“……아무쪼록.”
머뭇거리다 답을 뱉은 테이시는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목소리를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동그란 접시에 놓인 스콘을 거절할 때처럼 빠르고 단순하게 결정지을 수 없었다.
아무리 본인이 먼저 검술을 알려 주겠다 했다 한들, 남에게 먼저 경계심을 풀지 않는 자신의 성격상 그저 그렇게 넘어가고 말아도 될 일이었다. 도중에 다른 기사에게 떠넘겨도 그만이란 말이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며, 살짝 하느작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풍기는 분위기는 어쩐지 이상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와! 최고의 선생님이 생겼다!”
에시엘은 양팔을 뻗치며 탄성을 질렀다. 이에 테이시의 한쪽 눈썹이 희미하게나마 꿈틀 움직였다. 얼핏 놀림을 당하는 것처럼 느낀 탓일까.
“아무튼. 검을 사 와야겠어.”
“엉? 지난번 야시장도 검을 사러 간 거 아니었어?”
“……내 것 말고 네 것.”
에시엘을 바라보며 말하던 테이시는 일순간 움찔하는가 싶더니 곧 평정심을 유지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에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지난날 연무장에서 의도치 않게 검에 깔린 날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럼 같이 가는 거야?”
은근히 묻는 투엔 또다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에시엘은 사실 동행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괜스레 욕심이 났다. 서재에서 둘만의 시간을 갖는 거며 검술을 배우는 것이며, 자꾸만 친해질 기회가 생겨났기에.
“…….”
테이시는 다시금 벽을 가득 메운 서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에시엘의 말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 접시 위의 스콘으로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뭐…… 혼자 가도 괜찮아.”
“같이 가.”
에시엘의 자그만 손이 그것에 닿기도 전에 테이시의 나직한 음성이 서재를 울렸다. 이와 동시에 그의 유난히 새빨간 눈동자가 에시엘을 바라본다. 마주한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았다.
그간의 노심이 빛을 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더불어 갖은 노력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내색하지 않으려 감추기만 급급하던 그의 태도가 비로소 점차 바뀌는지도 몰랐다.
에시엘이 큰 눈을 끔벅거렸다. 어중간하게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였다. 둘 사이 낯설지 않은 정적이 흐르는 것도 잠시, 그녀의 반색하는 들뜬 목소리가 울렸다.
“저, 정말? 언제 가면 좋을까? 지금 당장? 아니면 내일?!”
“…….”
“응? 언제, 언제?”
에시엘은 절로 새어 나오는 기대감을 붙잡기라도 하듯, 어느새 자그만 손으로 주먹을 꼭 쥐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제는 스콘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연신 질문을 쏟아 내며 보채는 데에도 테이시는 가만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냉한 눈빛이었다.
혹여 제안을 물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도통 눈치챌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에시엘이 침만 꼴깍 삼키며 답을 기다리던 중,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상관없어.”
“어어?”
“정해서 알려 줘.”
테이시는 무심히 말을 건네곤 접시 위의 스콘으로 손을 뻗었다. 울퉁불퉁한 모양새의 그것을 집어 살짝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곧 그의 한쪽 눈썹이 아주 희미하게 꿈틀 움직였다.
* * *
서재를 나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 한 시각은 이미 해가 다 저물어 어둑한 어둠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분명 그곳에 오래 머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해가 긴 여름이라 인지하지 못한 탓인지 그저 시간이 지나는 줄 몰랐던 탓인지 꽤 오랫동안 머무르고 만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던 에시엘은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만큼 희미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제법 친해진 것 같지?’
에시엘의 입꼬리가 슬몃 말아 올려지며 그녀의 마음속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들어찬다. 선뜻 검술을 알려 주겠다 말하던 테이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더욱이 발걸음마저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머릿속엔 어쩐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뿐히 내딛던 발걸음은 어느덧 문 앞에 멈춰 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방문을 열고 들어간 에시엘은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이제 와?”
소파에 드러눕듯 몸을 기대고 있던 페루딘이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웅얼거리는 음성이 유난히 차분하게 느껴졌다.
그는 책을 읽다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 펼쳐진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 듯 말 듯 팔랑거리고 있었다.
“페루딘……? 여태 기다렸어?”
“그래, 바보야. 깜빡 잠들 뻔했잖아.”
예상치 못한 시간에 마주한 인물 탓에 에시엘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이내 그녀는 작은 발을 찬찬히 옮겨 방 안으로 들어섰다.
페루딘은 느릿하게 기지개를 켜며 바로 앉았다. 그래도 잠기운이 가시지 않는 모양인지 멍하니 앉아 게슴츠레 뜬 눈을 끔벅거렸다. 심지어는 살짝 튀어나온 송곳니가 보일 만큼 입을 쩍 벌리곤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푸핫.”
그 모습을 본 에시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입을 막아 봤지만 페루딘은 어느새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따가운 눈총을 받은 에시엘이 괜스레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크음.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럼 왜 지금까지 기다렸어?”
“기다린 거 아니고 책 읽은 거거든?”
페루딘은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초롬히 답을 한 페루딘이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곤 고개를 홱 돌리며 턱을 높이 쳐들었다.
그 탓에 보이는 그의 뒷머리가 엉망진창으로 삐죽 솟아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팔짱까지 낀 채 제법 토라진 모습을 보이는 아이는 퍽 귀엽게 느껴졌다.
에시엘은 차마 소리 내어 웃진 못하고 싱긋 미소 지은 뒤 페루딘의 가까이 다가가 옆 의자에 앉았다.
“우와. 이게 뭐지?”
그리고 무척 과장되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은 빳빳한 재질의 종이를 엮어 만든 그림 동화책이었다. 눈에 띄도록 큼직하게 그려진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통통 튀는 색감은 충분히 아이들의 관심을 끌 만했다. 에시엘은 찬찬히 페이지를 넘겨 보다가 행동을 멈추곤 다시금 페루딘을 바라봤다.
“뭐, 뭐야!”
슬그머니 에시엘의 움직임을 훔쳐보고 있던 페루딘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되레 소리쳤다. 그새 새어 나오려는 하품이라도 참았는지 그의 눈 앞머리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너…….”
“왜!”
“졸리면 가서…….”
“그런 거 아니거든?”
페루딘은 누가 봐도 졸린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에시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쏘아붙였다. 어찌 됐든 간에 돌아갈 생각은 없는지 그는 곧 눈두덩이를 거칠게 문지르며 졸음의 흔적을 없앴다.
“그거, 책 읽을 거야.”
이내 소파에 널브러지듯 아무렇게나 몸을 기대앉은 페루딘이 턱짓하며 대뜸 말했다.
“지금……?”
에시엘이 동그래진 눈으로 테이블에 놓인 책과 페루딘을 번갈아 봤다. 이미 밤에 가까워진 시간이건만 더 머무르겠다 말하는 그는 아무래도 동화책을 읽기 전엔 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야 잠들 수 있거든.”
“허―?”
페루딘은 마치 당연하다는 양 제 어깨를 으쓱이며 심드렁히 답했다. 납작하게 눌린 채 삐죽 솟은 금빛 머리칼이 유난히 얄밉게 느껴졌다. 에시엘은 그의 뻔뻔한 태도에 기가 찬 숨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얼른 읽고 가!”
역시 애는 애라는 생각 따위를 한 에시엘이 테이블 위의 동화책을 덮으며 그것을 페루딘 가까이 들이밀었다.
하지만 페루딘은 소파에 기대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에시엘 쪽으로 눈을 힐긋거릴 뿐이었다. 이를 보던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슬며시 입을 연다.
“네가 읽어 주든가…….”
“뭐어? 내가?”
우물쭈물 망설이며 말하는 페루딘의 모습이 왜인지 겸연쩍어 보였다. 에시엘은 놀라서 되묻긴 했으나 곧 그를 가만 살피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스함을 느껴 본 적 없을 거야.’
너무도 어릴 적 엄마를 잃은 탓에, 그 품에 안겨 보지도 못했을 아이였다. 더불어 다소 무심한 가족의 성정으로 인해 온정 또한 느낄 수 없었을 아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그가 무척 가엽게 느껴졌다.
하나 평범하게 자라지 못한 에시엘로선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은 어릴 적 대개 시종들이 책을 읽어 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다리게 해 놓고…….”
“그래! 좋아.”
페루딘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쭉 내밀곤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 음성을 뒤덮을 만큼 활기찬 에시엘의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