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크흠. 저, 각하.”
렌테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롬포드를 불렀다. 그는 웬일로 집무실이 아닌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테이블 한편에 놓인 찻잔에서 느리게 피어오르는 김은 롬포드가 만끽할 여유로움에 느긋함을 더했다. 업무를 미리 처리해 둔지라, 오늘은 그나마 일거리가 많지 않은 날이었다.
두툼한 양장본의 빼곡한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시선이 렌테를 향했다. 그들은 아무런 호응 없이 마주하는 눈빛만으로도 미세한 기류를 알아챌 수 있는 사이였다.
“얼마만의 여가 생활이십니까.”
“글쎄. 까마득하군.”
“정말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시간이군요.”
렌테는 뜨끈한 차에서 피어오른 김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응시하며 자못 아련한 눈을 했다. 그러다 이내 멋쩍은 듯 허허 웃어넘기는 모습에 롬포드도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몇 분이나 지났을까, 롬포드를 가만 보고 있던 렌테가 또다시 입을 뗐다.
“소가주님께서 얘기 나눌 것이 있다 하셨는데요.”
“무슨 얘기를?”
“그것까진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침 오늘 일정이 없으니, 시간을 내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
기꺼이 승낙한 롬포드는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들이 저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무얼지 조금도 예측되지 않았다.
평소에도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는 부자 관계였다. 그러나 일과 관련된 부분에 한해서는 종종 얼굴을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롬포드는 제 아들이 궁금해할 법한 업무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어 짧게 뜸을 들이는 렌테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롬포드는 상체를 의자에 기대며 렌테와 시선을 마주했다.
“앞으로는 조금 여유를 가지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여유를 가지라고?”
“예. 소가주님께서 잘 해내고 계시니까요.”
아무래도 렌테가 처음부터 꺼내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껏 일밖에 모른 채 살아온 제 주인이 오늘 같은 느긋함을 더 즐기며 지내길 바라는 마음일 터였다.
더구나 가문을 이끌 테이시도 무척이나 일에 매진하는 것을 알았기에, 이젠 어느 정도 염려를 놓아도 될 듯싶었다.
“아니. 아직은 일러.”
롬포드의 눈이 느릿하게 끔뻑였다. 천천히 운을 떼는 그의 뉘앙스는 제법 엄격하고 단호했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못하는 렌테의 얼굴빛은 걱정스러움을 띠었다. 이내 묵례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만다.
“그럼, 오시라 하겠습니다.”
* * *
똑똑―.
“그래.”
노크 소리에 응답하는 롬포드의 음성이 울렸다. 뒤이어 문이 열리고 여느 때와 그렇듯 단정한 차림새의 테이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박자박 걸어와 별다른 말 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롬포드는 읽고 있던 양장본을 덮어 옆으로 밀어 놓았다.
둘 사이에는 금세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깨지 않으려는 듯한 기류도 함께 감돌았다.
“알고 계신 건가요.”
“뭘 말이지.”
“페르미아 양이 찾아왔었습니다.”
“페르미아?”
롬포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딘가 익숙한 이름을 기억 속에서 되짚었다. 워낙 흔한 이름이었기에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기조차 쉽지 않았으나, 언젠가 그 이름을 자신 있게 자랑하던 백작의 목소리가 찰나의 순간 떠올랐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제 딸을 팔방미인이라 내세우던 백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획기적이라 부풀리며 결혼을 이행시키려는 훤한 속셈을 숨기려는 약간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롬포드의 입가에서 실소가 픽 흘러나왔다.
“아아, 떠올랐어. 감히 찾아오기까지 했군.”
대화를 이어 가려던 테이시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굳게 다물어지고 마는 입과 어두워진 낯빛엔 잡념이 많아 보였다. 롬포드의 몹시 심드렁한 투에서 무관심한 마음이 역력히 느껴진 탓이었다.
아무렴 이상한 태도이긴 했다. 제 아들과 혼담이 오간 상대에게 보이는 태도치고는 무신경하기 짝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 이유가 뭐라지?”
테이시는 롬포드의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되묻는 물음에도 선뜻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또 다른 설명을 바라는 듯이.
각자의 뜻이 담긴 채 공중에서 마주치는 시선은 서로를 닮아 있었다. 건조하면서도 차가운 시선은 어느 사람이라도 두려움에 떨 만큼 무서운 기세였다. 그것에 개의치 않는 사람은 이들뿐이리라.
“혼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궁금해했습니다.”
“그래, 혼인. 그렇겠지.”
“아버지. 어떻게 된 겁니까.”
“네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는 의미가 있겠나?”
“예……?”
롬포드는 테이시로선 알아차리기 어려운 아리송한 말만 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혼인이란 단어를 되뇌는 그의 태도는 담담했다.
한 가지 분명한 느낌은, 저에게 사실을 알려 주기 싫은 것보단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냐는 뉘앙스였다는 것이다. 롬포드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레베카 가문과의 혼인은 없던 일로 한다.”
“예? 없던 일이라니요?”
“오히려 네게는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
롬포드는 자신의 결정을 통보하면서도 차분하고 평온한 투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다 식어 버린 홍차를 들이켜는 그의 인상이 살풋 찡그려졌다. 다시금 내려놓는 찻잔의 바닥에는 찻잎의 여린 침전물이 가라앉은 채였다.
테이시는 뒤따르는 말에 대한 의미를 여전히 간파하지 못했지만 설명을 바랄 수도 없었다. 바란다 한들 그것에 응해 주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갑작스레 받은 파담 통고에 마냥 반색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공가라 한들 레베카 가문과의 혼담이 깨진 것은 오히려 골치 아픈 일이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쪽엔 굳이 전하지 않아도 될 듯해.”
“그럼…….”
“잘난 가문이니, 페르미아 양도 양심이 있다면 그러다 말 테지.”
롬포드는 별일 아닌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방문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 * *
“가자, 가자! 응? 나가자니까!”
에시엘의 방에는 몹시 생떼를 부리는 페루딘의 목소리만 들렸다. 어찌나 쩌렁쩌렁 울리는지, 그녀의 방문 앞 복도를 오가는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바삐 걸음을 옮길 정도였다.
페루딘은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었고, 맞은편의 에시엘은 요지부동 자세로 근 30분가량을 대치하듯 앉았다.
“안 돼. 시간이 늦어서 안 나갈 거야.”
에시엘은 사뭇 엄격하게 의사를 밝혔다. 야무지게 팔짱까지 끼는 확고한 모습에 살짝 당황한 듯한 페루딘의 몸이 움찔하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어릴 적이었다면,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진작 페루딘의 말을 따라 외출을 했으리라. 그것을 예상했을 그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었다.
페루딘의 주춤하던 움직임을 놓칠 리 없는 에시엘은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페루딘, 공부도 다 안 했다며?”
“그, 그걸 어떻게…….”
“다 들었거든? 그럼 더더욱 안 돼!”
그의 수하들은 이미 에시엘의 편이었다. 워낙 제멋대로인 작은 도련님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셋뿐이라는 현실을 일찍이 파악한 것이었다.
“치이…….”
기대감이 사그라든 페루딘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잔뜩 늘어졌다. 어떠한 방법도 통하지 않는 것을 예감했는지 더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너도 아버지랑 형처럼 똑같아! 못 놀게 하고 맨날 공부하라 하고…….”
“뭐, 내가 아버지와 테이시랑? 아하핫.”
귀여운 반항에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통통한 입술을 빼죽이는 페루딘의 모습이 변함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를 달래어 방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문득 에시엘의 머릿속에 얼마 전 광경이 떠올랐다. 테이시 그리고 그와 결혼을 약속했다는 페르미아. 둘이 함께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
‘정말인 걸까?’
선남선녀의 만남은 퍽 잘 어울렸다. 게다가 그와 결혼할 정도의 상대라면 내로라하는 가문일 것도 불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도 그날, 테이시가 페르미아에게 보이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사소한 것도 기억해 주며 꽤 다정해 보이는 탓에 대화에 끼어들 틈이 더욱 없었다. 애꿎은 케이크에 구멍만 잔뜩 내어 도프니에게 잔소리를 들었었다.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못 놀게 된 사람은 나인데?”
“어? 내 표정이 왜?”
“얼굴이 이렇게, 이렇게. 완전 울상이잖아!”
페루딘은 제 눈매를 밑으로 죽 늘이며 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지다가도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루딘. 혹시 그거 들었어?”
“뭘?”
“그……. 테이시 결혼한다고 하던데?”
은근슬쩍 묻는 에시엘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가만두지 못하고 손장난을 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듯했다.
“엥? 누구랑?”
그리고 들려온 페루딘의 대답에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원하는 해답을 들은 것 같았다.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맞아! 예전에 들은 것 같아.”
“어어?”
뒤늦게 기억이 떠올랐는지 답을 정정하는 페루딘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졌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에시엘의 목소리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곰살갑던 페르미아를 밀어 내지 않던 건 전부 이유가 있었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시엘은 씁쓸한 감정이 들어 기분을 애써 환기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초상화 본 적 있는데 완전 못생겼어. 머리에 옥수수 수프를 끼얹은 것 같아.”
“아…….”
잇따르는 페루딘의 설명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못생겼건 옥수수 수프를 끼얹었건, 테이시의 결혼 상대로 정해진 셈이었다. 아무렴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었다.
“근데 갑자기 왜?”
“으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에시엘은 자신이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확답받은 진실이 왜인지 모르게 기분 좋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