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65화 (65/80)

65.

황제가 내뱉은 말은 단연 롬포드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었다. 아이를 데려간 납치범에 대한 단서. 롬포드는 부름을 받고 오기 전까지도 그것을 찾기 위해 살벌한 기세로 온 제국을 샅샅이 뒤지던 중이었으니까.

제국민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롬포드를 포함한 그의 병사들이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뜻대로 응하지 않을 때는 바짝 날이 선 검을 들이미는 행동도 불사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그의 섬뜩한 악명을 눈앞에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누구도 쉽사리 롬포드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막아서지 못했다. 오히려 흡사 핏빛과도 같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외면하거나 꼼짝 못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저 그의 분노가 한시라도 빨리 사그라들길 바라며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농담이라면, 지나치십니다.”

화를 참듯 한 글자, 글자마다 힘주어 목소리를 내뱉은 롬포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해 제국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평소 황제가 저를 아니꼽게 여기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 하리란 것도 알았다.

황제에게는 분명 딴지를 걸기엔 더없이 좋은 꼬투리를 제공했을 터였다.

이내 롬포드는 감았던 눈을 번뜩 떴다. 여전히 냉랭함을 지우지 않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의 말이 사실인지, 단지 저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공수표를 날리는 것인지 헤아려야만 했다.

황제는 여전히 홍차의 향 따위를 음미하는 등의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늘 제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과 달리 여유로움을 보이는 탓에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농담이라니. 대공을 돕고자 하는 것인데.”

“…….”

“뭐, 자네는 밑져야 본전 아닌가.”

심드렁히 말을 이은 황제는 홍차를 호로록 들이마셨다. 이와 동시에 찻잔에 가려진 그의 입매가 또다시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로선 어떠한 확신이 있었다. 이를테면, 수년 전 몹시 의연한 태도로 소왕국의 멸망을 조건으로 내걸던 롬포드의 인상 깊던 모습에서 온 확신인지도 몰랐다.

“좋습니다.”

잠시간 흐르던 정적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 생각에 잠긴 듯하던 롬포드의 간결한 승낙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의 매서운 눈빛도 한층 사그라든 듯한 느낌이었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일이 예상한 결과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예감이 좋았다. 어쩌면 롬포드 대공이 아이를 찾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짐작을 믿어 의심치 않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래. 내 조건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은 황제가 손에 든 찻잔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미세한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은 견고하고 고급스러운 컵에서조차 마치 그의 특별한 신분이 드러나는 듯했다.

황제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뜸 들이며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한 태도로 계책을 꾀어내려는 모습이었다. 롬포드 또한 그런 그를 서둘러 재촉하거나 답을 종용하지 않고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찻잔의 손잡이를 매만지던 황제의 손길이 멈췄다. 다시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은 그가 롬포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선, 아이를 찾고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어째서입니까.”

“어찌 됐건 자네에게도 그편이 좋지 않은가. 어서 빨리 아이를 찾아야지.”

황제는 짐짓 마음에도 없을 걱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더불어 상대를 현혹하듯 과장된 손짓에서 간사한 마음씨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발뺌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군요.”

“물론! 내 다른 이는 몰라도 롬포드 대공만큼은 몹시 신뢰하거든. 하하!”

인위적인 웃음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의 눈에 띄는 가식이 사그라든 후에는 더 없는 정적이 그곳을 휘감았다. 그는 그제야 괜스레 목을 가다듬곤 인자한 미소를 띠며 롬포드의 답을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짧은 숨을 토해 낸 롬포드가 나지막이 답했다. 이내 그의 섬뜩하리만치 붉은 눈이 황제를 주시했다.

전에 없던 여유로움이 가득한 모습이며,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지 과도하게 저를 생각해 주는 태도는 분명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게 했다. 비단 그것이 자신에게 내걸었던 조건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현재로선 무사한지조차 알 수 없는 아이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방긋거리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아이를 마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내면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납치한 자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이었다.

롬포드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생각들을 갈무리하는 듯했다. 그날이 머지않았으리라는 듯이.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사용인들을 곁눈질로 흘끔거린 황제는 전보다 더욱 비밀스럽게 대화의 서두를 꺼냈다.

“대공. 베르게일 공작을 기억하나.”

황제는 테이블 위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황금색 패를 꺼내 놓았다. 네모난 모양의 그것에는 내리쬐는 햇볕이 정교하게 가공되어 황실 고유의 것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 * *

히이잉―.

말의 고삐를 힘껏 끌어당기자 이에 상응하듯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발굽을 내디딘 말이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자, 서너 마리의 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개중 가장 앞장서는 말에 올라타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롬포드 대공이었다. 그는 황제가 알려 준 목적지를 거침없이 향하는 중이었다.

황제가 제법 내밀하게 들려준 내용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지난날 베르게일 공작을 주축으로 하여 롬포드를 배척하기 위해 협력했었던 자들 중 하나일 거라는 이야기였다. 늘 그렇듯 그에게 반기를 품은 이들이 존재하는 탓이었다.

당시, 우두머리였던 베르게일 공작의 몰락으로 그들은 와해되었으나, 그것에 순응하지 못하고 롬포드에 대한 반감을 더욱 고조시킨 이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단언하듯 그자를 지목했다. 다름 아닌 르베이너스 공작이었다. 그가 바로 에시엘의 납치를 계획하고 실행한 주범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물론 롬포드는 황제의 말을 모두 신뢰하진 않았다. 그가 어떤 근거로 확신을 하고 추측을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눈앞에 보이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세차게 달리는 말들의 꽁무니를 따라 무수한 흙먼지가 일었다.

르베이너스 공작의 저택으로 향하는 낯선 길목엔 미처 만개하지 않은 조팝나무가 곳곳에 그득했다. 이곳에만 아직 완연한 봄이 찾아오지 않은 듯 푸른 풀잎과 희끄무레한 흰 꽃봉오리가 뒤섞인 나무들에선 어쩐지 뒤숭숭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윽고 롬포드의 시야 저 멀리 저택의 대문이 보였다. 그는 쥐고 있던 고삐를 더욱 바투 잡으며 달리는 말을 재촉했다. 박차를 가하며 거침없이 달리던 말이 머지않아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말의 꽁무니를 뒤따라 일던 흙먼지 또한 대문 앞에서 그득 피어올랐다. 이에 보초를 서며 잔뜩 긴장한 내색을 보이던 병사들이 기침을 토하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콜록, 대공께서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말에서 내려선 롬포드는 병사의 물음에도 주저 없이 대문을 향했다. 흙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침없는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병사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허둥대는 손길로 품 안의 종이를 꺼내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하지만 전달받은 게 없습니다만…….”

롬포드와 종이를 번갈아 보며 말하는 병사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 갔다. 월등한 체격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섬찟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공의 모습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위협적인 탓이었다.

긴장되는 찰나, 사그라든 흙먼지 사이로 기사단장 찰츠가 두세 걸음 앞서 나와 롬포드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곧 찰츠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황제의 명이다.”

오후의 햇살이 그가 꺼내 든 황금 패를 비췄다. 그것은 그 순간 어떤 것보다도 눈이 부시게 빛났다.

* * *

너른 방 곳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가득했다. 이파리가 둥그런 것, 넓적한 것, 얇고 긴 것 등. 각기 다른 지역에서 들여온 듯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듯 진열되어 있었다. 이 때문인지 방 안은 마치 웅대한 식물원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르베이너스 공작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푸릇함이 그득한 식물들과 조화를 이루듯 중앙에 자리한 담갈색의 느티나무 테이블엔 유난히 눈에 띄는 황금 패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치하듯 앉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롬포드 대공과 르베이너스 공작을 주축으로 서로를 맞닥트리고 있는 주위에는 극도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기류 또한 더없이 싸늘한 냉기를 풍겼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검붉은 핏빛의 눈에 담긴 강렬한 시선이 르베이너스를 향했다. 롬포드는 금방이라도 분노를 쏟아 낼 듯한 기세였다.

부딪히던 눈빛을 슬며시 피한 르베이너스는 테이블 어딘가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담담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규칙적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들기는 작은 소음이 퍼졌다. 불안함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탓이었다. 내려앉은 시선 역시도 가만있지 못한 채 테이블 이곳저곳과 황금 패를 연신 살피고 있었다.

“어디 숨겼지?”

계속해서 말을 잇는 롬포드의 목소리는 몹시 냉했다. 무미건조하여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은 소름이 끼칠 만큼의 섬뜩함으로 그곳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르베이너스가 입술에 힘을 주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금방이라도 사실을 토로해 버릴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지난 수년간 저 자신이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르베이너스가 옅은 미소를 띠며 짐짓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롬포드와 간신히 마주하는 시선엔 긴장감이 그득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아.”

또다시 들려오는 차디찬 목소리에 평정심을 잃은 르베이너스의 눈동자가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눈앞의 롬포드와 황금 패를 잇달아 힐긋거리는 시선에는 불안감과 더불어 제법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만일 황제 전하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일이 걸렸겠지.”

“하하……. 대체 뭐가 말입니까, 대공.”

“그간 아이에게 허튼 짓거리라도 했다면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일 또한 없을 거고.”

“예? 아이라니요?”

핵심을 짚는 말에 서둘러 되묻는 르베이너스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애써 모른 척했으나 저절로 반응하는 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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