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쪼르륵.
기울어진 병에서 맑고 투명한 물이 계곡처럼 흘러내렸다.
단이는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가려 결의 시야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오래도록 끓인 찻물을 차부에 붓자, 바닥에 깔려 있던 갈린 차 가루와 향료가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굳이 향이 진한 차에 또 한 번 향료를 넣는 것은 아주 조금의 물 내음까지도 지워버리기 위함이었다.
모두 보선 어멈에게 호되게 혼나면서까지 종일 배운 것이었다.
‘무릇 행다란 다신(茶神)을 건강하게 담는 일이니, 차가 우러나는 시간에도 가만히 넋을 놓으면 안 되고 정성을 다해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단이는 보선 어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차가 잘 우러나길 진심으로 빌었다.
마침내 단이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전날보다 훨씬 더 색과 향이 짙은 차가 찻잔에 담겼다.
물의 향취라곤 조금도 없이 오로지 찻잎의 짙은 성질만 담은 차였다.
찻잔을 든 단이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혀가 텁텁해질 만큼의 떫은맛과 가슴을 찌르는 듯한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드시면 속이 더 상하실 수도 있는데…….’
걱정 어린 눈으로 찻잔을 보던 단이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결의 앞에 놓았다.
“…….”
결은 단이가 배움대로 내린 차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하루뿐이긴 해도 보선 어멈에게 혹독하게 배워 우린 첫 차라.
단이는 긴장 어린 눈빛으로 결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이 물의 기운을 느끼지 않게 하면서도 독한 차에 속이 상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인 차라, 그의 감상이 못내 궁금했다.
천천히 첫 잔을 비운 결이 잔을 내려놓았다.
단이가 빈 찻잔에 다시 새 차를 따르자 그는 다시금 천천히, 그러나 지체하지 않고 차를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석 잔의 차를 마시고 나서야 결이 잔을 물렸다.
하지만 차를 다 마시고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터라.
단이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음다가 끝났음에도 나가지 않는 단이에 결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어찌 그리 있느냐.”
그 묵직한 한마디에 단이의 눈꺼풀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술을 옴짝거렸다.
“그것이, 차가 어떠셨는지 여쭙고 싶어서…….”
결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이제껏 어떤 다동이나 다비도 차 맛이 어땠느냐 물은 적이 없던 까닭이다.
처음엔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적응이 된 후에도 그저 할 일만 마치고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저 아이는 어찌 차 맛을 묻는 것인가.
‘차에 뭔가를 한 건가.’
확실히 첫날 내린 차보다는 그의 입맛에 맞도록 우려낸 차였다.
하지만 그뿐. 이전의 차들과 특별히 다른 점은 찾아낼 수 없었다.
굳이 뽑자면, 무작정 떫고 독하기만 하던 차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는 정도.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이냐.”
“그것이…….”
결국 대놓고 속뜻을 물으니, 단이는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물었다.
“향은 어떠셨는지, 맛은 어떠셨는지, 나리의 입맛에는 맞으셨는지…… 그런 것들이 알고 싶습니다.”
그 물음에 결의 눈빛이 한층 더 묘하게 변했다.
차의 맛과 향이 어땠느냐니.
참으로…… 속 편한 소리가 아닌가.
“나에게 차는 맛과 향 따위를 즐기고자 마시는 게 아니다.”
냉랭한 목소리가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단이가 사뭇 놀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기라도 했다는 듯.
결은 그 기대를 무참히 짓밟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저 마셔야 하기 때문에 마시는 것뿐이지.”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물을 그는 가까이할 수조차 없어서.
이것조차 없으면 살 수가 없어서.
살고 싶지 않아도, 아직은 죽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이 독하디 독한 차를 흘려보내 구차한 목숨이나마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차의 맛이 어떤들, 향이 어떤들 무에 중요할까.
전부 흙탕물과 다를 바 없는데.
“소, 송구하옵니다. 그저 나리께 조금이라도 더 좋은 차를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쓸데없는 생각이다.”
단이는 가슴 속에 쿵, 하고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 같았다.
떨리는 시선으로 결을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열심히 해보려던 것이 부정을 당하고 내팽개쳐진 기분.
“그저 내가 마실 수 있는 차를 끓여 내게 올리는 것.”
“…….”
“네가 할 일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무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그나마 닿아 있던 결의 시선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이만 나가 보거라.”
“……예, 나리.”
다구들을 챙긴 단이는 꾸벅 허리를 숙이곤 결의 방을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시린 바람이 그 사이로 들락거리며 속을 아리게 만들었다.
‘열심히 하려던 게…… 잘못한 건가.’
시무룩해진 눈썹이 푹 가라앉았다.
단이는 다신당에 물건들을 정리해둔 뒤 방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아도 축 처진 마음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을까.’
까짓것, 그냥 해달란 대로 대충대충 해서 줘!
아마도 이리 말씀하셨겠지.
귀찮은 건 딱 질색하셨으니까.
왕 노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라 힘없는 실소가 번졌다.
문득 단이의 눈에 대나무 통이 들어왔다.
엄마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물건.
얼굴도, 이름도, 심지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엄마였다.
그럼에도 가족의 체취가 묻은 하나뿐인 물건이라, 단이는 이것을 늘 애지중지하곤 하였다.
지독했던 추위와 배고픔에 와앙 울던 자신을 심 다점 앞에 두고 가던, 엄마의 마지막 기억과 함께.
“엄마.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었을까요?”
대나무 통이 말을 할 리도 없건만.
단이는 두 손으로 통을 감싸 쥔 채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건넸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고민하는 날이 올 줄이야.
곱씹어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하나였다.
‘나리께선 쓸데없는 생각이라 하셨지만…… 그래도 아무렇게나 차를 우리고 싶진 않아.’
결은 쓸데없다, 즐기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하였지만 그도 사람이지 않은가.
독하고 쓴 것보다는 부드럽고 단 것이 더 입에 맞을 터.
‘물을 마실 수 없어 대신 마시는 차라면, 그만큼 물보다 더 좋아야지.’
단이는 콧바람을 흥, 내뿜으며 서운했던 마음을 억지로 밀어냈다.
주어진 운명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결의 다비가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에게 더 좋은 차를 올리는 것은 그녀의 최선이었다.
그러니 알아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까지 사라진 건 아니니까.
‘나리께서 뭐라 하시든 더 열심히 배울 거야.’
그래서 꼭 알려드리고 싶었다.
자꾸만 생각이 나서 찾게 되는 차의 맛을.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 좋아하여 찾게 되는 것을.
그리고, 그를 위하려는 한 사람의 마음을.
***
아직 동조차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일어났느냐.”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단이는 꿈결을 헤집는 엄한 목소리에 끔뻑끔뻑 실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아니면 꿈이라도 꿨나.
분명 보선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냐.”
헉!
또 한 번 들린 보선 어멈의 목소리에 단이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일어났습니다!”
“여태 뭐 하고 있는 게야. 얼른 준비해서 나오지 않고.”
“예, 예에!”
단이는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에 바짝 힘을 주곤 헐레벌떡 옷을 갈아입었다.
새벽에 중요한 일이 있으니,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밤이라도 새우라며 보선 어멈이 전날 단단히 일렀거늘.
밤사이 결의 다비로서 어떻게 더 열심히 해야 좋을까를 고민하다 그만 깜빡 잠에 들어버렸던 것이다.
황급히 옷을 갈아입은 단이는 벌컥 문을 열었다가 헉, 또 한 번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호롱불 때문에 보선 어멈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흔들린 까닭이었다.
제 발이 저린 탓에 더 무섭게 보인 것도 있었다.
“왜 그리 서 있는 게냐.”
단이는 얼른 잠기운을 몰아내곤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보선 아주머니.”
“인사는 되었으니 얼른 따라 오거라. 지체할 시간 없으니.”
“네엡.”
단이는 총총거리며 얼른 신을 신고 보선 어멈의 뒤를 따랐다.
흐릿한 반달과 별만 은근한 빛을 흩뿌리는 어두운 밤.
안개가 짙어 한밤중보다 더 은밀하고 야심한 시각이었다.
‘대체 무슨 중한 일이기에 이런 새벽에 하는 것일까?’처음 얘기를 듣자마자 무슨 일이냐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와서 도우란 말뿐이었다.
정식 다비가 되면 그녀가 책임져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서.
단이는 그저 차와 관련된 일이겠거니,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선 어멈이 든 호롱불에 의지해 걷기를 한참.
이윽고 단이가 도착한 곳은 집터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한 목조 건물 앞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커다란 광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또 다른 다옥인가?’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마침내 문이 열리더니, 뜨끈한 열기가 차가워진 얼굴에 훅 하고 끼쳐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단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켜놓은 초가 안을 환히 밝혔고, 사른 향은 엷고도 질긴 연기를 피워 올려 공간을 채웠다.
거기에 안개처럼 자욱한 수증기, 큰 광주리에 담긴 각종 약재와 찻잎들, 곡물 가루, 수건으로 보이는 면포.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욕조까지.
얼핏 봐도 너덧 명의 사람은 너끈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욕조는 나무에 옻칠을 한 듯 광택이 나고 있었다.
뜨거운 수증기가 바로 저곳에서 넘쳐흐르고 있었으니, 이곳은 다름 아닌 정방이라.
“저기 있는 것들을 욕조 옆으로 옮기고 주변을 정리하거라.”
“아, 네!”
넋 놓고 호화로운 정방을 바라보던 단이는 보선 어멈의 지시에 얼른 걸음을 옮겼다.
벌써 몇몇의 종들이 먼저 와서 정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단이는 눈치껏 그들에게 손을 보태며 물건 옮기기와 청소를 도왔다.
마지막엔 커다란 천 주머니 안에 온갖 약재와 만든 지 오래되어 보이는 찻잎을 한가득 쏟아부었다.
뜨거운 물에 잠긴 차와 약재는 빠르게 짙은 빛깔을 풀어냈다.
수증기와 함께 퍼지는 깊은 향취에 정신까지 몽롱할 정도였다.
새벽부터 뭔 일을 하나 했더니. 목욕 때문에 이리 부산을 떨었나 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단이는 조심스럽게 보선 어멈에게 물었다.
“저희, 단체로 목욕이라도 하는 것이어요?”
“이건 우리가 쓸 목욕물이 아니다.”
“그럼…….”
그럼 누가 쓰시어요, 하고 물어보려던 말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호화스러운 정방을 쓸 수 있는 사람.
이 많은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사람.
이 집의 주인.
“서결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그 순간, 하얗고 긴 도포를 걸쳐 입은 결이 정방 안으로 들어왔다.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과 흰 도포 자락이 어둠과 함께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도포 안엔 속적삼과 속고의만 입고 있어 단단한 육체가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단이는 다른 이들처럼 얼른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최대한 숙인 시야 너머로 결의 발과 도포 자락이 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곧이어 침묵으로 고요해진 공간에 사락사락하는 천 소리가 들렸다.
툭, 떨어진 도포와 속적삼의 소리가 청각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단이는 그제야 이곳에 자신이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결의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한 것이라는 걸.
“따라 오너라.”
낮은 목소리로 말한 보선 어멈이 앞장서 결에게 다가갔다.
단이는 여전히 뒷목이 빳빳하게 당길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선 보선 어멈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아…….”
욕조에 들어간 결의 몸은 반 이상 짙은 빛깔의 물에 잠겨 허리춤의 속고의만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체는 온전한 나체의 상태였다.
팔을 벌려도 다 안지 못할 것 같은 넓은 어깨와 가뭄 난 땅처럼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
근육으로 꽉 짜여 핏줄이 선명한 팔뚝까지.
섬세하고도 선 굵게 갈라진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은 스치는 시선에도 제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놀란 단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머릿속엔 결의 몸이 그림처럼 남은 뒤라.
온몸의 피가 발바닥으로 쑥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확 몰려들었다.
거기에 더운 열기까지 더해지니, 이제는 어지럽다 못해 혼이 쏙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눈앞이 일렁이는 가운데 결의 잔상만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열이 몰린 곳은 비단 얼굴만이 아니었으니.
‘나 어떡해…….’
터질 듯 세차게 뛰는 심장이 단이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