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울퉁불퉁한 흙길을 걷는 느낌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인공적으로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둔 덕에 누릴 수 있는, 자연이 주는 작은 선물 같은 것이었다.
테이시와 에시엘은 그곳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춰 걸었다. 구태여 말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합이 맞는 움직임 또한 기분을 무척 좋게 했다.
“와, 세상에!”
그리고 그때 에시엘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한껏 빛냈다. 이내 고개를 돌려 테이시를 바라보는 눈 속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조심해.”
“응, 그럴게!”
“넘어지니까 뛰지 말고 가.”
단번에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테이시의 입술 사이로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어 무심한 듯 다정한 걱정이 그녀를 향했다.
그러나 에시엘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잔뜩 신이 난 뜀박질이었다.
“걱정 마, 난 절대로 안 넘어져!”
테이시는 장난스럽게 약 올리듯 소리치며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이 제 마음속까지 닿은 듯 가슴 깊은 곳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적당히 내리쬐는 햇살과 기분 좋게 살랑이는 바람이 살결을 간지럽히는 한적한 오후였다. 그녀에게 정원 뒤뜰 산책을 제안한 것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더없이 마땅한 날씨였다.
“테이시, 여기 봐 봐!”
꽤 멀리서 소리치는 에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치지도 않는지 그새 점처럼 작게 보일 거리까지 도달해 해맑게 웃으며 좌우로 크게 흔드는 뽀얀 팔이 눈에 띄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넘실대는 노란 유채꽃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청명한 날씨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테이시는 잠시 걸음을 멈춰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완전 노란 세상이야. 빨리 와 봐!”
에시엘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테이시를 보챘다. 살짝 붙잡은 드레스 끝단은 이미 더러워져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해맑게 웃는 그녀였다. 그 얼굴에 핀 천진난만한 미소는 이곳의 어느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테이시에겐 다른 것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에시엘과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마음의 크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더는 감추지도, 허허실실 웃어넘기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지금 제 감정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테이시는 에시엘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으며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꽃이 잘 어울려.”
어느새 에시엘의 귓등에 유채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꽃을 주운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반색하는 에시엘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꽃이라서 그런가 봐!”
“맞아, 그만큼 예뻐. 잠깐 잊고 있었어.”
“어, 어엉?”
테이시는 에시엘의 장난스러운 호들갑을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에시엘을 지긋이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린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태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에 어찌할 바를 모르도록 당황한 그녀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그만큼 예, 예뻐……?”
어리벙벙하게 곱씹는 말의 어감이 어색하기만 했다. 대공을 닮아 유독 무뚝뚝한 편인 테이시에게 나왔다곤 믿기 어려운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금세 분홍빛으로 물들고 마는 그녀의 얼굴엔 모든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에시엘. 이리 와 봐.”
“어? 으응.”
“어디가 좋을까.”
심도 깊은 고민에 빠진 테이시의 한 손에는 산뜻한 초록색 줄무늬가 있는 피크닉 매트가 들려 있었다. 이들은 밖으로 나온 김에 가벼운 피크닉을 즐기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았다.
어느새 테이시의 곁에 다가온 에시엘이 옅은 신음과 함께 허리춤에 손을 얹고 함께 고민을 시작했다.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 그녀의 푸른 눈이 곳곳을 빠르게 훑었다.
“좋은 곳이 있어!”
그러던 중, 손바닥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에시엘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단숨에 테이시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광활한 뒤뜰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어 웅장함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 아래에선 뒤뜰의 모든 곳이 보였고, 뒤뜰의 어디에서도 느티나무를 볼 수 있었다. 과연 이곳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아아, 시원하다.”
그늘막처럼 우람한 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하늘하늘 부는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에시엘은 장대한 느티나무를 배경 삼아 양팔을 쫙 펼쳤다. 입가에 산뜻한 미소를 걸친 채였다.
“어때? 여기가 딱이지?”
“아주 제격인 장소네.”
“다행이다. 그럼 이제…… 놀자!”
신나게 외치는 그녀의 머리통 위로 테이시의 손이 툭 하니 얹어졌다. 두어 차례 쓰다듬는 손길이 마치 그녀를 칭찬하는 듯했다.
“하핫…….”
갑작스러운 온기에 당황하는 사이 테이시는 빠르게 피크닉 매트를 폈다. 그리고 허둥지둥 그를 따르던 에시엘의 시야에 문득 느티나무가 눈에 띄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던 시선은 곧 레이저를 쏘듯 아주 예리하게 뒤바뀌었다.
에시엘은 여태 들고 있던 조그만 통을 바닥에 내버려 두고 별안간 느티나무 기둥을 냅다 끌어안았다.
“테이시! 어때? 팔이 얼마나 길어져야 할까?”
몇 년 전만 해도 혼자서 끌어안기엔 역부족이었던 나무였다. 지금도 손끝과 손끝이 닿진 않았지만,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세 뼘 정도 부족해 보여.”
“그렇게 많이?! 다 안으려면 긴팔원숭이 정도는 되어야겠네…….”
잔뜩 시무룩해진 목소리였다. 이에 돗자리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던 테이시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느티나무를 감싼 에시엘의 팔 위로 테이시의 팔이 겹쳐졌다. 그가 제 손끝에 닿는 에시엘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앞으론 내가 도와줄게. 그럼 되잖아.”
“어, 앞으로……? 그, 그럼 최고지.”
그제야 느티나무에서 슬그머니 떨어지는 에시엘에겐 쑥스러움이 가득했다. 쭈뼛쭈뼛 발길을 옮겨 바닥에 내려 두었던 통을 가져오는 모습에 테이시는 웃음을 픽 흘렸다.
그것에는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로 식욕을 자극하는 샌드위치가 담겨 있었다. 피크닉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이거 안 먹을 수가 없겠는데? 이리 와.”
괜히 어색해하는 에시엘을 힐긋 쳐다본 테이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신선한 채소와 잘 구워진 베이컨, 계란프라이에 주방장의 특제 소스가 어우러져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그제야 내내 딴청을 피우던 그녀의 시선이 샌드위치에 향했다.
“그럼 같이 먹을까? 뭐든 함께 먹어야 맛있으니까!”
에시엘은 멋쩍은지 볼을 긁적이다가도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피크닉 매트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테이시는 토끼처럼 야금야금 깨물어 먹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다가도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테이시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 짓게 됐다. 만사 제쳐 두고 무작정 에시엘과의 만남을 택한 것이 후회되지 않았다. 간단한 업무를 직접 해내고 있는 터라 아직 제 방에 쌓여 있을 결재 서류가 떠올랐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것들쯤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 냈다.
에시엘과 함께 있을 때면 대단하든 대단하지 않든,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본인의 감정에 솔직한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쉽게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과거엔 에시엘이 자신에게 자꾸만 다가오느라 취했던 모든 행동을 이상하다 여겼다. 이제 어쩌면 그 모습들을 제가 보이게 될 차례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평화를 깨트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테이시 님!”
페르미아는 정원의 입구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품위도 잊은 채 약한 흙먼지를 일며 부리나케 뛰는 그녀의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이를 본 에시엘의 놀란 토끼 눈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사이 테이시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오늘은 산책하고 계셨네요?”
빠르게 매무새를 정리한 페르미아의 물음이 테이시에게 향했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땀줄기가 삐죽 흘러내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닦아 내곤 제법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페르미아, 바쁘지 않은가 봐.”
“아니요, 저도 특별히 시간을 내서 온 것이랍니다.”
“굳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듯한데.”
“뛰어오느라 다리가 아파서요. 여기 앉을게요.”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테이시의 단호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페르미아는 굳건히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에시엘과 테이시의 사이, 샌드위치가 담겨 있던 통을 거침없이 밀어 내고 말이다.
“조금 좁지만, 괜찮아요!”
에시엘과는 극명하게 등을 돌려 앉은 자세에서도 그녀의 의사는 분명히 드러났다. 무릎을 끌어안아 턱을 괸 채 테이시만 바라보는 모습에 그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여기 있어 봤자 시간 낭비야.”
“테이시 님! 왜 매번 얘랑 같이 있어요?”
“후…….”
테이시의 말은 무시한 채 제 할 말만을 잇는 페르미아의 의도는 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벅이는 태도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환대 없이도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는 에시엘을 유심히 살피다가 두 사람을 빠르게 흘겼다. 이내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며 뱉는 말에는 어딘가 이상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는 미심쩍음이 있었다.
“자꾸 이상한데…….”
반면 테이시에게는 페르미아의 그러한 낌새까지 알아챌 만큼 여유로운 마음이 없었다. 에시엘과 함께 있던 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직 제 감정과 에시엘만 신경이 쓰였기에 페르미아가 가지 않는다면 먼저 자리를 뜰 의향이 있었다.
“에시엘. 이만 들어갈까.”
“그, 그럴까?”
망설임 없이 일어서는 테이시를 따라 에시엘이 엉거주춤 뒤를 쫓았다. 홀로 남은 페르미아를 슬쩍 바라봤지만 무섭게 노려보는 시선이 따라와 금방 고개를 돌렸다.
“저 왔는데 어디 가세요!”
페르미아는 멀어지는 테이시의 등에 대고 외쳤다.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어쨌든 테이시에게 눈도장을 찍겠다는 목표는 달성했으니 구태여 뒤를 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머지않아 뒤뜰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는 그녀의 고개가 또다시 기울어졌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