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른 아침부터 집안이 분주하였다.
종들은 마당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부부금슬과 다산, 장수와 건강 등을 뜻하는 여러 음식을 초례상에 올렸다.
본디 혼례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 치르는 것이 법도였으나, 단이의 양부모가 멀리 함경에 있는 데다 실상 호적만 가족이라.
하여 초행(初行) 등의 절차는 생략하고 모든 예식을 원래 둘이 살던 집에서 거하기로 하였다.
방 안에선 신랑과 신부의 치장이 한창이었다.
막상 혼례의 주인공인 단이는 설렘과 긴장을 다스리며 얌전히 있는데, 오히려 그 곁을 지키는 보선 어멈이 내내 눈물바람이었다.
입술연지 찍을 때에 옷고름으로 눈물 한 번 콕.
이마에 곤지 찍을 때에 또 옷고름으로 눈물 한 번 콕.
연지 곤지인 양 옷고름에 수놓는 반점에 단이가 결국 속상한 듯 눈썹 끝을 축 늘어뜨렸다.
“보선 아주머니, 저 혼례를 치러도 계속 여기서 아주머니와 살 것이어요. 제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우시어요.”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들어서 그렇지요. 정이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참으로 좋아했을 텐데…….”
정이라는 이름에 또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지, 보선 어멈이 숨을 길게 내쉬며 옷고름으로 두 눈을 꾹꾹 눌렀다.
그런 보선 어멈의 손을 꼭 잡은 단이는 부러 어린아이가 투정하듯 말하였다.
“아이참,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이제 주인아씨 되실 분께 어찌 함부로 말을 놓겠습니까.”
“혼례를 치러도 저는 계속 보선 아주머니께 차를 배울 것이어요.”
주파 할아버지는 너무 윽박지르시기만 하시거든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귓속말로 속삭인 단이가 배시시 웃었다.
“보선 아주머니께선 앞으로도 영원히 제 스승이십니다. 아무리 세상천지가 바뀌어도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 바로 보선 아주머니와 저의 관계일 겁니다.”
똑 부러지는 단이의 말에 보선 어멈이 못 말린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녀를 따라 입가를 늘인 단이가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보선 아주머니께선 제 이모와도 같으신 걸요. 이모가 어찌 조카에게 말을 높인답니까?”
그 말에 보선 어멈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
티 없이 맑았던 정이.
그 아이를 닮아 환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그녀의 딸, 단이.
세상 그 어떤 아이가 이처럼 사랑스럽고 또 고귀할 수 있을까.
눈가에 남은 눈물을 마저 닦은 보선 어멈은 마른 손으로 단이의 손을 맞잡았다.
두어 번 두드리는 손길에는 단이를 향한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말씀만이라도 그리해주시니 고맙네.”
“보선 아주머니.”
“……그래. 알았다. 나중에 웃전 호되게 혼낸다고 원망이나 하지 말거라.”
“절대로 안 합니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나누었다.
이윽고 혼례가 시작되었다.
활옷을 입은 단이는 보선 어멈과 다른 종의 도움으로 마당에 내려섰다.
이윽고 초례상 앞에 서서 힐긋 앞을 바라보니, 사모관대의 차림을 한 결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 단령을 입은 결은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완벽하였다.
이전과는 의미가 달라져서일까.
단령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결의 모습이 선계의 신선처럼 보였다.
옥안선풍이란 말이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마 보선 어멈이 앞으로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서서 세월아 네월아 멍하니 결의 모습만 보았을 것이다.
하나 상대의 모습에 정신을 빼앗긴 건 비단 단이뿐만이 아니었으니.
다홍색 비단 위로 모란과 연꽃을 두른 활옷을 입고, 족두리 아래 쪽진 머리를 한 단이의 모습에 결은 시간의 흐름도 잊고 그녀를 눈에 담았다.
특히 길게 늘어트리던 댕기머리를 틀어 올린 옥비녀는 새삼 단이를 원숙한 여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꿈이라면 깨지 말기를.
영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지언정 이 아름다움 속에 갇혀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스스로 돌이켜도 허무맹랑한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눈앞의 단이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절을 하고 술잔을 나누었다.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탄성의 크기는 두 사람이 느끼는 행복과 비례하였다.
본디 널리 나눔으로 덕을 행하였던 집이라.
결은 혼례 때에도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비한 음식을 보내 함께 복을 나누었다.
근래에 들어 가장 복스러운 잔치에, 너 나 할 것 없이 함께 즐거워하며 새신랑과 새신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하였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혼례가 끝이 난 후.
모두가 돌아간 밤.
신방에는 묘한 긴장감이 부유하고 있었다.
단이는 긴장 어린 숨을 조심조심 내쉬며 힐긋 앞을 보았다.
주안상을 가운데 둔 채 마주 앉은 결은 한없이 평온한 얼굴로 두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이전에 그가 마시던 술에 비해 색이 많이 옅은 술이었다.
단이와 꾸준히 과거를 마주하는 연습을 한 덕에, 이제는 어느 정도 맑은 술과 차를 마실 수 있게 된 결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신랑이 족두리를 벗겨줄 때까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터라.
치렁치렁한 활옷과 평소보다 꽉 조인 머리가 불편하고 어색하여 단이는 엉거주춤 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결의 정을 받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부부로서의 첫날밤’이라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온 까닭이었다.
“자, 받거라. 마시면 몸이 좀 따듯해질 것이다.”
이윽고 술을 채운 결이 단이에게 잔을 내밀었다.
추운 겨울에 종일 바깥에 서 있던 차라.
행여나 단이가 고뿔에라도 걸릴까 부러 따듯한 술을 주문하였던 결이었다.
휘적거리며 겨우 소매를 정리한 단이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첫 잔을 입안으로 흘려보내니, 술의 홧홧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어 잠시나마 긴장까지 녹여주었다.
그러나 한 잔의 술이란 그토록 아쉬운 것이었으니.
혀끝에서 빠르게 증발해버린 주정 뒤로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술 한 잔을 마시고 나선 결 또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앉은 상태에서 날을 꼬박 새울 기세라.
결국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나리……. 이제 족두리만이라도, 좀 풀어 주시어요.”
내내 술잔에 눈길을 두던 결이 고개를 들어 단이를 보았다.
그 역시 실은 긴장을 느끼고 있던 걸까.
아까는 몰랐는데, 새삼 마주한 눈동자에 평소와는 다른 팽팽한 것이 들어 있었다.
“나리.”
한데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그 기운은 사라지고, 곧 나른한 의문이 자리를 대신하였다.
“이제 나를 부르는 호칭은 그것이 아닐진대.”
아…….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에 단이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혼례를 올리고 나면 어엿한 부부가 되거늘.
막상 호칭 문제에서 이리 말문이 막힐 줄은 생각도 못 하였다.
하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나리라 불러왔던 단이였다.
갑자기 다른 호칭으로 부르려니 괜스레 가슴도 간질거리고 입안도 말라 입술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을 벌고자 단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선 족두리라도 좀 풀어 주시면…….”
가까이 다가온 결이 손을 뻗었다.
한데 당장 족두리를 벗겨줄 것만 같던 그는 손끝으로 톡 건드리기만 할 뿐, 되레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단이를 바라보았다.
“먼저 호칭을 바꾸면.”
족두리를 내려야 이 치렁치렁한 활옷을 벗을 테고, 그래야 몸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텐데.
그래야…… 이 밤도 온전히 보낼 수 있을 테고.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른 적나라하고도 솔직한 욕망에 단이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이대로 날을 샐 셈이냐.”
부끄러워하는 단이의 모습을 보며 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머릿속 생각이 고스란히 표정에 보여 놀리는 맛이 있었다.
성조가 그렇게나 단이를 놀렸던 이유를 초야에나 알게 된 신랑이었다.
붕어처럼 몇 번이고 입술을 뻐끔거리길 한참.
단이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결이 원하는 답을 내었다.
“……서방님.”
수줍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가슴을 많이 울리게 하였다.
결은 곧바로 약속을 지키는 대신 한 번 더 단이의 목소리를 청하였다.
“한 번만 다시 불러 보거라.”
“서방님.”
연달아 나온 부름은 전보다 더 자연스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한 번 입술에 붙이고 나니 그다음부턴 금세 적응이 된 터라.
부를 때마다 감동으로 물드는 결의 눈빛에 힘입어 단이는 귀여운 웃음을 더해 그를 불렀다.
“서방님. 우리 서방님.”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란 참으로 신이하지.
나리라 부를 땐 그 너머는 절대 볼 수 없는 거대한 태산처럼 느껴졌는데, 서방님이라 부르니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지켜주실 것처럼 든든하면서도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 든다.
동시에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견고한 믿음이 생긴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것과 같이, 이 사람 역시 나를 위하여 삶까지 내바칠 것이란 믿음.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를 사랑하여 줄 것이란 믿음.
“서방…….”
빠르게 족두리를 풀어낸 결이 곧바로 그 아기자기한 목소리를 한입에 삼켰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온기에 어깨를 움츠렸던 단이도 지그시 눈을 감고 부푼 감동을 가만히 머금었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결이 사뭇 열기가 감도는 눈으로 단이와 눈을 맞추었다.
“나도 너를 여보, 당신이라 부를까.”
듣는 것만으로도 귀에 꿀이 흐르는 듯 지독하게 달콤한 말이었다.
숨결과 함께 귓가를 간질이는 단어에 살포시 웃음을 흘린 단이는 잠깐의 고민 끝에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러면.”
“단이요.”
단이는 두 눈 가득 결의 얼굴을 담으며 행복한 미소를 전하였다.
“계속 단이라 불러주시어요. 저는 나리…… 아니. 서방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이 참으로 좋아요.”
단이라는 이름 속에 꾹꾹 눌러 담은 그의 향취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십분 이해한 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평생 단이로 살거라. 나는 단이를 사랑하는 서방으로 살 터이니.”
“이미 단이란 이름에, 서결이란 사내를 평생토록 사랑할 것이란 뜻이 있습니다.”
단이의 귀여운 해석에 결이 기분 좋게 웃었다.
“누가 그런 것을 정하였단 말이냐.”
“저와 서방님이 정하였습니다. 저희가 함께한 그 모든 시간들을 통해.”
주고받는 시선 속에 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짙은 감정들이 녹아들었다.
앞으로도 그들은 여러 시간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중엔 감주처럼 달콤한 시간도 있을 것이고, 짙게 우린 차처럼 떫은 시간도 있을 것이며, 또 어쩔 땐 소금물보다 더 짠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서로가 곁에 있다면 그 어떤 시간도 향긋한 차 한 잔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랑한다, 단이야.”
“저도 사랑해요, 서방님.”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그러나 그러기에 가장 숭고한 고백을 전하였다.
몇 번을 고백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마음이라.
그것은 말할수록 더욱 가슴에 고여 열기를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단이의 자그마한 발을 감싼 버선을 제일 먼저 벗겨낸 결이 촛불의 심지를 눌러 불을 껐다.
곧 짙은 향취와 뜨거운 열기가 향긋하게 두 사람을 에워쌌다.
동창에 스며든 부드러운 달빛에 원앙 그림도 밤새도록 고요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