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56화 (56/80)

56.

초저녁의 포근한 여름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약한 바람에 일렁이며 발목을 간지럽히는 풀들이 꽤 날카롭게 느껴졌다. 혹여나 여린 살결에 붉은 생채기를 남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걸음을 옮길 순 없었다. 둘 사이엔 어쩌면 처음인 듯한 적막이 흘렀다.

에시엘은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아니라고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도 그저 어버버거리게 될 뿐이었다.

“저택에 소문이 좍 퍼졌어.”

페루딘의 새빨간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향했다. 감정을 읽을 수 없어 매섭게 느껴지는 눈빛에 그녀는 괜스레 침을 꼴깍 삼켰다. 또 다른 곤란한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으응. 마, 맞아.”

진실을 토로하고만 에시엘은 끝내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저도 모르게 기가 죽어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렇구나…….”

하나 들려오는 덤덤한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평소 같지 않은 페루딘은 행동을 더욱 예측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마주하는 그의 모습에 목구멍이 막힌 듯, 그리 어렵지 않은 말 한 마디도 쉽사리 내뱉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에시엘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가 흙바닥을 발길질하자 풀들이 살랑이고 옅은 모래바람이 일었다. 아이의 행동엔 왜인지 모르게 씁쓸한 기색이 비쳤다.

“왜에……?”

결국 눈치를 살피던 에시엘이 힘겹게 입을 뗐다. 그는 금방이라도 장난기가 밴 얼굴을 한 채 자신에게 놀아 달라 떼를 쓸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탓에 노란 머리칼에 가려진 그의 낯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수차례 힘없이 발길질을 하는 움직임은 어딘가 가긍하게 느껴졌다.

일순간 장난기가 사라진 모습도, 여느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듯한 모습도 모두 페루딘이 맞았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파악할 수 없는 탓에 에시엘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설마 하니 숨기고 있던 사실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하는 심증만 가질 뿐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겠네…….”

“그, 그런가?”

아리송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한 에시엘이 슬그머니 페루딘의 표정을 엿보려 목을 쭉 뺐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그에게서 쓸쓸함이 풍기는 듯도 했다. 더군다나 평소였다면 심통을 부릴 법한 상황인 데도 그저 그런 답으로 대충 흘려 넘기는 태도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에시엘은 페루딘을 유심히 살피며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마땅한 위로를 떠올리지 못한 그녀가 결국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력이라는 거 엄청난 능력이잖아.”

“…….”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유독 작은 소리로 새어 나온 말은 끝맺어지지 못한 채 사라졌다. 완전히 기운이 빠진 듯한 그의 머리통이 더욱더 푹 가라앉았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그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아이는 아버지가 제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무능력함이 원인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추측인 줄도 모르고.

‘아니라는 걸 알려 줘야 해.’

페루딘을 보던 에시엘의 마음 한구석이 찌릿찌릿 저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치아에 더욱 힘을 실으며 저릿함을 덮어 내려 애를 썼다.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느끼는 아이의 모습이 예전 본인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제 자식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 칭하며 인간 취급도 해 주지 않던 그들에게 학대당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괴롭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에시엘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가 정말로 쓸모없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고로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평등한 법이었으니까.

게다가 소설 속의 롬포드나 직접 마주한 롬포드로 미루어 봤을 때, 그는 아이의 생각과 같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비단 자신을 여태껏 살려 뒀다는 점에만 기반을 둔 생각은 아니었다. 롬포드가 무정하긴 하나 제 부모였던 그들처럼 자식을 내칠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렇기에 페루딘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다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페루딘에게 마땅한 근거를 들이밀지 않으면 그는 언젠가 또 신력을 가진 자신을 보며 슬픔에 잠길지도 몰랐다. 때문에 현재로선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에이, 무슨 소리야. 너 엄청 잘하잖아!”

누군가 들으면 오버하지 말라며 뜯어말릴 정도로 과장된 억양이었다. 하지만 이에 반응을 보인 페루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그의 눈꼬리가 서글픈 듯 처져 있어 에시엘의 마음이 또다시 찌릿했다.

“잘해? 뭘……?”

“나랑 놀아 주는 거!”

에시엘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양팔을 위아래로 휘젓는 건 덤이었다. 전부 그의 기분을 환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더욱이 페루딘이 지금 당장 놀이를 시작하자고 해도 응할 의향도 있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어어? 안 돼! 나는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단 말이야.”

짐짓 엄포를 놓는 투에 페루딘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다가도 금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어쩐지 방법이 조금씩 통하는 것도 같았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조금은 수그러든 목소리로 툴툴거리던 그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에시엘에게 휘말리지 않기 위해 보이는 행동이 그답지 않게 소심했다.

시야 아래에 보이는 페루딘의 노란 머리칼이 석양에 물들어 오묘한 빛을 띠었다. 동그란 머리통은 오늘따라 유독 작게 느껴졌다.

곧이어 그는 어디선가 주워 든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미약한 움직임을 따라 머리칼이 살살 살랑였다.

“그럼…….”

이내 그의 기분이 한층 나아진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에시엘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리고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에시엘은 단숨에 그곳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작은 손으로 무언가를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꼬물대며 몰두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제법 신중해 보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이따금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페루딘이 에시엘을 흘금거렸다. 격렬한 태양 빛을 받은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윤기가 돌며, 마치 동화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이를 보는 페루딘의 얼굴에도 열기가 전해진 듯 볼이 달아올라 조금 발그레해졌다.

“됐다……!”

손에 쥔 무언가를 바라보는 에시엘의 푸르른 눈동자가 성취감에 가득 차 또다시 빛을 냈다. 이윽고 ‘끙차’ 하는 힘찬 신음과 함께 에시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돌며 페루딘을 마주한 그녀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완연했다.

당찬 걸음으로 걸어가 다시금 그의 앞에 선 에시엘이 손바닥 위의 무언가를 건넸다.

“자!”

마치 진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들꽃의 가운데 자리한 노오란 꽃술을 하늘하늘한 꽃잎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꽃송이 아래 줄기를 조심히 양 갈래로 나눠 링처럼 묶어서 만들어 낸 것은 바로 꽃반지였다.

예전 라비아나와 들판을 향했던 날 이후, 에시엘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꽃반지 만드는 법을 익혀 두었다. 그랬지만 그녀도 그것을 잊기 전에 실천해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뭐, 뭐야?”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페루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코앞에 들이밀어진 꽃반지를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며 바라봤다. 흡사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기색이었다.

“행운의 반지!”

“……네가 만든 거잖아?”

“내가 만들었으니까 행운의 반지인데?”

에시엘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해맑게 말했다. 순수함이 깃든 그녀의 말간 얼굴이 저 너머 하늘의 불그스름한 노을처럼 어여뻤다. 순간 페루딘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에시엘의 시선 또한 페루딘을 따라 움직였다. 조금 올려다보게 된 페루딘은 계속해서 부동자세만 취하며 그녀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그녀가 재촉하듯 꽃반지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못 해도 괜찮아.”

“…….”

“실수하고 사고를 친다 해도……. 그렇다 해도 대공님은 널 좋아하실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물쭈물하던 페루딘이 조심스럽게 반항하듯 투덜거렸다. 하지만 에시엘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제가 해 준 얘기는 아마도 그가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에 놀라기는커녕 의연한 태도를 보인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나는 신력을 갖고 있어도 잘 다루지 못하는걸?”

“그, 그래도…….”

“대공님은 네가 있어서 큰 힘이 될 거야. 진짜로!”

“진짜로……?”

페루딘이 확신 없는 투로 에시엘의 말을 되뇌었다. 머지않아 그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페루딘은 가만 생각을 하듯 여전히 자신에게 향하는 그녀의 작은 손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붉은 눈동자가 수심에 잠긴 듯 어두운 빛을 냈다.

그의 기분을 살피던 에시엘은 종지부를 찍듯 화제를 돌리며 또 다른 대화 주제를 꺼냈다.

“에잇, 내 팔 빠지겠다. 얼른 끼워 줄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페루딘의 손을 덥석 잡아 올린 그녀가 약지에 꽃반지를 천천히 끼워 넣었다. 조심스레 묶었던 매듭이 행여나 풀릴세라 온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페루딘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 꽃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끼워졌고, 에시엘의 입꼬리가 서서히 기분 좋은 미소를 만들었다. 반지는 조금 헐겁긴 하나 그런대로 잘 맞았다.

“와……. 나중에는 네가 만들어 줘. 꽃 두 개로 엮어서!”

“으응, 알겠어.”

자신의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를 보며 고분고분 답하는 페루딘의 새빨간 눈동자가 일렁였다. 난생처음 받는 반지며 타인의 진실된 위로는 퍽 어색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페루딘은 꽃반지를 보며 마음속에 다짐을 새겼다. 이 아이에게 기필코 멋진 반지를 끼워 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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