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럼 3시에 또 올게!”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 에시엘이 테이시를 뒤로한 채 문을 닫았다. 이내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완연했다.
3시는 그들이 약속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각이었다. 그녀 멋대로 무작정 기약한 것이었으나 테이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지 잘 따라 주는 편이었다. 항상 말끔히 비워지는 접시로 그의 뜻을 방증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또다시 찾아온 그 시각, 에시엘의 기분은 유난히 들떠 있었다.
“다음에 먹고 싶은 거 있어?”
“……레몬이 들어가면 좋겠는데.”
접시가 비워질 즈음이면 매번 물었던 질문이나 어쩐지 그날은 심드렁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또 대충 넘길 거란 예상과 달리 테이시는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어느새 열 손가락을 모두 접고도 부족할 만큼 수차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날만큼은 이례적인 답변을 한 그였다. 그렇기에 에시엘에겐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을지도 몰랐다.
주방에 미리 부탁해서 받아 온 오늘의 주전부리는 테이시의 바람을 곁들인 레몬 파운드케이크였다. 새콤달콤한 레몬 아이싱을 뿌리고 허브 잎과 말린 레몬 슬라이스를 얹은 그것은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아, 군침 도는 냄새!”
숨을 한껏 들이쉬자 콧속으로 상큼한 레몬 향이 스며들어 왔다. 에시엘은 내쉬는 숨과 함께 참지 못한 작은 탄성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만남을 약속한 서재에 가까워질수록 거듭되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머릿속으론 테이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여태껏 본 적 없던 미소로 고맙다며 마음을 전할지, 함께 먹으며 또 다른 군것질거리를 이야기할지 궁금했다. 이도 아니면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으로 힐긋 쳐다보고 말 수도 있었다. 에시엘은 상상을 할수록 그의 반응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가 그릇을 휙 뺏어 들었다.
“어어……!”
갑자기 나타난 그자는 에시엘을 단숨에 앞질러 가로막아 선 듯했다. 그러곤 재빠른 걸음만큼이나 날렵한 손길로 접시를 낚아챘다. 그녀로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중이었으니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에시엘은 누군가에 의해 멀어지는 그릇을 놀란 눈으로 망연히 쳐다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했다.
“케이크?”
접시를 응시하던 그녀가 천천히 위로 시선을 올렸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붉은 눈, 그의 성격만큼이나 날카로운 턱선. 그 누군가는 그녀 역시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롬포드 대공은 눈을 내리깐 채 케이크를 바라봤다.
“대, 대공님……?”
“주방장 솜씨군.”
조용조용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이 복도에 내려앉았다. 한껏 상큼한 향이 풍겨 오는 케이크 위에 무심한 듯 세심하게 얹어진 레몬 슬라이스만 보아도 만든 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곧이어 그것을 가만 보고 있던 롬포드가 시선을 그녀에게로 스윽 옮겼다.
“어딜 가는 거지?”
이내 냉철한 목소리가 에시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롬포드의 예리해진 눈빛이 낌새를 파악하려는 듯 그녀를 훑어 내렸다.
당황스러움에 벙찐 얼굴을 한 에시엘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망울로 작은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하는 아이는 처음 만나던 날과 여전히 다른 바 없었다.
영락없이 겁을 먹은 모습의 아이는 어느새 조금 자란 듯 롬포드의 허벅지를 웃도는 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겐 아직 한없이 작게만 느껴질 터였다.
“네가 먹으려던 건가?”
“그, 그게요…….”
에시엘은 차마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는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인 오늘 아침만 해도 마주 앉아 식사를 하긴 했으나 그녀의 머릿속 그는 여전히 무서운 사람으로 자리 잡힌 탓이었다.
그러하니 에시엘로선 테이시와 함께 먹으려던 것이라는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불안한 눈동자만 이리저리 옮기던 찰나,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롬포드의 태도가 언젠가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때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인상을 구기며 오싹한 목소리를 뱉어야 하거늘, 그는 저를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응답이라도 기다리는 듯이.
“어어?!”
그러던 순간 에시엘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케이크가 담긴 그릇을 들고 있던 롬포드가 이내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대공님! 어디 가세요?”
그 뒤를 황급히 따라붙은 그녀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쭉 빼내며 케이크의 안위를 걱정하는 큰 눈망울엔 조마조마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표출한 것일지도 모르는 테이시의 마음이었다. 그렇기에 온전하지 못한 케이크 일부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다행히 얼핏 보이는 멀쩡한 모양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롬포드가 말했다.
“나랑 먹지.”
“가, 같이요?”
“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따라오도록 해.”
들려오는 롬포드의 말은 무심한 투였으나 온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평소보다 걸음 속도를 늦추기라도 한 듯, 에시엘이 서두르지 않아도 그와 발걸음을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어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자주 느끼던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마냥 쉽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여전히 속을 헤아리기 힘든 그라면 언제든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내쫓을지도 몰랐다. 아니, 오히려 그쯤에서 그치면 다행일 터였다.
에시엘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힐끔거리며 롬포드를 훔쳐보는 새에 그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빠르게 행동을 숨긴 에시엘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먹고 싶었던 거 아닌가.”
단숨에 문을 열고 들어간 롬포드가 테이블에 접시를 두곤 자리를 잡으며 넌지시 말했다. 문가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향한 물음이었다.
“아……. 네, 네! 그럼요!”
당황한 나머지 얼버무리듯 답한 에시엘이 롬포드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먹음직스러운 레몬 파운드케이크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테이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을 테이시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눈앞에 닥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대공의 기분을 살폈다.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들지.”
현실을 깨우치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롬포드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포크를 가리켰다. 이내 시선을 옮긴 그곳엔 제법 가지런히 놓인 포크가 있었다.
“……하핫.”
그것을 보며 상황 파악을 하듯 두어 번 눈을 깜빡인 그녀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피어났다. 자신의 앞에 차분히 놓인 포크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통 무슨 심산인지는 모르겠으나 끼니마다 같이 밥을 먹어 주는 것이며 식기를 놓아 주는 것 등등, 종종 보이는 사소한 행동에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함이 느껴지곤 했다. 어쩌면 이처럼 미미한 일들에 그의 숨겨 둔 진심이 배어 나온 탓인지도 몰랐다.
미소를 서서히 거둔 에시엘이 포크를 이용해 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조각냈다. 그중 한 덩이를 포크로 푹 찍은 그녀가 롬포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제가 먹으려는 생각은 아닌 듯했다.
“대공님, 같이 먹어요!”
롬포드를 바라보던 아이는 고른 치열이 훤히 보일 만큼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포크를 그에게 내밀었다. 정확히는 포크에 찍혀 있는 파운드케이크를 건네려는 의도였다.
덩달아 미소 짓게 되는 무척이나 해맑은 웃음에도 그는 표정 변화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찌푸린 것처럼 느껴지는 인상에 불현듯 조바심이 난 그녀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머릿속엔 여전히 그가 한순간에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이, 안 되겠어.’
그리고 그 생각에 확신이 생기려던 찰나, 롬포드가 빠르게 포크를 낚아챘다. 곧이어 그는 떨어질 듯 말 듯 위태하게 찍혀 있던 케이크 조각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때요? 맛있죠?”
씹어 삼키는 움직임이 멈추는 것을 확인한 에시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그녀의 눈이 유달리 반짝였다.
“…….”
“여, 역시 별로이신가…….”
신이 난 에시엘이 잽싸게 질문하였으나 롬포드에게선 답이 없었다. 또다시 살짝 찌푸린 듯 느껴지는 인상이 그의 답을 대신하는지도 몰랐기에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끝내 풀이 죽은 에시엘은 일부분이 사라진 파운드케이크를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대로 괜찮군.”
“정말요?!”
곧장 들려온 괜찮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살그머니 구겨진 듯한 롬포드의 낯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시엘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배려하는 대답을 했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에 기운차게 반색했던 그녀도 얼마 못 가 재차 고개를 수그렸다.
“안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에이, 억지로 먹지 마세요!”
에시엘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손사래를 쳤다. 함께 먹자던 말에 조금 기대를 하긴 했으나 괜한 부담감을 주고 싶진 않았다. 눈앞의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롬포드 대공이었으니까.
곧 그녀가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 포크를 움직였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조각을 한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포크도 케이크를 향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잇따라 쉼 없는 포크질이 계속되었다. 머지않아 접시에 남겨진 소량의 케이크는 에시엘의 몫인 듯했다.
“이래도 안 좋아하는 거 같나?”
“어, 어…….”
에시엘은 손에 쥔 포크를 움직이지도 내려놓지도 못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케이크와 롬포드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같이 먹을 사람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도록.”
이내 포크를 내려놓은 롬포드의 붉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케이크의 상큼함이 스며들기라도 한 듯 냉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의 인상에서 분명 케이크를 싫어하는 기색이 보였으나 거침없이 먹어 치운 이유를 에시엘로선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것들을 물을 수 없는 그녀는 그저 얼떨떨하게 인사를 전할 뿐이었다.
“네에. 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