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43화 (43/80)

43.

전생의 직업을 생각하면 책 읽어 주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해맑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그리고 페루딘 가까이 들이밀었던 동화책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엉? 너 어디 가?”

“따라와!”

“뭐, 뭐 해?”

당황한 페루딘이 살풋 인상을 찡그린 채 에시엘을 바라봤다. 그녀는 놀란 듯 되묻던 게 언제였다는 양 흔쾌히 승낙하곤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에 점차 당혹감에 물드는 사람은 페루딘이었다.

“동화책 읽어 달라며?”

“그렇긴 한데…….”

책을 끌어안은 채 어딘가로 향하던 걸음을 멈춘 에시엘이 뒤돌아 답하자 그답지 않게 머뭇머뭇 망설이듯 말했다.

반면 에시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릴 뿐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발을 연신 움직이는 그녀를 따라 붉은 머리칼이 살랑였다.

페루딘은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서둘러 뒤를 쫓았다. 조금은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어쩐지 제 예상과는 다른 상황 같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곧 에시엘이 침대 위에 털썩 엎드려 누우며 자신의 옆자리를 통통 두어 번 두들겼다. 이에 두껍지 않은 여름 이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생의 직업상, 종종 겪었던 일이었다.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는 아이에게도 구연동화를 들려주면 곧잘 스르르 잠이 들곤 했더랬다. 그야말로 꿀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엉?”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페루딘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보통은 옆에 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몸짓이라는 걸 알긴 한다만…….

“거기에 같이?”

페루딘이 말하는 ‘거기’란 에시엘이 털썩 엎드려 누워 있는 침대를 뜻했다.

“그럼 서 있게?”

“아, 아니야.”

재빨리 답한 페루딘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가 이내 제 집게손가락으로 좀 전에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나는 저기 앉을게!”

“책 읽고 바로 잘 거 아니야? 왜 거기 앉아?”

에시엘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페루딘을 빤히 쳐다보는 큰 눈이 끔벅거렸다.

잠들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한다던 아이가 혹여나 소파에서 잠을 청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도통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네 침대에 같이 누워.”

“응? 뭐라고?”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페루딘의 볼이 발그스름했다. 그는 차마 에시엘을 바라보지 못한 채 괜스레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다.

“아니, 굳이…….”

“에이. 얼른 와!”

계속 쫑알거리면서도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 모습에 참다못한 에시엘이 벌떡 일어나 단숨에 페루딘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의 손목을 붙잡곤 침대 근처로 향했다.

“아이, 정말! 아까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면서.”

에시엘은 페루딘의 행동이 영 마땅찮은지 툴툴거리면서도 바삐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부산스레 움직여 또다시 침대 위로 자리를 잡았다. 손목이 붙잡혀 있던 페루딘은 속수무책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결에 침대 위까지 올라오게 된 그는 어딘가 어정쩡한 모양새로 앉아 있었다. 계속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할 것 하나 없는 방을 둘러보기 바빴다.

“뭐 해?”

“어, 어?”

동화책을 펼치던 에시엘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슬며시 물었다. 그러자 페루딘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번엔 이불을 꼼지락거렸다.

“흐음…….”

이러한 모습에 에시엘이 눈을 가늘게 뜨곤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네 침대보다는 작지?”

머지않아 속삭이듯 말을 건넨 에시엘이 찬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페루딘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양 말이다. 이에 페루딘이 그런 에시엘을 흘끔 쳐다보곤 서둘러 답했다.

“마, 맞아! 내가 너 창피할까 봐 얘기 안 한 거야!”

마치 적당한 핑곗거리라도 찾은 듯, 페루딘은 이후에도 이 말 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누가 봐도 눈에 띄게 당황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에시엘은 그저 입술을 앙다문 채 그를 바라봤다.

“나는 괜찮아. 이 방도, 침대도 엄청 맘에 들어!”

“…….”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녀는 오히려 페루딘을 다독여 주듯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안심의 말을 건넸다. 페루딘은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헤헤. 이제 책 읽어 줄게!”

에시엘이 해맑게 웃으며 기어이 그가 엎드려 누울 수 있도록 잡아끌었다.

* * *

똑똑―.

달빛이 처연히 비칠 만큼 밤늦은 시간, 누군가 에시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갈색 머리칼의 그녀는 롬포드가 에시엘에게 붙여 주었던 시종 라비아나로, 손에는 무언가 놓인 쟁반이 들려 있었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방 안쪽에선 출입을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재차 노크해야 할지 말지 고민을 하던 그녀는 결국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 달리 몹시도 고요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빠르게 훑던 라비아나는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에 이내 안도감이 섞인 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조용히 내뱉었다.

“어디 가 버리신 줄 알았네.”

라비아나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금 발걸음을 움직여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들고 왔던 쟁반을 내려놓으려는 것이었다.

쟁반에는 은색 주전자와 더불어 초콜릿 조각이 담긴 작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롬포드가 에시엘에게 매 저녁 제공하라던 초콜릿 우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쟁반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한 라비아나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내 그녀는 또다시 걸음을 옮겨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불을 잘 덮으셔야 하는데…….”

널찍한 침대 위, 에시엘과 페루딘이 엉겨 붙어 누워 있었다. 게다가 읽다 만 동화책은 뒤엎어진 채로 그들의 몸 위에 이불 대신 사이좋게 나눠 덮인 상태였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모습은 절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 살피며 미소를 머금고 있던 라비아나가 머지않아 손을 뻗어 책을 거뒀다.

“어머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순간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책 아래에 감춰져 있던 페루딘의 손이 에시엘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 * *

먼저 산책을 제안한 사람은 라비아나였다. 그녀는 에시엘에게 정원 뒤쪽에 들꽃이 가득 핀 장소가 있다고 귀띔해 줬다. 안 그래도 무료했던 에시엘이 그녀와 함께 정원 뒤뜰로 향하는 중이었다.

“라비아나, 구름 좀 봐 봐!”

신이 난 듯 뛰는 걸음으로 조금 앞서가던 에시엘이 짧고 통통한 손가락을 뻗어 몽실몽실한 구름을 가리켰다. 뭉쳐 있는 모양이 유난히 특이해 폭신폭신한 빵 같았다.

여름 날씨란 본래 대체로 화창하고 따스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하늘이 푸르고 맑았다. 라비아나가 왜 산책을 권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라비아나는 구름을 가리키는 에시엘을 바라보곤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끝에 레이스가 달린 양산을 펼쳤다.

“볕이 뜨거워요. 들어오셔요.”

“에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가만있어?”

에시엘이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뒤를 돌아 라비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곤 양팔을 옆으로 쭉 뻗곤 슬몃 눈까지 감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싱그러운 여름 내음이 금세 에시엘의 콧속에 스며들었다.

“그럼 그늘에 도착할 때까지만요. 네?”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던 라비아나는 도통 햇빛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에시엘의 모습에 더욱 걸음을 재촉해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 양산을 조금 기울여 작은 머리통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으응, 알겠어. 헤헤―.”

이에 에시엘이 라비아나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음 지었다. 머지않아 산뜻한 여름 바람이 그들을 감쌌다.

저택의 뒤뜰은 다소 소박해 정원의 아름다움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잘 관리된 들꽃이 약하게 부는 바람결에 살랑이며 마치 동화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좁게 난 흙길의 양옆으로 들꽃이 수두룩했다. 마치 초록색의 풀밭 사이사이 흰색 물감을 흩뿌린 것만 같았다.

“저기가 좋겠어요.”

에시엘이 경치를 보며 넋 놓고 감탄하는 새에 라비아나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곳의 지척엔 제법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늠름히 서 있었다.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라비아나! 저 나무 내가 끌어안을 수 있을까?”

“하핫, 글쎄요? 얼른 가서 해 보세요.”

라비아나의 대답을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던 에시엘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느티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뒤이어 조심하라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즐거운 것투성이였다. 작게는 이 저택의 제 방만 벗어나도 신나는 것들이 가득했다.

난생처음 배웠던 제과 제빵이며 간혹 즐기는 페루딘과의 놀이. 그 외에도 자신의 방에 자리한 창을 통해 바라보기만 하는 풍경마저도 그저 좋았다. 왕성에서 지낼 적, 평범한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기에 더욱 그러한 것일지도 몰랐다.

단숨에 느티나무 앞까지 당도한 에시엘은 팔을 최대한 뻗어 그것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역시나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칫…….”

그녀는 조금은 시무룩한 얼굴로 가만히 서서 나무를 올려다봤다. 느티나무의 우거진 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이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중, 등 뒤에서 라비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시엘 님, 손 좀 주시겠어요? 이거 끼워 드릴게요!”

어느새 양산을 접어 내려 둔 라비아나의 손에는 다른 게 놓여 있었다. 바로 들꽃을 엮어 만든 꽃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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