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47화 (47/80)

47.

“그, 그럼 다른 거 읽어 줘. 빨리 가져올게!”

엎드려 있던 페루딘은 에시엘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서둘러 방을 나설 채비를 했다. 급한 마음과 달리 날래게 움직여 주지 않는 몸 탓에 허둥대는 몸짓이 어설퍼 보이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에시엘이 제법 예리한 시선으로 그 움직임을 좇았다.

고개를 돌려 창을 통해 본 바깥은 어느새 캄캄해져 있었다. 페루딘이 찾아온 시각이 노을이 지고 있던 무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 긴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이내 풍경에서 시선을 거둔 에시엘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 있으면 잘 시간인걸?”

“뭐?! 정말?”

왜인지 모르게 반가운 기색으로 잽싸게 창밖을 바라본 페루딘은 서둘러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동화책을 가져온다던 말이 무색할 만큼 재빨리 이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엎드리지 않고 모로 누운 자세라는 것이다. 마치 당장 잠이라도 자려는 사람처럼.

“페루딘……? 동화책은?”

“에잇, 몰라!”

의아해진 에시엘의 물음에도 페루딘은 가만 누워 눈만 꼭 감았다. 배꼽 위로 가지런히 올려 둔 채 맞잡은 두 손에서 그의 고집이 엿보이는 듯했다.

사실 페루딘은 동화책의 제목조차도 알고 있지 못했다. 서재에서 자신의 손에 닿았던 아무 책이나 대충 가져왔던 것이었으니까. 그건 단순히 에시엘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던가 본인이 심심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기행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 지난날, 함께 동화책을 읽다 잠든 날의 기억 때문이었다.

선선한 여름밤 날씨와 나긋나긋 들려오던 에시엘의 목소리, 이따금 부딪히던 그녀의 여린 살결은 페루딘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날의 일을 다시 겪을 수 있다면 세 번이든 네 번이든, 동화책을 읽는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페루딘에게 ‘정’은 사전적인 뜻만으로는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때문에 그는 제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였다. 그러하기에 가끔씩 드는 명명하기 어려운 이 기분이 그저 눈앞의 아이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겠거니 하고 넘길 뿐이었다.

“자려고……?”

반면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에시엘은 다소 막무가내인 그의 행동에 놀란 입을 쩍 벌리곤 다물지 못했다.

“네가 잘 시간이라며!”

그는 여전히 가만 누운 채로 입만 벙긋벙긋 움직이며 말했다. 에시엘이 보기에 페루딘은 도통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는 머리맡의 베개까지 끌어와 베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구는 자태였다.

“그렇긴 한데…….”

에시엘이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볼모로 잡혀 왔던 자신과 격의 없이 지내려는 페루딘을 걱정하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입적했다지만 에시엘로선 가문의 차남인 그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기 어려웠다.

살풋 인상을 찌푸린 그녀의 잇새로 고민하는 듯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에 자는 척을 하고 있던 페루딘이 실눈을 뜨곤 그 모습을 몰래 훔쳐봤다.

“내, 내 방에 이불이 없어. 왜냐면 다 빨았거든!”

“…….”

“그래서 시종들이 오늘은 형아랑 자라고 했어.”

“그런데 왜…….”

“으음, 형아는 바쁘니까…….”

에시엘의 물음에 단숨에 답하는 페루딘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기세 좋게 드러눕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형체가 제법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손에 닿는 이불의 촉감이 보드라웠다. 에시엘은 작은 손으로 연신 만지작거리던 이불을 꽉 쥐었다. 금세 주름이 생겨난 이불은 아무리 문질러도 매끄러워지지 않았다.

페루딘이 원래 이런 아이라는 사실을 에시엘은 이미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딘가 모나게 자라난 것이 아이의 뜻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는 그저 제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였을 뿐이리라. 때문에 대뜸 떼를 쓰는 모습이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좋아! 그럼…….”

이불 위를 약하게 팡― 내려친 에시엘이 활기찬 음성을 내뱉었다. 이에 이불 속에 웅크린 형체가 눈에 띄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동화책을 가져와 펼쳐 드는 중이었다.

“잠들 때까지 동화책 읽어 줄게.”

“진짜?!”

순간 날아오른 하얀 이불이 공중에 펄럭였다. 누워 있던 페루딘이 몸을 벌떡 일으킨 탓이었다.

내려앉는 이불 사이로 언뜻 빨간 눈동자를 빛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몹시 기대감에 찬 눈빛이 퍽 귀여웠다.

“응, 페루딘이니까 특별히 해 주는 거야!”

천천히 자리를 잡는 에시엘을 따라 페루딘이 허둥대며 움직였다. 가엾던 기색은 홀연히 사라지고,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개구진 미소가 띄워졌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다시금 두 아이가 꼭 붙어 누워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눈에 선연히 보일 만큼 손바닥 뒤집듯 바뀐 페루딘의 기분에 덩달아 에시엘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서렸다.

이내 그는 꽃받침 하듯 턱을 괴곤 들려올 에시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무더운 여름, 옅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기분 좋은 밤이었다.

* * *

“음―, 흠―, 흐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딘가를 향하는 에시엘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그녀는 옷 끝단에 푸른 하늘색의 프릴이 달린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밀가루가 묻어도 지저분해 보이진 않겠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선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선택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싱긋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어여뻤다.

에시엘은 지금 주방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막 여름 해가 떠올랐을 만큼 이른 새벽이었지만, 요즘 유독 바쁜 도프니에게 제과 제빵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주방에 다녀올 때마다 매번 더러워지던 드레스를 떠올린 그녀는 아예 작정하고 밀가루와 비슷한 색의 옷을 입은 차였다.

에시엘은 점차 아이의 사고방식에 동화되는 듯했다. 이미 오랜 시간 아이로 자라면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삶이 그녀를 더욱 그렇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주방에 도착한 에시엘이 차분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곳을 살폈다. 무척 이른 시간인지라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함이 흘렀다.

‘아직 안 왔나?’

도프니와 약속한 시각보다 먼저 온 모양이었다. 에시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식기구가 가지런히 정돈된 이른 새벽의 주방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마음 한쪽 왜인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곳곳을 구경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조금 빨라진 걸음으로 주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손에 닿는 찬장이며 수납장을 잽싸게 구석구석 헤집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지금의 행동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제법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어디 있지…….”

끝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탓에 진이 빠진 에시엘이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지금 커트러리를 찾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지금의 주방이라면 조금은 수월하게 그것들을 훔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무심코 서랍을 연 순간이었다.

“어, 찾았……!”

털썩―.

무언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방 안쪽에서 다른 이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순간 움직임을 멈춘 에시엘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쭉 빼내고 훔쳐보듯 몰래 살핀 그곳엔 검은 물체가 언뜻 보였다. 중간에 있는 벽 때문에 확실히 알아차릴 순 없었지만 사람의 형체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서랍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을 노리고 온 사람이라면 외부 침입자일지도 몰랐다.

‘도, 도둑인가?!’

에시엘은 몸을 최대한 벽에 가까이한 채 은신하며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후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도프니와의 약속이며 커트러리를 훔쳐야겠다는 일념이며, 이런 사소한 생각 따위는 이미 까마득하게 잊은 지 오래였다. 찰나의 소음이 에시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녀는 이제 숨소리마저 죽인 채 주방 안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였다. 한 차례 심호흡을 내쉰 에시엘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뭐지……?”

그녀가 무의식중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슬며시 바라본 곳에는 열려 있는 냉장고 문에 의해 새어 나온 빛이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주방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냉장고와 그 앞에 크게 자리한 테이블 사이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주의를 기울여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한 형체가 언뜻언뜻 보였다.

이를 발견한 에시엘의 녹옥빛 눈동자가 더욱 총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프라이팬!’

에시엘은 그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도 틈틈이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주변의 사물들을 살폈다. 그러던 중 시야에 들어온 것이 테이블 위의 프라이팬이었다.

그녀가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조심스럽지만 굳게 그러쥐곤 얼굴 가까이 쳐들었다. 혹시라도 갑작스럽게 닥칠지 모르는 침입자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어……?”

이윽고 수상한 인기척 가까이 다다른 에시엘은 점차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불어 놀란 음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지, 집사님……?”

에시엘의 당황한 목소리가 고요한 주방에 퍼졌다. 그러자 쪼그려 앉아 손길을 재촉하던 그의 어수선한 움직임이 멈췄다. 곧이어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