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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48화 (48/80)

48.

냉장고 불빛에 의해 비치는 머리칼이 희끗희끗했다. 지긋한 나이를 짐작게라도 하듯 왜소한 체구와 늘 단정한 모양새를 유지하는 정장 차림. 그 뒷모습은 분명 집사인 렌테였다.

그가 이 시간에 주방엔 무슨 일로 왔을까. 예상과 달리 수상한 침입자는 아니었기에 일단은 다행이었다.

긴장이 풀린 탓에 프라이팬을 세게 쥐고 있던 에시엘의 작은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그것을 다시 테이블 위로 놓는 동안, 등을 내보이던 렌테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에, 에시엘 님……? 이 시간에 여긴 왜…….”

렌테 역시도 자못 당황한 눈치였다. 하나, 그는 잽싸게 제 뒤의 무언가를 티가 나지 않게 감춰 서는 듯했다.

“아! 저는 도프니랑 약속이 있어서요.”

에시엘의 말을 끝으로 주방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적막에 그녀가 괜스레 렌테를 흘긋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평소 렌테와 마주할 일이 극히 드문 만큼 접점 또한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봐 왔던 렌테는 대공 못지않게 냉철하고 차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갑자기 굴러들어 온 자신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으리란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치기 전까지 이곳에서 잘 지내기 위해선 렌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렌테가 롬포드와 가깝게 지내는 집사인 만큼 그의 생각이 대공에게도 영향을 미칠 터였다.

“집사님! 저건 뭐예요?”

생각에 잠겨 힐끔힐끔 눈치만 살피던 중, 문득 에시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빼내곤 렌테가 가려 선 뒤쪽을 보기 위해 기웃거렸다.

“아…….”

이에 어색한 음성을 내뱉은 그가 목을 가다듬으며 반걸음 옆으로 느릿하게 물러났다. 어쩐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으나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옷매무시를 정돈하는 렌테의 손길에서 썩 불안한 느낌이 풍겼다.

그의 뒤편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에 뒤엎어진 무언가와 사방으로 튄 생크림의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짐작게 했다.

“헉.”

그 광경을 본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쩍 벌어지는 입을 서둘러 다물었지만, 놀란 탓에 더욱 커지고 만 동그란 눈은 어쩌지 못했다. 그저 눈을 끔벅거리며 엉망인 바닥과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는 렌테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뭐, 주방을 담당하는 사용인들이 금방 치울 겁니다. 그게 그들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이만 식사를 해야 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태연한 투로 인사를 건넨 그는 순식간에 몸을 돌려 서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 그를 붙잡기라도 하듯 곧바로 에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식사요?”

곧 아침이라고는 하나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조용한 복도 쪽을 바라봤다. 지금은 다른 사용인들마저도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또 저택의 복도에도 어둑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 불을 환히 밝힌 은촛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예. 각하의 일정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치만 아직 시간이…….”

“익숙하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평소 냉철하게만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렌테는 아이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어둠 속에서 언뜻 비친 그의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내 렌테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가, 같이 가요!”

“예?”

“그게…… 도프니 오기 전까진 나도 심심하거든요. 헤헤…….”

다급히 붙잡긴 했으나 제멋대로 내뱉어진 말에 에시엘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자, 통찰하듯 가만히 쳐다보는 렌테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시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순 없었다.

하나,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평소와 다른 모습의 렌테가 저도 모르게 신경 쓰였으니까.

“그리고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하잖아요.”

“…….”

“저는 혼자 밥 먹는 게 싫어서…….”

“…….”

“지, 집사님도 그렇지 않을까 해서요…….”

에시엘은 연신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면서도 제법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혼자 생활하는 것. 왕성에 있을 적에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든 간에 그녀가 밥을 먹든 잠을 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달랐다. 왜인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갖은 신경을 쓰는 듯한 페루딘과 롬포드, 테이시까지 있었다. 그 때문인지 혼자서 밥을 먹을 때면 전과 달리 공허한 기분이 들곤 했다.

타인의 온기에 그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에시엘로선 갑자기 느끼게 된 그러한 기분이 달갑진 않았다.

물론 익숙하다고 말하던 렌테의 모습이 어쩐지 걱정되었던 탓도 있었다. 에시엘은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혼이 난 새끼 강아지 같기도 했다.

“그러시죠.”

긴 침묵 끝에 넌지시 답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의 그는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저, 정말요? 와아! 귀찮게는 안 할게요!”

순식간에 밝은 얼굴이 된 에시엘은 탄성을 내지르며 뒤를 따랐다.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주방을 울렸다.

* * *

그날 오후.

쫄랑쫄랑 어딘가를 향하는 에시엘의 손에는 제법 날렵하지만 날 끝은 뭉툭하게 가공된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무게도 무겁지 않아 장난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 목검은 지난날 테이시와 외출하여 함께 사 온 검이었다. 그리고 에시엘은 지금 그날 이후 연락이 없는 테이시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진즉에 찾아간 연무장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설마 약속을 잊은 건가?’

그날 일을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여긴다거나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가득 들어찬 불안한 마음 한편에선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에시엘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저택 외부로 걸음을 옮겼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 조금은 무모했다. 이곳 생활이 익숙해진 탓도 있겠으나 그녀의 사고방식이 다분히 충동적인 여느 아이들처럼 거침없어졌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저택의 웅장한 정원마저 벗어나 수풀이 가득한 곳에 다다랐을 때, 바람을 가르는 날렵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금 지친 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에시엘은 손에 든 목검을 더욱 꽉 쥐었다.

그녀는 서두르면서도 차분한 걸음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했다. 나무가 무성히 들어찬 곳 가운데 테이시가 있었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온 정신을 몰두한 채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에시엘의 인기척 따윈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안녕!”

유려한 검의 움직임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손을 방방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주의를 기울이던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순간 수차례 베어 낸 흔적이 남은 나무 기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테이시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곧이어 날카롭게 검을 내리꽂던 팔이 방향을 잃고 살짝 흐트러졌다.

“진짜 여기 있었잖아.”

물론 에시엘은 이렇게 미세한 차이까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서서히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에시엘이 놀란 토끼 눈이 되고 만다.

“테이시!”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옷을 뚫고 새어 나온 검붉은 핏방울이 투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 * *

테이시는 요즘따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평소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을 보내며 지난날과 다를 바 없는 날들이 지나가는 듯했으나 때때로는 저 자신이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장차 가문을 이어받게 될 본인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테이시는 매사 빈틈을 보이지 않은 채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완벽해지려 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방법으로 검술을 택한 그였다.

실력의 정도를 따지자면 뛰어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테이시는 10세의 나이에 이미 성인을 능가하는 역량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누구보다도 검술에 목을 매는 그가 실수를 범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테이시는 요즘 들어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연무장에 있을 때면, 이따금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와 발랄한 움직임을 빼닮은 빨빨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와 머릿속을 흐트러트리는 탓이었다.

끝내 테이시는 자꾸만 눈앞에 선연히 그려지는 붉은 머리칼을 한 아이의 잔상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애써 지워 냈다. 소용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눈앞에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훈련용 짚 인형이 보였다.

뜻하지 않게 아이를 피해 다니다가 오늘은 연무장이 아닌 정원 너머 수풀을 향한 참이었다. 온전히 훈련에 집중하기 위함이었겠으나, 테이시의 그러한 상념을 헤치듯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현실에서 선명히 듣게 된 공상 속 목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윽.”

테이시가 다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흙바닥 위로 나뒹구는 날카로운 검의 날 끝에 묻어난 새빨간 혈흔이 소름 끼칠 만큼 붉었다.

“테, 테이시?”

갑작스레 주저앉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테이시를 본 에시엘은 화들짝 놀랐다. 망설일 새 없이 그의 앞까지 뛰어간 그녀는 땅을 더욱 꺼멓게 물들인 피의 흔적에 멈칫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에게 생겨난 상처가 단순한 찰과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윽.”

순간 테이시가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으며 더 세게 상처를 부여잡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핏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깊게 베인 탓에 피부가 벌어진 듯했다. 말간 피부 위로 흐르는 새빨간 피가 몹시 이질적이었다.

“괘, 괜찮아? 상처가 너무…….”

말을 끝맺지 못한 에시엘이 주춤거리다가 테이시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놀란 그녀의 눈망울이 크게 뜨인 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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