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69화 (69/80)

69.

“할 말이 있다고?”

끝끝내 기다림을 이기지 못한 듯 롬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당혹감 속에서 번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빠르게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롬포드를 포함한 모두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게…….”

“…….”

“아…….”

에시엘은 여느 때보다도 서툰 말씨와 함께 입꼬리를 조심스럽게 끌어 올렸다. 어색한 단어를 뱉어 낼 제 음성이 낯설게만 들렸다.

소왕국에 있을 적, 부모와 좋지 못한 관계 탓에 친근하지 않던 호칭이 능숙하게 나올 리 없었다. 더구나 레고니스가에 입적되었기에 대공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으나, 눈앞의 이는 다름 아닌 롬포드였으므로 더욱 어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에시엘이 조심스러운 한 걸음을 내디딘 이유가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가 자신에게 내비쳤던 감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조금 낯설지만 온전히 느껴졌던 따스한 심리적 안정감이 그녀에게 용기를 줬다.

“에시엘?”

“아버…… 아버지…….”

약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에시엘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집무실 안에는 뜻밖의 적막이 흘렀다. 롬포드에게선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머릿속엔 갖가지 생각이 들어찼다.

‘너무 작아서 못 들었을까?’

길을 잃은 채 방황하던 에시엘의 시선이 바닥 한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서툴게 내뱉은 단어에 롬포드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그의 얼굴엔 어렴풋한 미소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괜스레 겁을 먹은 그녀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듣기 좋은 소리군.”

“네?”

“다시 듣고 싶은데 말이야.”

놀란 토끼 눈이 된 에시엘이 연신 입을 뻥긋거렸다. 짧은 찰나 롬포드의 말을 되새겨 보았으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혹여 숨겨진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크흠. 에시엘 님……?”

그리고 이번엔 렌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먼발치에서 상황을 관망하다가 그녀를 재촉하듯 조심스레 호명했다.

“어, 그게…….”

이에 반응하듯 무의식적으로 답한 에시엘은 드디어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딱 다물었다. 말을 끝맺지 못한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롬포드에게 닿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제 감정을 진정시키고 난 후에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냉혈한이라는 표현이 손색없던 롬포드는 이 순간 뒤바뀌어 있었다. 서늘함을 풍겼던 붉은 눈동자에는 온화함과 불안함이 뒤섞여 에시엘에게 오롯이 닿아 있을 뿐이었다.

에시엘 또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큼, 짐짓 따뜻함까지 느껴지는 눈길은 그녀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찼다.

롬포드가 행하던 태도의 의미를 이젠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입술을 떼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미동 없이 제게 향하는 눈길에 담긴 의미를 말이다.

“아버지…….”

“…….”

“아버지! 헤헤.”

나지막이 읊조리던 에시엘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실렸다. 롬포드를 향해 해맑게 웃음 짓는 그녀의 미소가 절정을 맞이한 봄의 햇살처럼 따사로웠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두려움도 비로소 모두 사라진 듯했다. 짧은 찰나 롬포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내 딸아.”

사뭇 조심스러우면서도 뚜렷하게 퍼지는 음성이 집무실을 잔잔하게 울렸다. 미세한 떨림을 보이던 롬포드의 눈동자는 한결 강직해진 채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불안하게 지내던 지난날들을 보듬기라도 하듯 확신을 심어 주는 눈빛이었다.

어렴풋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롬포드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자리했다. 저 작은 아이의 무한한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불사하겠다는 살벌한 다짐이었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각하.”

작은 박수 소리와 함께 렌테의 진심 어린 축하가 들려왔다.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 에시엘을 바라봤다. 대공의 눈에 띄지 않게 슬쩍 엄지를 추켜세우는 익살스러운 행동에 그녀의 웃음이 살풋 새어 나왔다.

“이리 와.”

“네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그녀가 다가오길 바라는 롬포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보폭으로 차근하게 걸음을 옮기는 에시엘에게 더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녀는 롬포드에게 향하며 떨리는 가슴을 괜히 어루만졌다.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선 롬포드에게 시원한 향이 옅게 풍겼다. 롬포드의 차가움을 닮은 향은 본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멀뚱히 선 에시엘은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렸다. 영문도 모른 채 롬포드의 말을 따르긴 했으나 그에게 단번에 살가움을 내비치긴 어려웠다. 그런데 순간 옅게 풍기던 향이 한층 진하게 훅 퍼지며 머리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얹어졌다.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롬포드는 어색한 움직임으로 에시엘의 자그만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난생처음일 법한 그의 행동엔 서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손길을 멈추지 않는 모습에선 그의 진심이 배어 나왔다.

에시엘의 마음 또한 덩달아 요동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롬포드가 전하는 미숙한 손길에는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에시엘은 온전히 와닿는 진심에 괜스레 벅차오르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주는 감정은 생각보다 더욱 특별했다. 그간 잊고 지냈던 탓에 그녀에게 몹시 남다른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학대를 당했던 어린 시절과 가문에 입적이 되긴 했으나 불안함을 떨쳐 내지 못하던 나날을 전부 망각한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별한 순간으로 와닿았다.

“아버지가 또 지켜 주세요!”

서툴게 마음을 전하던 롬포드의 손길이 차츰 잦아들고, 에시엘은 그를 올려다보며 따스한 봄 햇살처럼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 또한 이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인지도 몰랐다.

* * *

“다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걸요?”

“저, 정말?!”

“그럼요.”

옷가지를 정리하던 라비아나는 에시엘을 돌아보며 자신에 찬 대답을 건넸다. 그리고 더욱이 믿음을 주듯 맑게 웃어 보였다.

그들은 이전의 상황을 대화 주제로 삼던 터였다. 라비아나는 롬포드와의 상황을 토로하던 에시엘의 들뜬 마음에 불을 지피듯 확신을 안겨 주었다. 진정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겼음에 쐐기라도 박으려는 듯 말이다.

멋쩍은 탓에 괜히 곰지락대는 손끝에 닿는 드레스의 옷감이 무척 보드라웠다. 어쩌면 보드랍다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한 정도였다. 에시엘은 또 한 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에시엘은 공연스레 고개를 푹 숙여 입술을 오밀조밀 움직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퍼졌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일었다.

아무래도 외톨이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착각인 듯했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마냥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었을지도 몰랐다.

똑똑―.

어딘가 다급한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곧장 문이 열렸다. 그 뒤로 평소와 달리 정돈되지 않은 옷매무새를 한 채 조금 빠른 걸음을 하는 테이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이시? 너…….”

그를 바라보는 에시엘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깃들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한 기색이 완연한 탓이었다.

테이시는 단숨에 에시엘의 앞까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초조함이 느껴지는 붉은 눈이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와 가녀린 팔 곳곳을 빠르게 훑었다.

“무, 무슨 일이야?”

놀라서 바짝 긴장한 에시엘이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그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흐르는 적막 속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찰나, 어깻죽지에서 알알한 고통이 느껴졌다. 금세 그녀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진다.

“아야…….”

“아, 미안.”

그제야 빠르게 손을 거둔 테이시는 맥없이 손등을 매만졌다. 고개를 돌린 채 진한 숨을 토해 내는 그에게서 어딘가 안도감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가만가만 그를 살피는 에시엘의 뒤로 숨을 죽이고 있던 라비아나가 조용히 묵례를 하곤 방을 나섰다.

“어? 손이 엉망진창이잖아!”

“별거 아냐.”

에시엘은 감추려 드는 테이시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손바닥에 잔뜩 박인 굳은살은 둘째 치고 손등의 곳곳이 생채기투성이였다.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제때 치료하지 않은 모양인지 아물기 시작한 상처들의 모양새가 제멋대로였다.

에시엘은 그의 손등에 흉터가 생겨난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 흔적은 마차를 탈출하기 위해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렸던 필사의 안간힘이었다.

어찌 된 까닭에 지금까지 제대로 된 치료조차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본 이상 마냥 내버려 두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안 되겠어.”

상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에시엘이 고개를 쳐들었다. 한층 강단 있는 눈이 그를 마주했다.

“치료하자! 내가 해 줄게.”

“아…….”

테이시는 씨익 미소 짓는 그녀와 제 손등을 멍하니 쳐다보며 긍정을 표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이제야 현실을 인지한 듯 얼떨떨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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