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81화 (81/100)

81화

집으로 돌아와서도 단이는 쉬이 결에게 성조에 대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감했던 성조의 눈빛이, 준백을 따라 뒤돌아서는 그 뒷모습이 잊히질 않은 까닭이었다.

‘나리께선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걸까…….’

그래서 더 이상 그를 찾지 말라고 했던 걸까.

떠나가는 성조를 보던 결은 분명 모든 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성조 나리께서…….’

생각할수록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걸 처음 알게 되었을 결의 심정 또한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단이는 찻상을 챙겨 다신당을 나섰다.

방을 둘러싼 중문을 넘어서니 결이 마당에서 홀로 검술을 연습하고 있는 게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맹렬한 검날의 울음이 초겨울 밤의 한기까지 베어버리는 듯하였다.

그만큼 결의 속이 타고 있다는 뜻인 것만 같아 단이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몸이 완전히 지칠 때까지 검을 휘두를 기세라.

단이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나리.”

“…….”

“나리, 차를 드실 시간이어요.”

한 번 더 큰 목소리로 그를 부르니, 그제야 결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까지 단이가 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듯하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는지 얼굴과 옷이 죄 땀에 젖어 있었다.

밤공기가 제법 사나워 이대로 있다간 고뿔에 걸리기 쉬울 것 같았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 계시어요, 나리. 보선 아주머니께 일러서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 말씀드리고 올게요.”

“……고맙다.”

결은 찻상을 대신 받아들고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보선 어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따듯하게 데운 물로 수건을 적셔 준비한 단이가 도로 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결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단이는 따듯하게 적신 수건으로 손수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수건이 지나간 자리 아래, 굳게 감은 눈꺼풀마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우선 차부터 드시어요. 목욕 준비가 되면 보선 아주머니께서 알려 주신다 하시었으니 그때 나가시면 될 것이어요.”

“……번거롭게 하여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시어요. 이것이 제 일인 것을요.”

단이는 부러 어수선한 기색을 감추며 웃어 보이곤 차를 우리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주홍빛의 감국차가 진하게 찻잔에 담겼다.

머릿속이 어수선하여 그런지, 결은 차를 비우는 시간 또한 평소보다 현저히 느렸다.

단이는 그의 속도에 맞춰 차가 식었다 싶으면 다시 솔방울로 피운 불에 차를 데웠다.

이윽고 석 잔의 차를 비운 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잠깐의 침묵 사이, 결의 안색을 살피던 단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조 나리께서…… 정말로 저희를 떠나신 것이어요?”

결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침묵으로 간극을 두었다.

성조가 연을 끊어 달라 하였을 때, 막연히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일 것이라 예상하고는 있었다.

하나 그것이 기실 준백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의심 많고 경계심 짙은 준백을 어찌 파고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오늘 본 모습으로는 준백 역시 성조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웬만한 참모들보다 머리가 좋은 데다 다방면으로 인맥이 상당한 녀석이니 준백에겐 누구보다 필요한 인재였을 터.

무엇보다 성조는 자신을 해치는 데 가장 큰 벽이었으니, 관계가 깨어졌다는 사실에 가장 흡족해했을 것이다.

‘남준백이 어디까지 성조를 믿느냐에 따라 일이 달라지겠지만.’

지금으로선 준백이 성조를 의심 없이 받아주길 바라는 모순을 부릴 수밖에.

결은 낮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다고 봐야겠지.”

단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봐왔기에 성조의 변심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저 1년 남짓 함께하였던 자신 또한 이러할진대, 한평생을 그와 의형제처럼 지냈다던 결은 오죽할까.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리기가 힘들어 단이는 위로처럼 결의 어깨를 안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나리의 벗이시잖아요. 나리께서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잘 아시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성조 나리께서 그 사람 편에 서실 수가 있단 말이에요…….”

이루 말할 수 없는 먹먹함에 단이는 목이 꽉 엉기고 말았다.

자신보다 더 황망해하는 단이를 결은 가만히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다.”

“……네? 그래서라니요?”

결은 전보다 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나를 위해서 일부러 그자의 밑에 들어간 것이야. 나 때문에.”

그 말에 단이는 더욱 놀란 빛을 보였다.

그제야 가는 길이 다르다 하였던 결의 말뜻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쪽은 대면하여 앞에서 검을 맞대고, 한쪽은 그 뒤에서 웃으며 검을 겨눈다.

말하자면 성조는 지금 구밀복검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단이는 다행이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성조 나리께서 그 사람 몰래 나리를 돕고 계시는 것이네요? 참으로 다행이어요! 전 정말로 성조 나리께서 나리를 배신하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리 생각하는 대로만 된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전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쓸쓸하게 흩어졌다.

혹여 다른 문제가 더 있는 건가, 물어보려던 찰나.

“도련님, 목욕물 준비되었습니다.”

때마침 보선 어멈이 찾아와 단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목욕할 땐 다른 이들도 함께 있을 것이기에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지금으로선 성조가 준백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라는 수밖에.

단이는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결과 함께 정방으로 향하였다.

하나 단이가 알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성조가 연을 끊어달라고 하던 그날 밤, 결에게 하였던 마지막 말.

‘감히 장군 하나 몰아내려 한 것이 밝혀진들 저들이 큰 벌을 받겠는가? 아니면 십수 년 전의 모함이 지금 밝혀진들 저들이 큰 벌을 받겠는가?’

‘우리에겐 명백한 증거가 있다.’

‘그깟 회합록 역시 피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피할 수 있는 성긴 그물일 뿐일세.’

‘……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고?’

‘내가 꾸미는 것이 아닐세. 저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중인 것이지.’

그때 성조가 보인 미소의 뜻은 확실하였다.

‘그 구덩이 속에서 내가 자네에게 확실한 길을 열어주겠네.’

‘…….’

‘감히 저들이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히 말일세.’

성조는 여전히 그들의 편임과 동시에,

‘그러니 지금부터 자네는 나 또한 믿지 말게. 자넨 앞으로 나와도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야. 나 또한 자네와 정말 끝을 낼 각오로 전념할 것일세.’

‘…….’

‘그래야 최후의 순간에, 자네가 영상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

신명나는 가야금 소리가 별빛을 흔들고, 기생들의 노랫가락 사이로 대신들의 웃음소리가 추임새처럼 어우러졌다.

학인 듯 물결인 듯 부드러운 춤사위를 선보이는 기생들의 몸짓에 모두가 시간을 잊고 홀린 듯 바라보기도 하였다.

모임을 주최한 준백은 그런 대신들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옆으로 옮겨가던 시선이 이윽고 성조에게 가닿았다.

성조 역시 다른 대신들과 어울려 기생들의 공연을 즐기고 음식과 술을 취하고 있었다.

고작 며칠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성조는 가히 놀라울 만큼 이 무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대개 조정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늙은 대신들 사이에서 성조는 시야를 틔게 하는 새로운 바람이었고, 동시에 나태한 이들을 자극하는 힘찬 미꾸라지였다.

그는 과감하면서도 적당한 선을 알았으며, 또한 즉흥적인 것 같으면서도 계산이 빨라 매사에 철저하였다.

늙은 대신들 사이에서 젊은 피의 기운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경계하려 하여도 준백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한 인재였다.

‘젊은 놈이라 그런가. 즐기는 태가 확실히 남다르군.’

또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세간의 소문처럼 철없는 망나니라.

정회는 체면치레를 하느라 그런 아들을 만류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앞뒤 재지 않는 성조의 무모함이 오히려 칙칙했던 대신들의 분위기를 한껏 풀어주고 있어 더욱 마음에 드는 준백이었다.

‘아비가 아들만 못하다.’

준백은 비틀어진 입꼬리를 잔 뒤에 감춰 술과 함께 삼키곤 이만 기생들을 물렸다.

그러곤 무리를 대동하여 자신의 사랑으로 향하였다.

청지기를 시켜 주위로 아무도 못 오게 단단히 이른 준백은 성조가 마지막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사랑 안은 따듯한 훈기로 가득 차 있었다.

흥을 돋우던 풍악이 사라지고 공간이 바뀌자 부유하는 공기마저 묵직하게 변하였다.

마치 이전과 전혀 다른 모임이 되었다는 듯.

앞에 앉은 이들을 차례로 바라보던 준백이 이윽고 성조를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우리 회합에 새로운 인재가 들어온 지 벌써 달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간 변변찮은 환영회 한 번 열지 못한 것이 내 마음에 쓰였는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두 모여 서로 얼굴을 익히니 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군요.”

준백의 말에 성조는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대신들과 목례를 나누었다.

다른 대신들 역시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 성조에게 모두 마음이 열린 상태였다.

처음엔 저렇게 어리고 능글맞은 놈을 어찌 믿느냐며 대놓고 경계를 하던 이조차 지금은 누구보다 성조를 아끼며 반진반농으로 호형을 제안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 가운데 한때 혼사가 흐지부지되었던 병판이 가장 큰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 역시 성조의 큰 재능이라면 재능이었으니.

준백은 요즘 부쩍 더할 나위 없이 성조가 눈에 찼다.

“우리 회합이 결성된 지도 어언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새삼 지난 세월을 가늠케 하는 준백의 언사에 대신들이 저마다 감회 깊은 표정을 지었다.

조선의 앞날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결성된 이 회합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리는 나라가 외부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초야에 숨은 사대부들까지 결집하여 뜻을 모았고, 또 종묘사직의 안정을 위하여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균형을 잡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잡음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준백은 꿋꿋이 회합을 이끌어 나갔다.

앞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꺾어버렸다.

필요하다면 손에 피를 묻히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나라의 안정과 사대부들의 집결.

그것이 이 회합의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었다.

“그런 우리가,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하였던 일을 이제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장내를 휘감은 공기가 묵직하게 경직되었다.

그 가운데 준백이 말하는 바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지 못하는 성조만 잠자코 흐름을 살필 뿐이었다.

대부분 그저 긴장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정회만은 이상하게 미간을 구긴 채 화를 삭이는 듯한 낯빛을 보였다.

‘아버지께서 어찌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가.’이유를 알 수 없어 성조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였다.

준백은 그런 두 부자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는 이미 뿌리부터 서서히 썩어, 언제 밑동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썩은 뿌리가 땅까지 오염시켜 전부 못 쓰게 만드느니, 땅을 갈아엎어 뿌리를 들어내고 새싹을 틔우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준백의 말이 이어질수록 성조의 얼굴 근육이 점점 굳어져갔다.

썩은 뿌리, 위태로운 지경, 땅을…… 갈아엎는다.

그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우린 새로운 조선을 만들 것입니다.”

역모.

지금 남준백은 역모를 일으키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회합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지는 오래되었는지 모두가 수긍하는 뜻이었다.

하나 정회만큼은 마지막까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회합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준백은 그런 정회의 뒤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성조가 아무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붙었다.

“좌찬 대감.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분에 찬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던 정회가 준백의 목소리에 홱 발길을 돌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회는 한껏 억누른, 그러나 터져 나오는 분을 채 삭일 수 없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얘기가 틀리지 않습니까!”

“무슨 얘기?”

“내 아들 앞에서 그 일은 꺼내지 않기로 분명 약조하였는데!”

준백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지금 알게 되나, 나중 가서야 알게 되나. 어차피 실패하면 역적의 가문으로 삼대가 멸하고 성공하면 공신이 되는 것은 변치 않거늘. 어찌 그리 한 치 앞만 보는 것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덜 여문 놈입니다. 이런 일에 끼어들 만한 놈이 아니란 말입니다!”

“들이고 말고는 내가 판단합니다.”

“내 자식을 가지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순간,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정회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준백이 정회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

“나는 선을 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좌찬. 지금 아주 위험했어요.”

충격이 컸는지 정회는 쉬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막혔던 숨만 내뱉었다.

준백은 다시 뒷짐을 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정은 내가 합니다.”

“…….”

“당신이 아니라.”

그러곤 그대로 뒤돌아서 사랑으로 돌아갔다.

준백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벽 뒤, 성조가 두 주먹을 말아 쥐고 필사적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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