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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57화 (57/80)

57.

“어디 갔다 오십니까?”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던 에시엘을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높은 듯하면서도 낮은음의 목소리는 중후한 분위기를 한껏 풍겼다. 이에 급정거하듯 다급히 발을 멈춰 선 그녀의 눈이 잔뜩 동그래졌다.

흡사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뒤를 돌아본 에시엘이 마주한 이는 집사 렌테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 내쉬며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공을 마주하지 않은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그가 선물한 액자가 제 능력을 발휘하는지도 몰랐다.

“아, 그게요…….”

서두를 꺼내던 에시엘은 순간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이는 대공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비서였다. 괜한 말을 허투루 꺼내는 것은 좋지 않을 터였다. 더욱이 지금은 밤늦은 시간인 만큼 이곳저곳을 쏘다녔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에시엘이 침을 꼴깍 삼켰다.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는 렌테의 눈빛이 예리한 뱀과 같이 느껴졌다. 이내 시선을 피한 그녀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찰나 평범한 핑곗거리라도 떠올리려는 듯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다시 마주친 렌테의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화를 이으려 했으나 이내 들려오는 렌테의 말은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한참 기다렸습니다.”

“저, 저를요?”

“예. 가시죠.”

“어디를요?”

에시엘의 궁금증 가득한 물음에도 그의 입술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토 달 수 없었다. 그녀를 압박하듯 보내오는 무언의 시선이 렌테의 말을 그저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녀를 이끌기 위해 앞서가는 렌테는 남자치곤 작은 체구임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을 풍겼다. 그러한 분위기는 흡사 롬포드와 닮아 있었기에, 그녀로선 당연하게도 대공을 떠올리게 되었다.

‘설마…….’

그런데 렌테의 뒤를 따라 걷는 복도의 풍경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문득 기시감을 느꼈을 땐 이미 어느 문 앞에 당도한 후였다.

그는 능숙한 몸짓으로 두어 번 노크를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어색하게 서 있는 에시엘에게 말을 건넸다.

“들어가시죠.”

“네에.”

그녀는 멋쩍은 대답과 함께 쭈뼛대며 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이내 렌테가 문을 열어 주자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시야에 보인 것은 커다란 침대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길게 자리한 통창을 가린 검은색의 커튼이 일말의 빛마저 모두 흡수하는 듯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옮기는 에시엘의 시선이 끝내 방 가운데로 옮겨 갔다.

“아, 안녕하세요.”

“왔군.”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에게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인사를 건넨 상대는 롬포드였다. 한결 누그러졌던 행동은 그를 인지하자 또다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반면 턱을 괸 채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몸짓에선 여유로움이 흘러넘쳤다.

그사이 렌테는 롬포드의 뒤편으로 가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롬포드와 마주쳤던 시선을 간신히 거둔 에시엘의 눈길이 자연스레 테이블로 향했다.

“와…….”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테이블을 채울 만큼 가득 놓인 음식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양껏 풍기고 있었다.

가니시를 곁들인 스테이크와 칠면조 바비큐구이, 찜으로 요리된 생선과 새우, 오일 파스타와 신선한 초록 잎채소에 상큼한 유자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까지. 그야말로 육해공의 식재료를 총집합한 진수성찬이었다. 그것들의 가짓수만 해도 열 손가락은 족히 넘길 듯했다.

이토록 성대한 만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으나, 에시엘은 그 순간 음식을 발견하지도 못할 만큼 긴장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인식하자 방 안에 퍼진 음식 냄새는 밤늦도록 허기진 그녀의 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음에 드나.”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찬찬히 훑어보느라 긴장의 끈이 풀리려던 때에 롬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낮은음의 평이한 투였다.

마치 허상에서 빠져나오듯 다급히 돌아보자 그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거두곤 무릎 위에 얹었다. 고개가 살짝 갸울어진 모습이 어딘가 심드렁해 보이기도 했다.

“네……?”

“일단 앉는 게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렌테가 한 발 걸어 나와 의자를 빼 주었다. 쿠션이 폭신할 것 같은 새하얀 의자의 가장자리는 금테로 둘러싸여 있어 무척 고급스러움을 자아냈지만, 어쩐지 이 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머지않아 걸음을 옮긴 에시엘이 조심스럽게 그곳에 앉았다. 생각보다 편안한 의자에 긴장감이 사그라지는 듯도 했다. 그녀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 다리를 눈에 띄지 않게 앞뒤로 살살 움직였다.

“듣자 하니, 혼자 밥 먹기 싫다며 불평을 했다지?”

“헉, 그걸 어떻게…….”

“오늘부터 매 끼니는 나와 같이 먹는다.”

에시엘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결론짓듯 선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함에 눈만 끔벅이며 바라본 롬포드는 꽤 만족스러운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였다.

“매, 매 끼니를요?”

“그래. 아니면 계속 혼자 먹을 건가.”

그녀에겐 제법 극단적인 선택지였기에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문득 눈앞의 음식들이 환영처럼 느껴지는 순간, 지난날 렌테와 대화를 나눴던 새벽녘의 주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날 주방을 떠나던 렌테는 평소와 다른 듯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날 이후 아이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서, 자신을 생각해 주던 마음을 헤아려 제 주인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고자 했을지도 몰랐다.

어떠한 이유건 렌테의 귀띔을 수용한 롬포드 역시도 자신을 마냥 나쁘게 만은 보지 않는듯했다. 음식을 잔뜩 먹여서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에시엘이 테이블에 고정했던 시선을 돌려 힐끔힐끔 롬포드를 훔쳐봤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기대앉은 그에게선 늘 그렇듯 냉혹한 분위기가 풍겼다. 하지만 무릎 위에서 피아노를 치듯 까딱이는 손가락에서만큼은 불안감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뭐, 상관없나.”

이내 들려온 롬포드의 어투는 다소 딱딱했다. 뒤이어 아무렇지 않게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든 그가 스테이크 한 조각을 썰어 에시엘의 앞접시에 놓았다. 핏물이 배어 나오는 약간 큰 조각의 고깃덩이가 그녀의 접시에 툭하니 놓였다.

‘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시엘이 천천히 포크를 쥐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소왕국의 사용인이며 심지어는 제 부모도 해 준 적 없던 행동을 그가 보이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 극악무도하다는 소문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그러한 성격인 롬포드였다. 그렇기에 그가 베푸는 친절은 더욱 남다르게 느껴졌으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어렵기도 했다.

“대공님도 드세요!”

“얼른 먹지.”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에시엘은 포크로 새우 두 마리를 빠르게 찍어 롬포드의 접시에 놓았다. 그리고 순수한 아이처럼 배시시 미소 지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쩐지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이내 고기를 씹는 그녀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이를 본 롬포드는 그제야 자신도 새우를 입에 넣었다.

음식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맛이 좋았다. 에시엘은 어느새 롬포드도 잊은 채 열심히 식사하는 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이미 포크를 내려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 대공님?”

“그래.”

“왜 안 드세요……?”

멋쩍어진 에시엘이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이미 마구 헤집어져 있거나 듬성듬성 빈 곳이 보였다. 롬포드의 접시에 새우 한 마리만 덩그러니 놓인 모습을 보아하니 그것들에는 전부 그녀의 손길만이 닿은 듯했다.

“배가 부르군.”

“네에?!”

에시엘은 자신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평소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은 롬포드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따금 렌테가 챙겨 주는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풍기는 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젓곤 했다.

그렇기에 그의 집사로선 이런 상황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주방장에게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라 하고 그 앞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하기만 했다. 급기야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순진무구한 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일었다.

“해산물을 유독 좋아하나.”

에시엘의 놀란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롬포드의 물음이 들려왔다. 뜬금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녀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훑어봤다.

그중 유독 살점이 없는 흰살생선찜은 굵은 가시가 드러날 정도로 파먹은 흔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그것을 보고 말한 듯했다. 이에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든 그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하하……. 주방장님의 음식은 다 맛있어요!”

“전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은 롬포드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일말의 어둠이 드리운 그의 붉은 눈동자는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꼭 대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럼요! 다 잘 먹…….”

“렌테.”

에시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롬포드가 집사를 호명했다. 동시에 말을 멈춘 그녀는 그들을 살피며 동그란 눈을 그저 끔벅거릴 뿐이었다.

“내일 아침은 전복 수프로 하지.”

“예. 알겠습니다.”

“특히 아이의 것에 듬뿍 썰어 넣도록 해.”

말을 마친 롬포드가 또다시 에시엘을 응시했다. 만족스러운 듯 형형한 눈동자가 더욱 밝게 빛났다.

그들을 관전하던 에시엘은 갑작스러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일 아침 식사도 롬포드와 함께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마음 한쪽에 약간의 불안감이 들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보다 더 큰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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