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70화 (70/80)

70.

‘이번엔 괜찮을 거야.’

머지않아 에시엘의 자그만 손이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그의 손등 위에 얹어졌다. 그리고 한차례 약한 심호흡 후, 차분히 눈을 감자 포개진 손 사이에서 선명하고 밝은 빛이 일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기운에 집중했다. 작지만 또렷한 존재감을 나타내던 밝은 빛은 차츰 크기를 키워, 그들의 포개진 손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범위를 넓혀 갔다.

완전히 동그란 형태를 갖췄을 때, 눈부신 섬광이 번쩍하고 일순간 방 안을 밝혔다. 이와 동시에 테이시 또한 찡그리듯 눈을 질끈 감았다.

“와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시엘의 천진난만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테이시는 찬찬히 눈을 뜨곤 그녀를 마주했다.

푸르른 숲속 같은 청명함 가득한 눈 속에 제 손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 바라본 손등엔 조금의 생채기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야!”

해맑게 웃음 짓는 에시엘의 모습을 가만 바라봤다. 감정을 허물없이 내비치는 아이는 자신과 너무나도 달랐다. 테이시의 마음 한쪽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어떠한 말을 할 수도, 차마 시선을 거둘 수도 없었다. 순간 새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에는 미소 띤 그녀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가벼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작은 돌멩이라 여겨 하찮던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테이시는 제 연못이 다시금 잔잔해지기는 쉽지 않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익숙지 않은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더욱 묻어 두려 했다.

테이시는 지그시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했다. 제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난날 위태로웠던 순간의 간절함이 그의 감정을 일깨웠는지 몰랐다.

“후…….”

테이시는 심호흡하듯 묵직한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하지만 가쁘게 뛰는 심장의 파동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 와 마음을 부정해 봤자 전부 소용없다고 아우성이라도 치듯.

짧은 며칠 동안 에시엘의 안위를 확인하기까지 한시도 편히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역이었다.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어 치료조차 못 한 채 성치 않던 손이 마치 그의 애타던 마음을 나타내는 듯했다.

고작 몇 분 전, 제 수하가 알린 에시엘의 소식에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의 어깨를 붙든 채였다.

테이시는 저 자신이 겁쟁이임을 깨달았다. 에시엘이 정신을 잃었던 날들이 모두 저와 연관이 있었기에 혹여나 하는 가정이 사실이 될까 무서웠다. 더구나 절대적인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행동하기엔 지금의 제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윽고 테이시는 가쁜 제 심장 박동을 온전히 느끼며 스르륵 눈을 떴다. 에시엘은 여전히 올곧은 눈빛으로, 자신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약하게 이는 봄바람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녀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내려다본 손은 흉터 하나 없이 멀끔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당겨지고 살짝 미소 지어졌다.

“고마워.”

“아이, 참. 우리 서로 구해 줬는걸?”

“치료해 준 것도, 무사히 버텨 준 것도 전부 다.”

“응? 갑자기?”

“위험에 빠트리는 상황, 이젠 없을 거야.”

테이시는 스스로 다짐을 새기듯 강건하게 말했다. 가만히 마주하는 에시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처음 만났던 6년 전보다 더욱 맑아진 것만 같았다. 곧 그녀는 제 속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으응.”

재차 강조하는 굳은 목소리에 에시엘의 답이 뒤따랐다. 뒤이어 생긋이 미소 지으며 약속에 화답하는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찬란했다. 제게 다시는 없을 따스한 봄이었다.

어쩌면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절박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또 그녀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란 이유가 무언지.

뒤늦게 깨달은 마음의 크기를 가늠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거란 생각을 했을 뿐이다.

실은 알고 있음에도 애써 묻어 두려던 마음이었는지도 몰랐다. 결국에 잔뜩 헤집어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테이시로선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기에 수습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방대해진 감정을 애써 바로잡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자.”

테이시는 나직한 말소리와 함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의 손바닥에 놓인 깃털 모양의 머리핀은 여전히 반짝임을 뽐내긴 했으나 처음과 다르게 여기저기 흠집이 생긴 상태였다.

“어어?!”

의외의 물건을 발견한 에시엘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테이시와 머리핀을 번갈아 봤다. 정신이 없는 통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꽤 소중하게 여기던 머리핀이었다.

“네 것 맞지?”

“응! 세상에…….”

에시엘은 손을 뻗어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순간 손가락 끝에 닿는 쇠의 촉감이 차가웠다. 거칠다 못해 날카롭던 크리스털 장식은 험난하던 일을 겪으며 마모라도 된 듯 무뎌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완전 엉망진창이잖아…….”

멍하니 중얼거린 에시엘의 혼잣말이 테이시의 귓가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했다.

기운이 빠진 채 눈매까지 잔뜩 늘어트린 에시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떠올랐다. 망가진 장난감 앞에서 낑낑거릴 수밖에 없는 강아지랄까.

“몸은 괜찮아?”

테이시는 그녀를 보며 만면에 생겨나는 미소를 애써 지우지 않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입매가 어우러진 그의 낯은 무척이나 근사해 귀공자다운 풍모를 잔뜩 풍겼다.

어쩌면 에시엘은 처음 마주하는 모습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망연히 바라보게 됐다. 거짓을 조금 보태어 평소의 무심하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 으응. 아버지가 신관을 불러 주신 덕분에!”

“아. 아버지가…….”

테이시는 에시엘의 말을 곱씹듯 따라 되뇌었다. 당황한 듯한 그의 눈동자가 짧게 방황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도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한 눈 속엔 그녀가 담겼다.

에시엘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는 생소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낯설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생각을 지워 냈다.

“아무튼, 머리핀 사 줄게. 더 예쁜 거로.”

“아니야, 테이시가 왜 사 줘? 나 괜찮아!”

제 얼굴만 한 양손을 붕붕 흔들며 손사래를 치는 에시엘은 그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다만 방법이 통하지 않을 뿐이다.

“치료해 준 답례 정도로 생각해.”

“에이, 안 받아. 절대 안 받을 거야!”

“……내가 주는 것만 안 받는구나.”

“어어? 그게 아니라…….”

대번에 서운한 기색을 잔뜩 내비치는 테이시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에시엘이 그를 말렸다.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아, 알겠어. 그럼 잘 받을게.”

“좋아. 얼마든지.”

테이시는 또다시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 * *

“각하. 서신이 왔습니다.”

“누구지?”

“황성에서 온 것입니다.”

이에 롬포드는 의자에 기대어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뭉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모든 행동은 렌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뒤였다. 롬포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봉투를 낚아채곤 거침없이 개봉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붉은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도통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드디어 조건을 제안하셨습니까?”

롬포드의 입술이 움직이길 기다리며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던 렌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들을 쏟아 냈다. 롬포드뿐만 아니라 렌테 역시도 속이 검게 타들어 가도록 이 서신을 기다렸더랬다. 간사한 황제가 어떠한 거래 조건을 들이밀지 쉬이 파악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영토 확장을 바라시는군.”

“영토 확장이라면…….”

“그래. 결국에 이거였어.”

“……전쟁이 불가피하겠습니다.”

서류 뭉치 위로 팽개치듯 내려놓은 서신 속에는 황제의 필체로 보이는 듯한 글씨가 종이를 빼곡하게 채웠다.

기어이 황제가 바라는 것은 영토 확장을 위한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었다. 혹여 영토 확장은 핑계라 할지라도 그리 놀라운 제안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는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교활하게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자였으니까.

만일 전쟁으로 인해 레고니스 가문의 군사력이 약해진다면 그것을 핑계 삼아 내친들 이상하지 않았다.

롬포드는 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가만 고민에 빠진 그의 시선은 황제의 서신에 닿아 있었다.

“각하.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예상하던 바였어.”

“예? 저, 정말입니까? 그럼…….”

“르베이너스 공작을 어떻게 조질까.”

“…….”

“황제께서 마음대로 하라 하시는데 말이야.”

섬뜩한 말을 읊조리는 롬포드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의 분노는 전부 르베이너스 공작을 겨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오라는 집무실 안을 휘감았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

렌테는 롬포드의 서늘해진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으나 그를 만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레고니스 가문의 둘도 없을 아가씨인 만큼 무조건적인 그녀의 편이 될 생각 때문이었다.

그날 아이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아이와 뽀얀 피부 곳곳에 흠처럼 생겨난 생채기를 보고 있자니, 환하게 웃음 짓던 얼굴이 떠올라 더욱 애처로웠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나와 내 가문이 만만했으니, 그런 짓거리를 벌였겠지. 안 그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렌테는 구태여 롬포드의 화를 돋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걸린 액자를 슬쩍 바라봤다. 부조화스러울 정도로 널따란 액자는 여전히 집무실의 마스코트라도 되는 양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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