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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97화 (97/100)

97화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의 오후.

결과 단이가 앉아 있는 방 안엔 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단이가 사뭇 결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되시었어요?”

“그래.”

“절대로 무리하시면 아니 되시어요. 아시었죠?”

“걱정 말거라.”

단이를 안심시킨 결이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 앞에 마주 앉은 단이 역시 긴장 어린 얼굴로 결을 보았다.

부유하는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가운데.

결이 앞으로 내민 손 위로 단이가 손바닥만 한 도자기 그릇을 건네주었다.

안에는 찰랑거리는 투명한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팔에 느껴지는 무게만으로도 내심 부담이 되는지 결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하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천천히 물그릇이 든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아주 느릿한 속도로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꼴깍.

크게 일렁이는 목울대 너머로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단이의 동그란 눈도 점점 더 커져갔다.

마침내 그릇이 얼굴을 덮을 때까지 팔을 올린 그가 뭉친 숨과 함께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릇 안에 가득 담겨 있던 물은 두어 방울의 흔적만 남긴 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결이 드디어 차가 아닌 맑고 투명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방님……!”

감격한 단이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결을 끌어안았다.

결이 투명한 물을 마셨다는 사실보다, 그가 비로소 자신의 아픈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아서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결 역시 단이를 단단히 안으며 이 순간을 깊이 가슴에 새겼다.

물을 마주할 때마다 억지로 참았던 이전과 달리 오늘은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다.

그저 차를 마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해갈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제나 입안을 떫게 만드는 쓴맛과 신경을 바짝 일으켜 세우는 짙은 향취 없이 한없이 부드러움만 느껴졌다.

마치 단이의 무한한 신뢰와 부담 없는 편안한 응원처럼.

단이가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지난 몇 개월간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한 결과였기에 더욱 값진 극복이었다.

“고맙다. 단이 네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야.”

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단이가 고개를 저었다.

“서방님께서 의지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신 덕분이어요.”

“네가 아니었다면 아예 시도할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다 네 덕이야.”

두 사람은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널찍한 등을 가만가만 다독이던 단이가 웃음기가 묻어나는 새침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시었으니, 이전처럼 제 차를 찾지 아니 하실 것이어요?”

단이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마주 본 결이 가당치 않다는 표정을 보였다.

“내게 다시가 정해져 있다 하여, 때가 아닌 시간에 갈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앞으로도 계속 제 차를 드실 것이어요?”

“당연한 말을.”

환하게 웃은 단이가 다시 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전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큰일이어요.”

“무엇이?”

“요 근래 향이 옅은 차만 내렸다고 그새 적응이 된 건지, 지난번 고뿔을 앓고 나서부터는 조금만 향이 짙어도 맡기가 힘드니 말이어요.”

“혹 고뿔이 다 낫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그건 아니어요. 열도 안 나고 으슬으슬 춥던 것도 나아졌는걸요.”

“그래도 혹여 모르니, 술도가 다녀오는 길에 약방에도 다시 들리자꾸나.”

단이는 가볍게 입가를 늘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즘 후각을 자극하는 건 다향뿐만이 아니었다.

어쩔 땐 가마솥에서 구수하게 피어오르는 밥 냄새에도 속이 울렁거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꽃샘추위에 고뿔이 단단히 걸려 약간의 체기가 남은 탓이렷다.

괜히 걱정만 끼칠까 염려하여 결에겐 말하지 않은 차였다.

‘뭐, 금방 괜찮아지겠지.’단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서 술도가에 갈 채비를 하였다.

모처럼 결이 등청하지 않고 쉬는 날이라.

두 사람은 함께 나란히 술도가로 향하였다.

도처에 핀 알록달록한 꽃과 부드러운 봄바람에 단이의 발걸음도 자연 가뿐해졌다.

꽃구경인 듯 산책인 듯 여유롭게 걸음을 놓으니 어느덧 술도가가 저 멀리 보였다.

두 사람을 발견한 춘석네가 어김없이 호들갑을 떨며 주위를 치우게 하였다.

“숙인(淑人)과 장군께서 오셨다! 얼른 물 치워, 얼른!”

그녀의 재촉에 떠밀려 한창 일하던 도가꾼들이 헐레벌떡 주위를 정리하였다.

이제 단이는 숙인(淑人)의 봉작까지 받은 어엿한 부인이었다.

하나 부르는 호칭만 달라졌을 뿐, 춘석네는 여전히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얼굴로 단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사립문 너머에서 본 두 사람이 서로 미소를 주고받았다.

단이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들을 말렸다.

“이제 물 안 치우셔도 돼요, 성님.”

“그럼 장군께서 못 들어오시잖아요. 오늘은 데려다만 주시고서 어디 또 가시는 건가?”

“아니요.”

단이는 싱긋 웃는 얼굴로 결을 바라보았다.

“서방님, 이제 물 봐도 아무렇지도 않으시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아니, 정말입니까?”

“네. 오늘 나오기 전엔 드시기까지 했는걸요.”

춘석네는 두 손으로 입까지 가리며 자신이 더 좋아했다.

“어머어머어머, 세상에! 그럼 장군께서 저주가 풀리신 겁니까? 웬일이야, 세상에!”

“여편네가 말 가릴 줄을 모르고. 저주란 말은 실례야!”

“뭐 어때서! 어쨌든 좋아지셨다는데! 진짜 잘되셨네요!”

남편인 도가꾼이 눈치를 주었지만, 춘석네가 순수하게 축하하는 마음이란 걸 알아서 결과 단이는 마주 웃어 주기만 하였다.

“거 시끄럽게 굴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여라. 금줄 쳐놓은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밖에 세워둘 셈이냐?”

언제 나온 것인지 충선이 지청구를 놓았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예나 지금이나 말하느라 정신 놓는 건 여전한 춘석네였다.

단이는 푸스스 기분 좋게 웃으며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차와 다구들을 접하고, 차의 종류마다 다른 덖는 법과 우리는 법을 배우는 동안 단이는 언제나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배움에 임하곤 하였다.

덕분에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이요, 청출어람이라.

과장 조금 더해서 이제는 어엿한 장인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솜씨였다.

충선은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내심 속으로 흐뭇해하였다.

저 손이면 술을 빚어도 참으로 좋겠구나 싶었다.

“너, 다음번에 올 땐 술 한 번 빚어보지 않겠느냐?”

“술이요?”

“그래. 차보다 조금 더 까다롭고 오래 걸리긴 해도, 그 정도 재주면 술도 금방 배울 것 같은데.”

“배울 수 있다면야 기꺼이 배우죠.”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춘석네가 눈을 반짝였다.

“어머, 숙인께서 술 배우신다면 내가 아주 두 손 두 발 다 걷어붙이고 도와드릴 수 있지!”

“네가 가르치냐? 내가 가르치는 거지.”

“에이, 영감님도. 그래도 기본적인 건 다 제 손을 거쳐야지요. 아! 이럴 게 아니라 오늘 맛이라도 미리 좀 보고 가요. 술이란 자고로 마시면서 배워야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훤한 대낮이건만.

춘석네는 작정하고 술판을 벌이려는지 푸짐하게 주안상을 차려왔다.

술은 물론이고 안주까지 구첩반상 못지않게 차려오니, 결국 어김없이 충선의 꾸지람이 떨어졌다.

“이것이 술도가 거덜 내려고 작정을 하였나. 뭘 이리 많이 꺼내왔어?”

“어떤 안주가 어떤 술에 궁합이 잘 맞나를 알아야 빚기도 잘 빚죠.”

“요것이 입만 살아서. 이거 다 너 먹으려고 가져온 거지?!”

“아이참, 영감님. 지금이 아낄 때입니까? 재주 좋은 제자를 들이려면 이 정도 투자는…….”

그런데 그때.

“욱…….”

갑자기 몸을 크게 들썩이며 입을 틀어막는 단이에 두 사람의 말다툼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단이는 억지로 헛구역질을 참으면서도 여전히 입을 막은 채 상에서 물러났다.

“저기…… 안주 중에 뭐가 하나 상한 것 같은데……. 이상한 냄새가 나요.”

“응? 냄새가 난다고요?”

단이의 말에 춘석네가 얼른 안주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육안으로나 냄새로나 특별히 이상한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단이는 마치 역한 냄새를 맡은 사람처럼 코와 입을 모두 막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충선이 조용히 결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함께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잇던 결이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단이를 보았다.

“그럼, 혹시…….”

“아는 의원을 알려줄 테니, 맥이라도 한번 짚어 보게.”

그리 말을 맺은 충선은 얼른 가보라는 듯 손짓하며 춘석네에게 일렀다.

“춘석네, 이거 다 치워라.”

“예?”

“단이 몸이 좀 안 좋은가 보다. 일찍 보내. 나도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그러곤 먼저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춘석네와 도가꾼들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결은 단이를 조심스럽게 부축하여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네. 나중에 다시 오지.”

“아…… 예, 예. 몸이 안 좋으면 얼른 들어가서 쉬어야지요.”

“죄송해요, 성님.”

“죄송할 게 무어 있습니까. 걱정 말고 조심해서 가세요. 푹 쉬시고!”

결과 함께 술도가를 나서는 단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춘석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

“태기가 느껴집니다.”

“……예? 지금 뭐가 있다고…….”

단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은 의원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말하였다.

“감축드립니다. 마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그 말에 단이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어쩐지 요 근래 몸이 무겁고 기운이 좋지 않더니.

그것이 다 아기가 들어서서 그런 모양이다.

너무 꿈만 같은 일이어서 그런 걸까.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 단이가 결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굳은 얼굴로 정면만 응시한 채 한 번 더 의원에게 물었다.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나리. 맥 또한 힘찬 것이, 안전하게 잘 들어선 듯합니다.”

혹 아기가 찾아온 것이 반갑지 아니 하신 걸까.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결의 옆얼굴에 단이가 불안한 마음으로 보기도 잠시.

“……서방님.”

이윽고 결의 붉어진 눈시울에 단이가 도리어 놀라 그를 불렀다.

결은 눈가에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눈꺼풀 아래 감추었으나, 긴 속눈썹이 젖어드는 것까지는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하여 그는 눈물을 숨기는 대신 단이의 어깨를 감싸 품에 안았다.

“고맙다, 단이야. 고맙다…….”

무언가 더 거창한 말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벅찬 마음이 머릿속까지 가득 채워 그저 고맙단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믿기지가 않아서.

나에게 또 한 명의 가족이 생긴다는 게 정말로 꿈만 같아서.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끈끈한 연결이 우리 사이에 생긴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아서.

하여 앞에 의원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체면도 뒤로하고서 단이를 꼭 끌어안았다.

의원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부끄러워하던 단이도 문이 닫히자 비로소 편히 결에게 기대었다.

“제가 더 감사하여요, 서방님.”

결이 없었다면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이리 멋지고 듬직한 지아비를 만나 한평생 굄을 받고, 또 이리 복된 아기까지 얻게 될 줄을.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한평생 같은 나날을 살다가 그저 그렇게 풀꽃처럼 사그라졌을 것이라.

결이 다시 물을 마시게 되었고 배 속에 아기까지 들었으니.

두 사람에겐 오늘이 어떤 날보다 감격스럽고 또 감사한 날이었다.

단이의 이마에 깊이 입을 맞춘 결이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너와 아기를 위하여 평생을 살 것이다. 세상 그 무엇도 감히 너와 우리 아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야.”

여전히 눈물에 젖은 그의 눈동자가 단이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물빛으로 빛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단이 역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환하게 웃었다.

“사랑한다, 단이야.”

“저도 사랑해요, 서방님.”

두 사람은 오래도록 고마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었다.

후에 보선 어멈에게 이를 알리니, 며칠 전 꿈에서 단이의 어머니인 정이가 커다란 백호랑이를 타고 나타나 그 호랑이를 단이에게 전해 달라며 보내줬다더라.

하여 배 속 아기의 태명은 백호가 되었다.

“무럭무럭 건강히 자라서 얼른 만나자, 백호야.”

“어머니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하게 조심해서 나오거라.”

아직 태도 안 난 배에 대고 말하니, 괜스레 배 속에서 작은 꼬물거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배시시 웃은 단이는 결의 품에 폭 안겨 행복한 기분을 마음껏 즐겼다.

더없이 행복으로 충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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