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결국 단이와 결은 해가 중천으로 넘어갈 때쯤에야 박 노인의 술도가를 찾을 수 있었다.
결의 손을 꼭 붙잡고 산 중턱까지 올라온 단이는 낮은 사립문 너머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사람을 불렀다.
“성니임, 저희 왔어요.”
“에구머니나! 단이 벌써 왔어? 다들 얼른 정리해, 얼른!”
그러자 술도가 마당 한구석에서 납매주 병을 옮기고 있던 대모, 춘석네가 호들갑을 떨며 팔을 내저었다.
춘석네는 단이가 이곳 술도가에서 충선에게 차를 배우는 동안 그녀를 살뜰히 챙기는 아낙이었다.
말수가 지나치게 많고 오지랖이 넓긴 하여도 무척이나 정이 많아, 며칠 사이 성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더랬다.
그녀의 말에 곁에 있던 도가꾼들이 서둘러 맑은 물처럼 보이는 것을 죄 숨겨 놓았다.
그러곤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으며 부산스럽게 두 사람을 맞이하였다.
“들어오셔요, 나리. 아이구,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네. 오는데 힘들진 않으셨어요? 에휴, 이놈의 술도가가 워낙에 산 중턱 애매한 곳에 있어서 오기가 힘든데, 영감님께서 공연히 또 이곳까지 부르셔 가지곤…….”
“시끄럽다. 손님을 언제까지 밖에 세워둘 셈이냐?”
한참 쫑알거리던 춘석네가 충선의 등장에 합 입을 다물었다.
입술에도 자아가 있는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주책없이 수다를 떨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어서 들어오셔요.”
민망함에 홍홍 웃음을 흘린 춘석네는 얼른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방 안에 앉아 있으니, 곧 춘석네가 따듯하게 데운 온주 석 잔을 들고 왔다.
찰랑거리는 주홍빛 온주 위로 하얀 김이 옅게 피어올랐다.
“이게 작년 겨울에 황매화로 빚은 납매주인데, 올해 꼭 알맞게 익었어요. 겨울에 몸 데우는 데는 이만한 게 없으니까 쭉 들이켜세요.”
그러곤 슬그머니 궁둥이를 붙이고 앉으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충선은 어림도 없다는 듯 문 쪽으로 눈짓을 하였다.
“넌 이만 나가서 쌀 씻어 놓고 있거라.”
“벌써 씻어 놓아요? 아이 참, 지금 물 부어 놓으면 다 얼어붙을 판이더구먼…….”
“얼른 안 나가?!”
“아이고. 가요, 가. 영감님 호통은.”
“으이구, 저 저 저…….”
아까부터 호기심 많은 눈으로 결과 단이를 보던 춘석네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춘석네가 문을 닫자 방 안에는 고요가 맴돌았다.
쯧쯧쯧, 혀를 차던 충선이 눈짓으로 두 사람에게 잔을 권하였다.
“일단 들거라. 조동아리는 저래도 술 빚는 솜씨만큼은 쓸 만한 대모니.”
“감사합니다.”
단이는 곁눈질로 결이 먼저 잔을 드는 것을 보고서 조심스럽게 잔 안에 든 술을 마셔보았다.
제법 달큼하고도 향긋한 내음이 혀를 맴돌다 깔끔하게 목 안으로 넘어갔다.
차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기는 가향주에 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술을 바라보았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호감에 충선은 속으로 뿌듯해하며 잔을 꺾었다.
“일전에 부탁드렸던 것을 찾으시었다 들었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결의 말에 단이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나리께서 주파 할아버지에게 부탁드릴 것이 무어 있던가.
의아함에 앞을 바라보니, 충선이 그녀를 마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찾았지. 탈 없이 가장 무난한 것으로.”
충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러면서도 신기할 만큼 어울리는 따스한 미소였다.
감조차 잡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던 그때.
술도가를 찾은 또 다른 손님이 있는 모양인지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왔나 보군. 시간 맞춰 오는 것을 보니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뜻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충선이 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따라 단이도 엉거주춤 일어나니, 곧 열린 문 너머로 두 사람이 등장했다.
“이제야 겨우 만나네.”
한 사내가 시원스럽게 입가를 늘이며 단이를 보았다.
중년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풍채가 좋았는데, 묘하게 결과 닮은 얼굴이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결의 외숙부이자 십수 년간 다른 관직은 모두 마다하고 변방의 병마절도사로 지냈다던 민지청이라는 것을.
단이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서 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결 나리의 다비, 단이라고 하여요.”
“그래. 얘기는 많이 들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지청이 눈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결과는 완연히 다른 얼굴이었으나 묘하게 닮은 듯한 눈매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옆에 있는 선비는 그저 묵묵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와 얘기 나누지.”
“예, 어르신.”
곧 다섯 사람이 충선의 방에 모두 둘러앉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감조차 잡지 못한 단이는 잠자코 결의 곁에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러니 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 자신이란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자, 이분이 앞으로 너의 아버지 되실 분이다.”
“……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평생 아버지란 존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거늘.
난데없이 제 앞에 나타난 아버지에 단이는 당황한 시선을 둘 곳도 찾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번갈아 보기만 하였다.
“아버지, 라니…….”
“너를 양반 집안에 입적시킬 것이란 뜻이다.”
기적 같은 이야기에 단이는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선비, 홍 씨는 함경 지방의 관리로서 민지청과 가까운 사이라 하였다.
권문세가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그 땅에서 오래 터를 잡고 살아온 지체 좋은 가문이라.
결과 단이의 사정을 알게 된 민지청이 두 사람의 안정적인 혼례를 위하여, 아들만 다섯이라던 홍 씨에게 단이를 호적에 올려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때마침 홍 씨는 소문난 주당이요, 전국의 가향주 주조법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하여 충선과 모종의 흡족한 거래로 흔쾌히 입양 딸을 들이겠노라 약조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늘의 때를 맞아 잘 맞물려 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너는 조선 땅에 사는 엄연한 양갓집 규수가 되겠구나.”
충선이 말로써 한 번 더 사실을 확인 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옆에 앉은 결을 쳐다보니, 그는 모든 게 사실이라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저 첩 자리만이라도 받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감히 몸종의 신분으로서 그 이상을 바라면 욕심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제겐 감지덕지한 일이라고.
한데 결은 단순히 첩 자리를 넘어 그녀를 당당히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준 것이다.
그녀가 더 이상 신분의 굴레에 속박되어 스스로를 낮게 보지 않도록 말이다.
거기다 제아무리 핏줄이 조선의 것이라 한들 오랜 세월 이방인으로 살아왔으니.
결은 그녀에게 비로소 조선이란 땅에 내릴 수 있는 온전한 뿌리를 선물한 셈이었다.
단이는 북받치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은 손수 눈물을 닦아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새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홍단이다.”
“홍단이…….”
단이는 입속에서 새로운 성이 붙은 자신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홍단이. 홍단이.
부를수록 마치 원래 제 것인 양 정겨워 괜스레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다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하여요…….”
큰 눈망울에 그렁그렁 감격의 눈물을 매달고서 웃는 단이의 모습을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도 단이의 새 이름을 예쁘게 꾸며주려는 듯 소담한 함박눈을 천천히 내려주었다.
***
단이가 양반가에 입적되어 홍 씨라는 성씨를 얻고 난 후.
두 사람은 정해진 수순대로 혼례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결은 형식적으로나마 사주단자를 써서 홍 씨 댁으로 보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데다 양딸과 함께 산 적은 없어도 친정으로서의 도리는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홍 씨는 생각지도 못하게 자개장을 혼수로 마련하여 사주 보자기와 사주 옷감을 함께 보내었다.
안에는 홍 씨가 손수 정갈하게 쓴 편지도 함께였는데,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함과 함께 행여 친정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부담 갖지 말고 연통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너는 우리에게 있어 귀한 고명딸아기다.
마지막 글귀가 얼마나 오래 단이를 울렸는지 홍 씨는 결코 알지 못하리라.
비슷한 시기에 온양행궁에 있는 선정으로부터도 그토록 그리던 연통이 날아왔다.
선정은 온양행궁으로 떠난 후부터 간간이 단이에게 서신을 보내왔다.
조금이나마 쌓여 있던 오해와 감정은 먹물 한 방울도 안 되는 글자 몇 마디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단이를 닮은 봄쯤에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선정은 예정했던 것보다 조금 더 늦게 돌아올 것 같다 하였다.
고즈넉한 주위 경관이 퍽 마음에 들어 조금 더 머물다 가고 싶은 까닭이었다.
정말 그 이유뿐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따금 한 번씩 흔들리는 필체가 단이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양가로의 입적과 결과의 혼인 소식을 전하였을 때 선정은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었다.
계획한 일정을 앞당겨서까지 혼례를 보고 싶다는 선정을 어찌 말려야 하나 고민도 하였더랬다.
선정은 아쉬운 대로 그녀만의 선물을 보내었다.
-모월 모시 유시에 운종가에 위치한 화전(?展)에서 원앙 그림을 받아 가거라. 그곳 화공에게 원앙 그림을 받으면 부부가 오래오래 잘 산다는 말이 있더구나. 지금 당장 네게 줄 수 있는 선물이 이것뿐이니, 사양치 말고 받길 바란다.
쌓인 의뢰가 넘쳐나 그림을 받으려면 족히 반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곳이라 하였다.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픈 선정의 마음이 잘 느껴져 단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의 선물을 받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선정이 일러준 날에 함께 화전을 찾았다.
둘러싼 담벼락부터 시작하여 처마에 올린 기왓장 하나까지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단이는 낮은 대문을 두드리며 조심히 사람을 청하였다.
“옹주 아기씨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그러자 곧 대문이 열리더니, 그 너머로 상당히 곱게 생긴 사내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웬만한 여인보다 더 고운 피부에 또렷하고 커다란 눈을 가진 사내는 두 눈을 깜빡이며 단이와 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곧 배시시 입가를 늘이며,
“흐응, 기운이 엄청 좋은 사람들이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혹 무당집을 잘못 찾아왔는가.
‘박수라기엔 입성이 평범한 선비의 것인데…….’살짝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니, 다행히 사내가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들어오시어…… 아니. 들어오십시오.”
그는 곧 가벼운 발걸음으로 빙글 돌아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갓 화공님, 옹주 아기씨께서 말씀하셨다던 손님 왔습니다!”
사내가 크게 외치는 소리에 곧 방 안에서 갓 화공이 나왔다.
소문대로 커다란 갓을 쓴 화공은 결과 단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노월아, 꽃님이한테 찻상 좀 준비해달라고 말해줄래?”
“네, 화공님!”
노월이라 불린 사내는 세상 천진난만하게 대답하고선 곧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곤 이내 찻상을 들고 도로 나타났다.
질 좋은 찻잎과 끓인 물, 그리고 간단한 다과가 그 위에 차려져 있었다.
“자, 손님께서 직접 우리시어요.”
혹 선정이 결의 상황을 언질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갓 화공은 아는 것이 없는지 당황한 눈치다.
“죄송합니다. 저 아이가 원래는 차를 우려서 드리는데……. 노월아, 얼른 차를 내려 오거라.”
“화공님, 이분들은 직접 차를 우려 드셔야 해요. 제가 드리면 안 된다니까요.”
노월은 새침하게 항변하고선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갓 화공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피자 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소. 나는 이 여인이 내린 차만 마실 수 있소.”
“예? 아…… 그래서 그랬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머쓱하게 웃은 갓 화공이 곧 작지 않은 크기의 종이를 펼쳤다.
“원앙 그림을 의뢰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맞아요. 한데 지금부터 그리시는 것이면, 언제쯤 완성이 될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드시는 동안에 완성해 드리겠습니다.”
혹 날림으로 그리는 것은 아닌가, 못 미더운 마음이 들기도 잠시.
눈앞에서 갓 화공의 붓놀림을 본 단이는 놀라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에 꽃가지를 뻗어 올리고 부드러운 냇가를 틔운 붓은 다정한 원앙 한 쌍을 그 가운데 새겨 넣었다.
밑선부터 색까지 무엇 하나 정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잠깐이나마 그의 실력을 의심하였던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획을 마친 갓 화공이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마치 세상이 창조되는 것을 눈으로 본 것 같은 기분에 단이는 자기도 모르게 와아, 감탄을 흘렸다.
과연 그림깨나 안다는 양반들에게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받는 화공이었다.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안료가 마르길 기다리던 갓 화공이 삿갓 아래 싱긋이 미소를 보이곤 그림을 말아 건네었다.
“두 분의 앞날이 다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혼례를 축하드립니다.”
그림 값은 이미 선정이 후하게 쳐준 뒤라.
두 사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든 채 화전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나섬과 동시에 한 키 큰 선비가 안으로 들어갔다.
“해란.”
선비의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단이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닫히는 대문 사이로 해맑게 웃는 갓 화공과 그녀를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선비가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느냐.”
결의 물음에 잠시 멈춰 섰던 단이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요. 저희도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날만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말에 결이 따스한 미소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럴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
세상 그 어떤 약조보다 견고하고도 믿음직한 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결이 내건 약조였으니.
단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리께서 그렇다 하시니, 그럴 것이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비단 보자기 속, 갓 화공의 그림이 따스한 빛을 반짝였다.
마치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