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73화 (73/80)

73.

“각하. 업무는 마무리되셨습니까?”

“거의 다 됐다.”

“다행입니다. 모든 준비도 얼추 끝나 간다고 합니다.”

롬포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씨를 갈겨쓰던 손놀림이 한층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동이 트지 않았을 무렵부터 기상하여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매우 이른 시각이었다.

“무척 기쁘시겠습니다. 하하, 오늘의 연회로 아가씨를 직접 축하해 드릴 수 있다니…… 저 또한 감격스럽고말고요.”

“그래. 기쁜 날이야.”

웃음을 피식 흘리는 롬포드에게서 미약한 희열이 느껴졌다.

오늘은 레고니스 가문 내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명칭은 대강 연회라 칭했으나 실상은 에시엘의 데뷔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정식적인 데뷔도 치르지 못한 그녀를 염려한 롬포드의 배려였다.

렌테는 롬포드의 입꼬리에 여태 걸려 있는 미소를 보며 새어 나오는 기쁨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한없이 냉정한 제 주인도 결국 아가씨의 매력엔 어쩔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탁―.

마침내 롬포드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이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하는 그의 기분은 최상이리라.

“얼른 가지.”

* * *

연회장은 저택 내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황제의 것과 비교할 정도는 못 되었지만, 여타 가문 중엔 비교적 월등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곳에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며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연회장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곳곳에 놓인 색색의 꽃들과 한가운데 길게 위치한 테이블 위로 마련될 음식까지. 어느 하나 최고가 아닌 것이 없었다.

곧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점차 가깝게 들리는 일정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인사를 건네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체는 바로 선두에 선 롬포드와 그 뒤를 따르는 테이시, 페루딘이었다. 그들은 여느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그 무엇으로도 뽐낼 수 없는 후광을 자랑하며 등장했다.

“각하. 앉으시죠.”

뒤이어 렌테의 안내가 이어졌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는 롬포드, 그의 양옆으로는 두 아들이 자리했다.

“그럼 음식을 들이라 하겠습니다.”

“잠깐.”

롬포드는 손을 들어 렌테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연회장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에시엘이 안 보이는군.”

어디에도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종용하듯 렌테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집사가 입을 떼려는 순간, 주위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오셨습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연회장의 출입구에는 약간 상기된 얼굴의 에시엘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아하하…….”

항상 나풀나풀 흩날리던 머리칼은 곱게 땋아 말아 올려 있었다. 자못 단아함을 자아내는 모습이 스스로도 낯선지 목을 긁적이는 모습이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샛노란 색의 드레스는 유채꽃밭을 그대로 담아낸 것만 같았다. 마치 병아리처럼 올망졸망 귀여워 퍽 잘 어울렸다. 조금씩 발길을 옮기는 굽이 낮은 하얀색의 단화에서 나는 수줍은 발걸음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헉. 내가 꼴등이에요?”

이내 롬포드와 그의 두 아들을 발견한 에시엘은 쑥스러움도 잊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라비아나가 말하길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도 공을 들여 치장한 터라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저택 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연회인 만큼 라비아나 또한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한 것이리라.

결국 지각은 에시엘의 몫이었다.

“괜찮다. 이제 시작하려던 참이니.”

롬포드가 베푼 자비도 마음이 조급한 에시엘에겐 소용없었다. 모두의 이목이 쏠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부여잡고 테이블을 향해 후다닥 달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간 에시엘의 놀란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어어!”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벌어진 일이었다. 스텝이 꼬인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은.

이를 지켜보던 이들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개중에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린 사람도 있었다.

자리에 앉아 에시엘을 살피던 롬포드와 페루딘의 몸이 달싹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행동이 민첩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괜찮아?”

테이시는 어느 틈에 벌써 에시엘 앞에 서서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어, 어?”

“놀랬지. 안 다쳤어?”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하핫.”

멋쩍은 웃음을 짓는 에시엘의 얼굴이 발그스름했다. 그녀의 시선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했다. 자신을 부축하느라 가까워진 테이시의 눈을 쉽게 마주칠 수 없는 탓이었다.

“팔 잡아 줄게.”

“아니야! 괜찮아. 다치지도 않았는걸?”

아무래도 창피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테이시는 그런 에시엘을 가만 바라보다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배려는 자리를 앉을 때도 돋보였다.

“여기 앉아.”

테이시는 자신이 앉아 있었던 의자를 내어 주며 말했다.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이지만 평소와 다르게 온정을 베푸는 모습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맞은편의 페루딘 또한 그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듯했지만, 그런 점들을 이상하게 여길 새도 없이 롬포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식사하지.”

곧 음식 커버가 뒤덮인 음식들의 행렬이 이어지자, 긴 테이블의 손이 닿지 않을 먼 곳까지 빼곡하게 그릇이 놓였다.

커버의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음식 냄새는 가히 자극적이었다. 에시엘이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는 사이, 주방장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음식 커버를 수거했다.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음식들 중 고기의 종류만 무려 다섯 가지가 넘었고 수프, 샐러드, 파스타, 피자, 등 다양한 먹을거리가 테이블 위로 즐비했다. 게다가 아이들의 입맛까지 저격한 새콤달콤 시원한 에이드 음료까지.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만찬 자리였다.

“에시엘.”

그리고 그녀를 나지막이 호명하는 롬포드가 있었다. 유난히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는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에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을 훑으며 눈을 빛내던 에시엘의 눈길이 그에게 닿았다. 가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매우 천진스러워 보였다.

“축하한다. 내 딸아.”

“…….”

“무사히 데뷔하지 못한 것, 이 자리로 위로가 됐으면 좋겠군.”

“고마워요, 아버지.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롬포드의 낯에는 순간이나마 옅은 미소가 생겨났다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를 떠올린다면 실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에시엘 또한 그의 축하에 얼빠진 사람처럼 당황했다가도 금세 해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나도, 나도! 축하해 줄 수 있어서 좋다구…….”

뒤이어 맞은편의 페루딘도 발언권을 주장하듯 한쪽 손을 들고 신나게 말했다. 다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와 스르륵 내려가는 손은 끝내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눈을 맞추지 못하는 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물이야.”

그리고 옆에서 무언가를 스윽 내미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테이시가 건넨 것은 손바닥에 꽉 들어차는 작은 상자였다.

“선물?”

“열어 봐.”

“뭐야?! 궁금하니까 얼른 열어 봐!”

에시엘은 얼떨떨하게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몹시 가벼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용물을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은지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오히려 설레발을 치는 페루딘의 언성이 요란스러웠다. 그는 금방이라도 상자를 대신 열어 줄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되레 에시엘의 행동거지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인 롬포드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으응. 알겠어.”

에시엘은 페루딘의 성화에 못 이기듯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와아……. 머리띠네!”

상자에 담긴 것은 머리띠였다. 띠 전체에 크리스털이 잔뜩 박힌 채 형형한 빛을 뽐내어, 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상상케 했다.

곧 에시엘이 머리띠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약한 움직임에도 반짝거림을 자랑했다. 그녀는 머리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스럼없이 제 머리에 씌웠다.

“고마워. 어때? 어때?”

“예뻐. 잘 어울려.”

바로 테이시를 돌아보며 제 머리를 이리저리 선보인 에시엘이 해사하게 웃으며 물음을 건넸다. 머리띠에 박힌 크리스털만큼이나 반짝이는 그녀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치장한 올림머리와도 특히나 잘 어울렸다. 담백한 칭찬을 건넨 테이시의 시선이 에시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를 향해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는 그녀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한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뜻밖의 환대는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것이었다.

허물없이 딸이라고 칭하던 롬포드와 수줍게 축하를 건네던 페루딘, 뜻밖의 선물을 준비한 테이시까지. 그 외에도 어떤 날보다도 공들여 치장해 준 라비아나와 연회를 위해 수많은 음식을 준비한 저택의 요리사들을 비롯한 사용인들 모두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충만한 애정을 느끼는 제 마음이 벅차올랐다. 뒤늦은 인식은 더욱 격한 감정을 불러왔다. 어쩌면 이들은 그녀의 생각보다 일찍이, 오래전부터 에시엘을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나 행복해요! 정말, 정말.”

에시엘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려 왔다. 촉촉해진 눈망울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간신히 울음을 참는 듯했다. 어렵게 이루어 낸 가족인 만큼 깨지지 않길 바라고 바라는 마음만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에시엘의 말을 듣고 있는 테이시의 행동은 어쩐지 미묘했다.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그녀에게 쉬이 동조하지 못하는 모습 또한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더구나 그런 테이시를 지켜보는 롬포드의 눈초리도 예사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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