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나 행복해요! 정말, 정말.”
귓가에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만으로 감정이 온전하게 느껴졌다. 울먹거리는 소리에도 테이시는 차마 고개를 들어 에시엘을 바라볼 수 없었다.
더욱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간단한 인사치레도 하지 못했다. 평소의 그라면 가벼운 미소와 다정스러운 눈빛을 건넸을 터였다.
지금 테이시의 마음속엔 수천, 수만 가지의 생각과 감정이 공존했다. 비로소 가족의 애정을 깨닫고 기뻐하는 에시엘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저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문제는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 이제 더는 묻어 둘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다. 물음표 같던 마음은 어느새 느낌표가 되어 있었다. 에시엘을 향한 감정이 더욱 명확해진 것이다.
테이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멀거니 바라봤다.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처럼 이글대는 마음이 끓어올랐다. 의심할 여지없이 뚜렷한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제가 바라보는 에시엘은 그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러한 감정을 품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도 잠시, 고민할 새도 없이 부정적인 답변이 떠올랐다.
테이시로선 행복과 동시에 직감한 슬픈 운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알량한 감정으로 인해 에시엘에게 가족이란 울타리를 없애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기쁨을 제 손으로 망칠까 봐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괴롭고 불안했다.
테이시는 다시금 고개를 떨궜다. 불시에 깨달은 현실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에시엘을 보고 있자니 생겨나는 죄책감은 마음 한쪽을 무겁게 만들었다. 과연 그녀의 행복을 깨트려도 함께 웃을 수 있을까. 그로선 자신이 없었다.
“형, 형! 웬일로 선물을 산 거야? 내 거는?”
모두를 잠자코 보고 있던 페루딘의 물음이었다. 순진무구하게 적안을 빛내는 모습이 아직 철없는 아이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테이시는 금세 낯빛을 바꾸곤 천천히 제 동생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은 모두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너도 때가 되면 선물해 줄게.”
“정말? 정말이지?!”
신이 난 듯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페루딘의 모습에 오히려 테이시가 롬포드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롬포드는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시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테이시는 페루딘의 기대심 가득한 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내 숟가락을 들어 제 앞의 수프를 한 스푼 떠먹었다.
“있잖아…….”
그리고 그때 그의 옆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내가 엄청 맛있는 케이크 가져올게. 답례로!”
에시엘은 테이시 쪽으로 상체만 살짝 기울인 채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흡사 극비 사항을 전하는 첩보 요원처럼 몹시 치밀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먹었다.
테이시는 그런 에시엘을 아무 말 없이 찬찬히 바라봤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와 붉은 머리칼, 느닷없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도 그녀의 일부인 것을 알았다. 변함없는 그의 맘속에 한없을 감정이 차올랐다.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던 에시엘은 찰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테이시와 슬그머니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빠르게 롬포드와 페루딘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식사에 집중하는 듯하자 다시 시선을 맞춰 오는 그녀의 눈빛에 어딘지 장난기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에시엘은 테이시를 향해 눈과 코를 찡긋하며 그녀 나름의 비밀 신호를 보냈다. ‘얼른 먹어’라며 소리 없이 또박또박 전하는 메시지도 함께였다.
이에 무방비하게 있던 테이시의 만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결국 에시엘은 자신의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곤 눈을 부릅떴다. 그를 단단히 주의시키는 모양새였다.
테이시에게 에시엘은 그녀 자체로 뜻밖의 행복일지 몰랐다. 팍팍하고 삭막해 여유가 없던 제 삶에 작지만 환한 등불처럼 희망을 주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에시엘을 가만 바라보는 내내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버릴 수도 내보일 수도 없어 고달팠다.
“이러다간 다 식겠는걸? 팍팍 먹어!”
에시엘은 포크로 파스타를 잔뜩 말아 테이시의 빈 접시에 덜어 주었다. 야무진 손놀림으로 베이컨 조각도 잊지 않았다.
기어이 테이시는 웃음을 피식 흘렸다. 고작, 그녀가 덜어 놓은 파스타를 봤을 뿐인데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단 생각이 앞섰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애써 감추려 드는 마음이 버텨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너도…….”
“나, 나는?! 나도 줘! 내 그릇도 깨끗하잖아.”
맞은편의 페루딘은 테이시의 말소리가 묻힐 만큼 큰 소리로 말하며 제 접시를 내밀었다. 급하게 음식을 욱여넣었는지 볼이 터질 듯 빵빵했다.
게다가 빈 접시이기는 하나 군데군데 묻어 있는 소스의 흔적 때문에 깨끗하다고 말하긴 민망한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에시엘에게 아주 당당히 접시를 들이민 것이다.
“하핫. 그러면 페루딘은 피자 줄게.”
“좋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음식을 둘러보던 에시엘은 망설임 없이 피자 한 조각을 페루딘의 접시에 놓았다. 끝내 제게 향한 관심이 흡족한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그였다.
숨을 돌리듯 에이드를 마시려던 에시엘의 시야에 문득 롬포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 덜어 놓았던 파스타가 양은 전혀 줄지 않은 채 소스만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안 되겠네.’
에시엘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도리질을 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음이 갑작스레 연회장을 울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에 쥔 나이프를 뻗어 아무도 손대지 않은 칠면조구이의 다리 부위를 거침없이 잘라 냈다. 그리고 그것을 롬포드의 접시에 턱 하니 놓았다.
“드세요! 튼튼해야 일할 수 있으니까요.”
“…….”
롬포드의 시선이 에시엘과 칠면조구이, 테이시에게 한 번씩 머물렀다. 찬찬히 쳐다보는 중에 그제야 테이시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게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식욕이 돌기라도 한 모양인지, 한결 편안한 얼굴로 진정한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 그런 거군.”
롬포드는 에시엘이 건네는 곰살궂은 말에도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만 읊조렸다. 혼잣말인 양 나직한 어투였기에 의미하는 바를 더욱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했던 그의 눈빛만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어딘가 석연찮음에도 고개만 갸우뚱 기울이던 에시엘은 끝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면 이것만 한 게 없지.’
그리고 다시 에이드가 담긴 잔을 쥐곤 공중으로 쳐들며 말했다.
“자! 건배해요, 건배!”
“뭐어?”
“오늘만큼 좋은 날도 없지.”
뚱딴지처럼 난데없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에시엘을 향했다. 꼬투리를 잡으려는 듯 입을 놀리다가도 잔을 든 페루딘,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말과 함께 와인 잔을 든 롬포드, 거리낌 없이 잔을 든 테이시였다.
뒤이어 그녀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곤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우리 가문의 행복을 위하여!”
쨍―. 네 개의 잔이 서로 맞부딪히며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 * *
새하얀 백마가 이끄는 마차가 세차게 달렸다.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거세게 달음박질하는 마차는 정신없이 목적지를 향했다.
말들에게 조금의 흙모래가 묻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신겨 놓은 신발과 온갖 장신구들이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달리는 말에게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액세서리였다.
이와 더불어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마차는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뽐냈다. 색색의 깃털 장식이며 곳곳에 박힌 갖가지 보석, 심지어는 마차의 외관마저 아리따운 분홍색이었다.
사소한 물건이나 행동에서조차 그 주인의 성향이 엿보인다고 했던가. 그것은 결코 평범해 보이는 마차가 아니었다.
“내가 직접 오게 하다니…… 이래도 되는 거야?!”
마차 안, 한 소녀가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작은 가방에서 부채를 꺼내 날렵한 소리가 나도록 펼쳐 들었다.
그녀가 연신 신경질적인 부채질을 하는 통에, 깔끔히 관리된 채 빽빽이 달려 있던 깃털이 부채 끝에서 힘없이 나풀거렸다. 덩달아 이는 미약한 바람에 가슴께를 웃돌던 소녀의 머리칼도 흩날렸다. 웨이브 없이 차분하게 늘어트린 모양새는 화려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또한 예민한 성격이라도 나타내듯 찢어진 눈매와 상반되게 맑게 빛나는 옥빛 눈은 이질적인 매력을 더했다. 그 아래, 아담하지만 부드러운 곡선 형태를 띠는 코와 아직은 통통한 볼살이 성숙함과 어리숙한 분위기를 동시에 자아냈다.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은 게 없었다.
“아, 정말 자존심 상해!”
냅다 집어던진 부채는 맞은편 의자와 부딪히곤 툭 하니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순간에 널브러진 부채의 깃털이 꺾이며 망가진 것은 물론, 내구성이 좋지 못한 부채에는 순식간에 군데군데 흠집이 생겨났다.
하지만 소녀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 제 기분을 가다듬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페르미아 아가씨, 곧 도착입니다!”
쩌렁쩌렁 외치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소녀, 페르미아 레베카는 제 드레스의 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마차의 색과 비슷한 분홍색의 드레스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움을 느낄 만큼 곱디고왔다.
“아아―. 이제야 만나는구나.”
곧 소녀는 야무진 손길로 주름을 정리하던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마차의 창에 어렴풋이 비치는 제 얼굴을 보며 싱긋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