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제가 제대로 온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감.”
“…….”
“북귀를 죽이고 싶다면, 이곳으로 오면 된다던데.”
준백은 시끄러워진 머릿속을 잠시 잠재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모습을 비추니, 한 손에 비단으로 싸인 커다란 함을 든 성조가 여유로운 자태로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일어났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사뭇 위험하게 보였다.
머릿속에서 사람이 튀어나갔는가.
아니면 하늘이 내 편을 들어주려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아프게 만들던 놈이 제 발로 이리 찾아오니, 준백은 이것이 정녕 현실인가 잠시 얼떨떨하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 서결을 죽이고 싶다니.
‘진심인 것이냐, 아니면 감히 나를 상대로 속이려 드는 것이냐.’
아직은 놈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기에 섣불리 성조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몇 마디 나눠보면 알 수 있을까 싶어 손짓을 하였다.
“손님을 너무 세워두었군.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대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준백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성조는 손수 들고 온 함을 내보였다.
“빈손으로 오기는 무엇하여 약소하게나마 촌지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내가 한 좌랑에게 이걸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이유를 따지지 못할 만큼 변변찮은 것이니 손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조는 준백이 더 이상 물리지 못하도록 함을 그가 앉은 쪽으로 밀었다.
묵직하게 헛기침을 내뱉은 준백이 함을 받아 열어 보았다.
함 안에는 감히 ‘약소하다’란 표현이 무색할 만큼 귀한 백자가 담겨 있었다.
마치 진주알처럼 희고도 뽀얀 태가 손을 대면 그대로 미끄러질 것처럼 매끈하였다.
쉬이 구경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라.
백자가 눈에 찬 준백은 흡족한 눈빛으로 성조를 보았다.
곧 간단한 다과상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준백은 손수 성조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자네도 도성 안에서 차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지. 차에 대한 조예가 꽤 깊다고 들었네.”
“그저 떫은맛과 신맛을 구분하는 정도입니다.”
말갛게 차오르는 차를 보며 성조가 입가를 늘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 썩 보기에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준백은 그런 성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먼저 찻잔을 들었다.
무릇 사람이란 뜨거운 것을 대할 때 낯빛에 그 속이 드러나기 마련이거늘.
함께 잔을 든 성조는 뜨거운 김 앞에서도 표정에 작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역시나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속내를 알기 어려운 자였다.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준백은 곧바로 본론부터 들어가기로 하였다.
“아까 들어오면서 꽤 재미있는 말을 하던데.”
“북귀를 죽이고 싶어 왔다는 것 말씀이십니까.”
“둘이 죽고 못 사는 벗 사이인 줄로 알고 있는데.”
“그랬었죠. ……한때는.”
마디 사이에 놓인 간극에 어렴풋이 원망이 깃들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것인가.’준백은 내색하지 않으며 찻잔 너머로 성조의 표정을 살폈다.
찰나의 묘한 감정은 지운 뒤였으나, 그것이 남긴 흔적은 다갈색 눈동자에 여전히 남은 상태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잔을 내려놓은 성조는 그러한 눈빛으로 준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감을 돕고 싶습니다.”
“……나를 돕고 싶다라.”
“정확히는, 영상 대감의 눈엣가시를 제가 치워드리지요.”
눈엣가시. 준백에게 있어 그것만큼 서결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던 준백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가소롭군.’머리 잘 굴리는 놈이 어찌 저리 앞뒤 안 재고 무모하게 나오는가.
원하던 것이 넝쿨째로 이리 쉽게 굴러들어오니 도리어 경계가 되었다.
준백은 입술을 비틀며 물었다.
“내가 널 어찌 믿고?”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 목표는 그저 서결을 죽이는 것이니까요.”
“그럼 독자적으로 알아서 행동할 것이지, 굳이 나에게 와서 양쪽으로 의심을 사는 이유는 무엇이냐.”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큰 힘을 곁에 두고 움직이는 것이 저로서도 안전할 테지요.”
그 말에 준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감히 나를 방패로 삼아 움직이겠다?”
“방패가 되어 달라 청한다면, 기꺼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성조는 굽히는 법 없이 노골적으로 그 뜻을 밝혔다.
건방진 놈.
맹랑한 줄은 알았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저돌적으로 파고든다.
사람 속을 파악하기에 이골이 난 준백조차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것이 썩 나쁘진 않다만…….’적으로 돌렸을 때 가장 위험한 놈이었다.
그 말인즉 내 편으로 만들었을 땐 가장 효용 가치가 높은 놈이란 뜻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준백은 나직이 숨을 내쉬며 다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이 좋은 기회를 의심으로 날려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고민하던 준백이 전보다 경계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나 좀 들어 보고 싶군. 갑자기 이리 변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더냐. 뒤늦게 효심이랍시고 가문을 생각할 놈은 아닌 줄로 알고 있는데.”
어쭙잖은 핑계는 대지 말란 뜻이었다.
그러자 이때까지 내내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성조의 얼굴이 처음으로 차갑게 굳어졌다.
무언가를 참는 듯 숨을 고른 성조가 낮은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여인.”
“…….”
“제가 원하는 여인이 그놈의 손에 있습니다.”
순간 마주한 눈동자에 준백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것은 자신을 속이기 위해 단단히 꾸몄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저 눈빛만큼은 달랐다.
진심.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진심이었다.
‘그 계집종에게 마음을 빼앗긴 게로군.’결의 주위를 면밀히 살피던 준백이었다. 하여 그 세 사람이 얼마나 붙어 다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청춘 남녀의 관계란 마른 짚 앞의 불과도 같은 것.
의형제라 부르던 벗들의 치정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명석한 사내라 할지라도 연심에 눈이 가려지면 스스로 절벽까지 걸어가는 법이니.
마다할 이유 없이 당장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방심은 금물이었다.
덥석 저놈의 말을 듣기엔 서로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 너무도 다르니, 일단은 시일을 두고 지켜볼 수밖에.
깊이 고민하던 준백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놈을 받아주도록 하지.”
“기회를 주시는 것만으로 황송하옵니다, 대감.”
조금 위험한 결정이긴 하나, 곁에 가까이 두고 본다면 놈이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쉬울 터이니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국 이렇게 혼자가 되는구나, 서결.’준백은 빈 성조의 찻잔에 새 차를 따라주며 얇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넘칠 듯 채워진 잔은 곧 그의 욕심을 의미하니.
“한배를 타게 된 것을 환영하네.”
“영광입니다, 대감.”
성조는 그 차를 남김없이 모조리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독과 같은 뜨거운 것이 그의 오장으로 스며들었다.
***
겨울이 성큼 다가온 탓인지 하루해가 무척이나 짧아졌다.
벌써부터 주홍빛으로 물드는 하늘이 단이의 동그란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할 일은 대부분 마쳐 이제 결의 퇴청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제 올해도 얼마 안 남았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평온이 계속되었으면 하였건만.
지금은 이 고요함이 꼭 폭풍전야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겨울과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나 또다시 겨울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의미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자꾸만 가슴을 건드리는 까닭이었다.
‘남준백…… 그 사람이 계속 나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겠지.’지금까지 결과 자신에게 일어났던 나쁜 일들이 전부 준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쯤은 단이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는 것은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심지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았으니.
부디 해가 넘어가기 전에 결을 괴롭히는 일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성조 나리께서 나리 곁에 계시잖아.’비록 요 근래엔 얼굴도 비추지 않고 결 또한 그를 찾지 말라 하였으나, 단이는 그것 역시 다른 사정이 있어서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성조만큼은 끝까지 우리 편에 있을 것이라고.
모두가 남준백의 눈치를 보며 떠나갈 때, 그만은 마지막까지 결과 자신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
그렇게 막연하고도 깊은 믿음을 되새겼다.
가는 길이 달라졌다는 결의 말은 애써 기억 저편에 묻어둔 채.
“아, 나리다.”
저 멀리 보이는 결의 모습에 단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였다.
소란스러운 생각은 잠시 뒤로하고 단이는 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 집으로 가는 것이어요?”
“잠시 병조에 보고할 것이 있어 들렀다 가려 한다.”
“네, 나리. 그럼 저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단이는 결을 따라 함께 훈련원을 나섰다.
“금방 돌아올 것이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예, 나리.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시어요.”
병조 근처에 말을 매어둔 결은 걱정이 되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 이내 병조 안으로 들어갔다.
단이는 흑마 옆에 얌전히 선 채 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관원들도 모두 퇴청을 하는지 육조거리에 색색의 관복과 말들이 지나다녔다.
행여 저들 가운데 준백의 사람이 있을까.
흑마 곁에 바짝 붙어 선 단이는 공연히 눈가에 힘을 주며 주위를 경계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결이 돌아올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던 그때였다.
“어, 저기 성조 나리 아니신가?”
저 멀리 성조가 병조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말에 올라탄 그는 평소와 같은 실없는 웃음을 보이며 다른 관료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얼굴에 반가움이 앞선 단이는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조 나…….”
그런데 막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한 좌랑.”
그녀보다 먼저 성조를 부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준백이었다.
준백 무리의 등장에 단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고서 흑마 뒤에 숨었다.
어째서인지 성조는 다가오는 준백을 보고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다는 듯 전보다 더 입가를 늘인 채 말에서까지 내려 깊이 허리를 숙였다.
준백 역시 말에서 직접 내려 성조에게 웃으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그 옆엔 성조의 아버지인 정회도 함께였다.
그저 예의만 차린다고 보기엔 서로가 지나치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마치 같은 무리의 사람을 챙기는 것처럼.
‘성조 나리께서 저 사람을 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듣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제법 있는 데다 거리가 멀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단이는 차마 성조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들을 계속 지켜보기만 하였다.
준백이 어깨를 두드리며 무어라 말하자 성조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에 올랐다.
그들은 곧 단이가 있는 방향으로 말 머리를 틀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는 터라.
단이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흑마의 고삐만 꽉 쥔 채 고개를 돌린 순간.
“……자네를 여기서 다 만나는군, 서결 장군.”
지척에서 들린 준백의 목소리에 다시 앞을 보니, 그녀의 앞을 커다란 등이 막아서고 있었다.
“먼저 가십시오.”
결은 굳이 준백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를 비켜섰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단이를 지키고 있었다.
결의 뒷모습을 보던 단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성조를 보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리 마주쳤는데도 저리 한없이 무심한 표정이실까.
당혹감도, 죄책감도, 그 흔한 반가움도 하나 없이 어찌 저리 무감한 눈빛이실까.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 무감한 눈은 아니었다.
원망. 혹은 안타까움.
그도 아니면…… 서러움.
그는 한동안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단이와 결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인사 한마디 없이, 그렇게 준백의 뒤를 따라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단이는 가슴에 무거운 바위 하나가 떨어진 듯한 기분에 결국 성조를 붙잡지 못했다.
왜, 대체 왜.
묻고 싶었으나 결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럴 수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체념한 눈빛이었기에.
성조를 놓아버린 눈빛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