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1화 (1/100)

1화

북귀(北鬼)는 저주받아 물을 마시지 못하니

다동(茶童)아, 다비(茶婢)야, 생명수를 부어라

네가 부은 생명수에 저주 씻겨 간단다

***

“나의 뜻은 전과 같다.”

왕, 이선의 한마디에 묵직했던 공기가 천추전 바닥으로 침전하였다.

겨울바람은 굳게 잠긴 문에 가로막혀 들어오지도 못하건만. 대신들의 얼굴은 전보다 더 차디차게 굳어졌다.

이선은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타협의 여지조차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선략장군(宣略將軍) 서결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서결이란 이름에 대신들이 극렬한 반감을 드러내었다.

“전하, 서결 장군은 도성에 들이기에 위험한 자이옵니다.”

“서결 장군은 성정이 잔악무도하고 인과 예를 멀리하는 짐승 같은 자라 하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무예밖에 없는 자이옵니다. 지금처럼 북방에만 두어 오랑캐를 막게 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입에서 절박한 간청이 터져 나왔다.

그중 영의정, 남준백이 서늘한 눈매를 들어 올리며 말하였다.

“아비의 일을 잊지 않았을 자이옵니다.”

“…….”

“지난 10여 년간 속에 어떤 것을 품어왔을지 모를 자를, 어찌 도성으로 들이신단 말씀이옵니까?”

준백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저 낮고 낮은 음성으로, 결코 잊지 못할 사실 하나를 들추었을 뿐이었다.

‘그날’의 일을.

과연 그 말에 동요하는 이가 한둘이 아닌지라.

겁에 질린 대신들은 그에 더욱 열을 올리며 저마다 말을 더했다.

“그만!”

하나 이번만큼은 이선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없는 죄를 짊어지겠다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북방을 지켜온 자다. 이쯤 하였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오나 전하…….”

“그대들이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 하나 나는!”

“…….”

“그 긴 시간 동안 북방에서 충심을 다해 국경을 지킨 서결 장군의 공로 또한, 헤아릴 것이다.”

대신들은 아무런 반론도 꺼내지 못하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자신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만 탓이었다.

이선이 단단한 음성으로 결론을 내렸다.

“서결 장군을 한양으로 불러들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결국 거역할 수 없는 어명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맞은편에 위치한 이름도 없는 설원.

온갖 잡풀이 많아 치원(?原)이라고도 불리는 산기슭 초입엔 ‘심(沁) 다점’이라 불리는 작은 찻잎 가게가 있었다.

인가와는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이지만, 품질 좋은 차(茶)를 취급해 단골들만 겨우겨우 찾아오는 곳이었다.

하나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비단 차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서 오세요, 심 다점입니다!”

바로 이곳의 주인, 다니올라가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주션, 즉 여진족에 속하는 그녀는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는 동지섣달의 밤하늘을 잘라 늘어트린 듯하였고, 맑고 투명한 피부는 함박눈을 차곡차곡 채워 넣은 듯 희고 고왔다.

숯으로 얇게 그린 듯한 선명한 눈썹 아래엔 까맣고 총기 어린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으며, 곧고 앙증맞게 솟은 콧대 아래엔 눈 속에서 매화가 핀 듯 통통한 입술이 피어 있었다.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곱고도 아기자기한 얼굴.

작고 아담한 몸까지 더해, 마치 앙증맞은 방울꽃이 인간으로 환생하였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니올라의 장점은 미색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조선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조선말이 아주 유창했던 것이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지난주에 명에서 황차와 녹차를 많이 들였고, 오늘 아침엔 보이차가 좋은 게 들어왔어요.”

“니 다시 한번 말해보라.”

“차요? 황차, 녹차, 그리고 보이차요.”

“이야, 니 참 조선말 잘한다야. 어째 도이(刀伊 여진족) 사람이 말씨는 한양 말씨라야?”

“그르게 말이여. 생긴 것도 그라고, 말하는 것도 보믄 딱 조선 사람이랑께.”

또박또박한 발음은 물론이요, 어색함이라곤 일절 없는 말씨와 억양이 누가 보아도 조선 사람 같았다.

전부 그녀를 입히고 먹인 왕 노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이방 나라의 언어는 물론이고 명나라 말과 조선말까지 두루 능숙했으니.

덕분에 어떤 손님도 어렵지 않게 차를 사갈 수 있었다.

“야무지기는 또 얼마나 야무져.”

게다가 퉁명스럽던 왕 노인과 달리 다니올라는 모든 손님에게 친절하고 싹싹했다.

왕 노인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야무진 성격과 후한 인심 덕분에 다행히 단골을 잃지 않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여린 심성과 어려 보이는 외모 탓에 이따금 얕보일 때가 있달까.

그래도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금방 털고 다시 웃곤 하였다.

주어진 운명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다니올라의 신조였다.

“그라게 우덜 같은 조선인들은 다니올라라 안 허구 단이라 부르잖여, 단이.”

다니올라 역시 왕 노인이 지어준 이름보다 단이라 불리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한평생 심 다점에서 살아왔는데도 여진이나 명의 말보다 조선말이 더 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단이야, 나는 대현사에서 나온 떡차 열 근만 다오.”

“내는 보이차 편차로 스무 편.”

“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니올라는 바쁘게 다점 안을 돌아다니며 손님을 응대하였다.

종일 정신없이 손님을 응대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베르칸, 저녁 먹자.”

“예, 누님.”

베르칸은 왕 노인 때부터 허드렛일을 도와주던 청년이었다.

손님을 상대하다보면 언제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대충 끼니를 때워야 했다.

“다니올라 누나, 저 왔어요!”

막 저녁 식사를 마쳤을 무렵.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껑충 심 다점 안으로 들어왔다.

심 다점의 최연소 단골손님인 일란이었다.

“일란, 오늘도 차 사러 왔어?”

“네! 항상 사던 걸로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줄게.”

일란은 익숙하게 아무 곳에나 털썩 앉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글쎄, 어제는 너무 심심해서 소 한 마리를 데리고 나갔는데, 돌아오니까 어머니가 엄청 화내시는 거 있죠?”

“또 말씀 안 드리고 그냥 나갔구나?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놀라시지.”

“심부름도 맨날 나만 시키잖아요. 동생은 집에만 있고.”

“네 동생은 많이 어리잖아. 네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냥 아프다 하고 확 누워버릴까 봐요.”

그 말에 다니올라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일란, 너 그렇게 아주머니 속 썩이면 북방 귀신이 잡아간다?”

북방 귀신이란 말에 불퉁하던 일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부……북방 귀신이요?”

“그래. 북방 귀신.”

북방 귀신은 조선의 북방 경계선을 지키는 서결 장군의 별명이었다.

그는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이방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여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서결이 유명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오래 전 끔찍한 저주에 걸려 물 대신 짙고 독한 차만 마시게 되었단다.

그런데 성격이 워낙 잔악무도하여, 차 시중을 드는 다동이랍시고 아이들을 데려가서는 잡아먹거나 끔찍하게 학대를 한다는 것이다.

어찌나 소문이 흉흉한지, 이곳에도 북방 귀신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뭐, 덕분에 일란 같은 말썽꾸러기를 다루기 쉬워졌지만.’다니올라는 마지막까지 일란을 겁주며 차 봉투와 함께 돌려보냈다.

손을 흔들어주던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보았다.

청량한 하늘 서편에서 주황빛 저녁놀이 은은하게 번지고, 그 아래 하얗게 펼쳐진 설원이 눈부실 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아, 평화롭다…….”

다니올라는 하루 중 이때가 가장 좋았다.

고요히 저물어가는 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세상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무사히 잘 보냈어요, 왕 할아버지.”

친손녀도 아닌 저를 먹이고 키운 왕 노인이 숨을 거둔 지도 두 해.

누군가 다점 앞에 버리고 간 업둥이를 금이야 옥이야 키운 것도 은혜라.

그의 뒤를 이어 열심으로 심 다점을 운영하고 있는 다니올라의 소원은 줄곧 하나였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것.

그렇게 무난하게 생을 보내다 조용히 눈을 감는 것.

그것이 제게 남은 운명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오늘도 고생했어. 푹 쉬어.”

베르칸도 집으로 돌아가고, 다점 문을 닫은 다니올라는 다락으로 올라가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어제와 같은 소원을 빌었다.

‘내일도 오늘만 같게 해주세요.’어두운 밤. 북두칠성 끄트머리에 있는 별 하나가 반짝, 크게 빛을 내었다.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커다란 막사 안으로 철갑을 두른 부장(副長)이 들어갔다.

“장군, 채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부장, 진위의 말에 서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로 벼린 듯 예리한 눈매 속, 얼음보다 차가운 눈동자에 진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북방 귀신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눈빛.

원래도 서늘했던 그것은 오늘따라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갑게 보였다.

아마도 한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리라.

진위는 결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출발하심이 좋겠습니다.”

“……그래.”

낮은 중저음과 함께 결이 몸을 일으켰다.

거구인 진위로도 모자라 그보다 키가 더 큰 결까지 일어나니, 넓었던 막사 안이 순식간에 비좁게 느껴졌다.

결은 걸음을 옮겨 막사 밖으로 나왔다.

결의 뒤를 이어 여연을 맡을 장수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위로 촘촘히 박힌 새벽별이 그의 귀향을 기념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한양……. 한양이라.’그러나 별을 바라보는 결의 얼굴은 오히려 어둡기만 하였다.

한양을 떠나 이곳 북방 여연으로 오던 어린 소년을 아직도 잊지 못한 탓이었다.

“장군.”

생각에 잠겨 있던 결을 진위가 한 번 더 불렀다.

파도처럼 밀려들던 수만 가지의 감정과 생각들을 모두 지워낸 결의 얼굴이 다시 설원처럼 차갑게 변했다.

“출발하지.”

선두의 군사들이 화려한 깃발을 하늘 높이 들었다.

웅장한 행군에 나팔 소리 없이도 땅이 울리는 듯하였고, 산새들은 힘찬 날갯짓으로 그들을 배웅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장군, 장군!”

급박한 목소리에 결이 말을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체탐자, 즉 여진족 정찰을 위해 보냈던 군사 하나가 급박하게 말을 몰며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오랑캐들이, 허억, 오랑캐들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장수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본디 여연은 압록과 맞닿아 있어 여진족의 출몰이 잦은 곳이었다.

설마하니 오늘 같은 날까지 일을 벌일 줄이야.

“규모는.”

“대략 30에서 50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방향은 북서 방향으로, 이전에 주로 이용하던 길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습니다.”

수가 적고 이동 경로가 다른 걸 보니 아무래도 일개 도적떼 같았다.

체탐자가 발견한 뒤 바로 왔다면, 지금쯤 그들도 압록에 거의 다다랐을 터.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처리하고 간다.”

“예!”

겨우 도적떼를 잡는데 수백의 군사를 대동할 필요는 없었다.

결은 진위를 비롯한 체탐자 열 명을 골랐다.

여진족을 정탐하고 무찌르기 위해 꾸려진 특수 군사들인 만큼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이들이었다.

“이랴!”

그 또한 함께 말머리를 돌린 것은, 한양으로부터 잠시나마 더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

새벽같이 눈을 뜬 다니올라는 부랴부랴 다점 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석 달 전 명나라로 갔던 대규모의 상단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돌아오는 길에 분명 몇몇은 차를 사러 심 다점에 들를 터이니,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선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으, 오늘따라 더 추운 것 같네.”

곳곳에 촛불을 밝힌 다니올라는 옷깃을 여미며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다점을 정리하고 남아 있는 재고를 확인하여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손길이 무척 빠르고 정확했다.

어느새 송골하게 맺힌 땀을 훔치며 잠시 숨을 돌리던 그때.

“응? 벌써 상단이 돌아오나?”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다니올라는 청각을 곤두세웠다.

제법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명나라에 갔던 상단이 오고 있나 보다.

“참 부지런하기도 하네. 이제 막 동이 텄는데.”

하긴, 저리 근면하니 그토록 큰 상단이 된 것이겠지.

다니올라는 새삼 근면 성실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손님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심 다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어서 오세요, 심 다점입니…….”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다니올라가 서서히 말꼬리를 흐렸다.

다점으로 들어온 이들의 행색이 이상한 까닭이었다.

“뭐야. 계집 하나뿐이네?”

험상궂은 얼굴과 손에 든 무시무시한 막칼은 그들이 도적들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무리 중 하나가 비릿하게 웃으며 다니올라를 향해 다가왔다.

“나……나가세요. 오늘 장사 안 해요.”

다니올라는 뒷걸음질을 치다 얼른 차칼을 들어 사내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손가락 길이의 차칼이 팔뚝만 한 막칼을 든 사내에게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무리는 다니올라의 형편없는 반항에 킬킬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압록을 건너기 전에 잠깐 재미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다, 다가오지 말아요. 저리 가라고! 꺄악!”

사내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녀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마는 걸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으윽!”

“악!”

갑자기 다점 밖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니올라를 짓누르던 사내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밖에 무슨 일, 윽……!”

갑자기 몸을 활처럼 휜 사내가 그대로 다니올라의 손을 놓았다.

눈을 떴을 땐 사내가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잔뜩 겁을 먹은 다니올라가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문 너머에서 수십 명이 뒤엉켜 칼부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무하는 비명과 피 흘리며 쓰러지는 도적들.

그 아비규환의 가운데, 한 사내가 활을 들고 서 있었다.

8척은 훌쩍 넘어 보이는 키와 온몸을 단단하게 두른 은색의 철갑.

그리고 등 뒤로 보이는 검붉은 산호색의 장검.

‘저 사람은…….’

다니올라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그 순간 이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던 사내가 팔을 내렸다.

두꺼운 활대가 내려가며 가려져 있던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

그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그의 눈이었다.

한겨울보다 더 차가워 보이는 눈.

얼어붙은 호수에 깊이 박힌 얼음송곳보다 더 날카로운, 눈.

얼음을 뭉치고 뭉쳐 마침내 빛조차 드나들지 못하게 된다면 딱 저런 색이 될까.

날렵한 눈매 속 시리게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눈빛에 다니올라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사내의 정체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주받은 북방 귀신.

이방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부 죽여 버린다는 소문 속의 그.

‘서결 장군…….’

바로 그가, 이곳 심 다점으로 왔다.

그녀의 평화로웠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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