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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64화 (64/80)

64.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어딘가. 작은 아이가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작은 창조차 자리하지 않는 그곳에선 진득한 어둠이 공간을 압도했다.

어둠 속에서 그나마 두렷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검붉은색 머리칼이 바닥에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굽이치는 물결처럼 곱슬한 머리칼 군데군데 흙모래가 뒤섞인 채였다.

자그만 형체는 손발이 묶여 눈과 입마저도 제압당해 있었다. 결박된 채 쥐 죽은 듯 미동이 없는 모습에 사뭇 잔혹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그만 형체에선 다른 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미약한 숨소리만 나지막이 새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쓰러져 있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까마득한 어둠은 시간의 원만한 흐름마저 방해하는 듯했다.

이윽고 작은 인영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보였다. 손가락이 움찔하던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 머지않아 손과 발을 발버둥 쳤으나, 하등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결국 움직임을 멈춘 에시엘이 가만 생각에 잠겼다. 이와 동시에 밧줄에 쓸린 살갗에서 쓰라린 아픔이 느껴졌다. 현실임을 자각하게 하듯 생생한 자극은 시야가 가려진 탓에 더욱 신경이 집중됐다.

순간, 몹시도 고요한 적막의 서늘함과 볼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잠자코 손 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

에시엘은 다시금 더욱 세차게 움직이며 버둥거렸다. 조용한 그곳에 그녀의 몸부림치는 소음만 잔잔하게 울렸다.

‘제발, 제발……!’

혹여 밧줄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더 마찰이 일어나는 손목에선 쓰라린 고통과 함께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아리다 못해 얼얼해지는 감각은 일말의 희망마저도 짓뭉개 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끝내 밀려드는 망연자실한 맘에 포기하려던 찰나였다.

‘어어? 이, 이거…….’

마치 매듭이 느슨해지기라도 한 듯 손목의 움직임이 제법 여유로웠다. 에시엘은 한편으론 당황하면서도 다시 희망을 붙잡듯 몸부림에 몰두했다.

시야가 가려진 탓에 온 촉각이 곤두세워져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손목의 밧줄 매듭은 헐거워지고 있었다.

몸을 버둥버둥하던 에시엘이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손목에 닿아 있던 까슬한 밧줄이 스르륵 미끄러지는 촉감이 느껴졌다.

‘됐다!’

에시엘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단숨에 눈을 가리고 있는 천부터 벗어 던졌다. 그리고 곧장 입술 위로 덧붙여진 테이프로 향하던 그녀의 손길이 일순 멈칫했다.

분명 시야를 가리던 천을 제거했음에도 눈앞엔 어둠이 그득했다. 에시엘은 괜스레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마차에서의 긴박했던 순간이 떠오른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곳은 끝없는 고요함에 괴괴한 분위기만 흘렀다. 에시엘 이외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암흑 속으로 잠식되는 기분을 느꼈다.

에시엘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멈췄던 손을 다시금 움직였다. 그리고 입 위에 붙여진 테이프를 거침없이 뜯어냈다.

테이프가 사라진 자리에선 알알한 따가움이 느껴졌으나 아픔을 느낄 새는 없었다. 뒤이어 손을 더듬거리며 발목 부근에 묶인 매듭마저 모두 풀어냈다.

“왜 나를 납치한 거지…….”

에시엘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득한 어둠에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냥 넋 놓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이 손쉽게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약간의 가늠도 할 수 없는 이 어둠 속만 벗어난다면.

에시엘은 심호흡을 하며 두려움을 억눌렀다. 수차례 눈을 깜빡여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생각보다 진한 어둠은 적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몸 이곳저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괴한들의 거침없는 행동 탓에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듯했다.

조금씩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보호하듯 수평으로 뻗은 팔이 잘게 떨려 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이곳에 갇혀 있다는 상황을 떠올리면 더욱 겁이 났기에 멈출 수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에시엘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속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움직였다. 얼마나 더 향해야 벽에 닿을지, 어떤 물체가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지, 혹여나 낭떠러지가 있지는 않을지 등. 불안함에서 초래된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찰나 그녀의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긴장을 풀지 않으며 조심스레 더듬자 거친 표면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벽에 닿은 듯했다.

“좋아, 이대로 가자.”

에시엘은 벽을 짚어 가며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아주 조금이나마 이곳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보이자 조심스러워 느릿하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옷소매 위로 차갑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뻗어 그것의 정체를 탐색했다.

“……문이잖아?”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은 에시엘의 정신이 한층 또렷해졌다. 매끄러운 쇠막대와 그것이 붙어 거칠게 가공된 나무의 질감으로 미루어, 옷소매에 닿았던 것은 문손잡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어떠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생겨나는 그녀의 심장이 더욱 가쁘게 뛰었다. 이 문을 열고 나간 후 벌어질 일은 둘째 문제였다. 어쨌거나 자신을 여태 살려 둔 것을 보면, 이곳을 빠져나가 누군가를 마주치더라도 죽이지는 않으리란 작은 확신이 있었다.

이내 그녀가 서늘한 감촉의 문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실어 문을 힘껏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에시엘이 손잡이를 부여잡곤 수차례 뒤흔들었다.

“사…… 살려 주세요!”

떨리는 에시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조그만 주먹이 거친 나무 문을 연신 두들겼다. 둔탁한 소음이 그녀의 외침과 함께 곳곳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문 너머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제풀에 지친 그녀가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그곳에는 또다시 어둠이 몰려왔다.

“어떡해……. 이제 나는…….”

에시엘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별반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어둠이 머릿속에 밀려왔다.

지금으로선 꼼짝없이 갇힌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누군가가 자신을 찾으러 올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체념하려는 찰나 비로소 아픔이 느껴졌다.

고통의 근원지는 힘없이 늘어트렸던 손이었다. 아무래도 문을 두들기던 중 나무 가시가 손에 박힌 모양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손에선 전보다 더욱 선명한 통증이 느껴져 욱신거렸다.

하지만 에시엘은 상처를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저 절망적인 상황을, 그 작은 몸으로 온전히 견뎌 내고 있었다.

* * *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황제가 테이블 위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호화스러운 금테가 둘린 데다 화려한 꽃무늬 장식이 가득한 찻잔에는 붉은 빛깔의 홍차가 담겨 있었다.

황제는 찻잔을 코 가까이 들이대곤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며 홍차의 향을 음미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제법 품위를 갖춘 행동은 여느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다.

똑똑―.

“오셨습니다.”

안내 말을 끝으로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모습을 보인 이는 바로 롬포드 대공이었다. 그를 마주한 황제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곤 꼬았던 다리를 풀며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왔는가.”

“예.”

반면 롬포드는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낯빛에 평소보다 더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이와 더불어 황제에게 존경을 표하는 인사마저 생략한 이유가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대공. 내 초대가 반갑지 않은 듯하여 서운하군.”

“왜 부르셨습니까.”

여전히 문가에 선 채 용건을 묻는 롬포드의 얼굴이 한없이 냉랭했다. 평소라면 황제의 호출에 사사로운 개인감정은 배제한 채 그러려니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자제력 따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아이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납치됐건 제 발로 도망갔건 자신의 허락 없이는 전부 용납할 수 없었다. 모든 나라, 온 제국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생각이었고 자신이 있었다.

반면 황제는 대공이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전에 없는 모습을 포착했으나 짐짓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며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다.

“중요하게 나눌 대화가 있는데, 이리 와 앉는 건 어떤가?”

“…….”

“홍차가 아주 잘 우려졌어.”

다시금 찻잔을 손에 쥔 황제가 홍차를 호로록 들이마셨다. 시선은 전과 같이 롬포드를 향한 채 여유만만한 미소까지 살풋 지어 보였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일순간 냉담한 분위기가 흘렀다.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롬포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황제의 맞은편에 앉은 그 앞에 찻잔이 놓이고 홍차가 채워졌다.

“들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찻잔을 힐끗 바라본 롬포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짐짓 발칙함을 넘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 법한 태도에도 황제는 어떠한 호통이나 문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롬포드의 말에 맞장구치듯 호응을 할 뿐이었다.

“혹시 제국에 떠도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가?”

“…….”

“그러한가 보군. 하하…….”

더없이 섬찟한 분위기를 풍겨 오는 통에 황제는 롬포드의 눈치를 살피며 자문자답으로 대화를 끝내는 듯했다. 이내 황제가 찻잔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머지않아 그가 손길을 거두곤 다시금 대공을 바라보며 은밀한 제안을 했다.

“롬포드 대공. 거래를 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알고 있거든. 그 아이를 납치한 자를.”

견고하던 롬포드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뒤이어 그의 미간이 즉각 찌푸려지며 금방이라도 분노를 표출해 낼 듯한 성난 태도로 뒤바뀌었다.

이를 본 황제는 롬포드의 눈에 띄지 않게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눈엣가시였던 대공과의 심리전에서 오늘만큼은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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