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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2)화 (2/109)

2화

“네가.”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공작이 말을 더듬거렸다.

“네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무엇이라고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면서.

내가 지난 3년간 지냈던 낡은 오두막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무에 배인 눅눅한 냄새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던 알리샤의 올리브색 눈동자까지.

“이리나, 공작저로 돌아가면 언제나 본인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해요.”

“상처받지 말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리안을 곁눈질하던 알리샤가 다시 말했다.

“공작가에 있는 그 누구도 믿지 말아요.”

나만큼, 아니, 나보다 공작가에 불신이 더 큰 게 알리샤였다.

끝까지 친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알리샤를 떠올렸다.

공작이 아무리 나를 다시 불렀다고 하더라도, 나를 딸로 공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에이프릴로서 살아간다고 해도, 혹은 에이프릴의 대역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이리나’라는 이름이 양지 위로 올라올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시간을 멈춘 것처럼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공작가의 서재에서 마치 오랜 시간 물속에 있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토해내듯 누군가 숨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조건은 천천히 생각해 보죠. 긴 시간도 아니고.”

“…….”

“고작 1년뿐이니까요.”

“정말로…… 괜찮으냐?”

물음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말만이라도 ‘괜찮다’라는 걸 듣고 싶었던 건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깔았다가, 날 보고 있는 알렉시스 공작을 응시했다.

여윈 모습에서 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준비부터 해주세요.”

어차피 예상했던 것이고, 이 집에 오려고 했던 이유가 명백했기에 받아들인 제안이었다.

아마 이들이 내 머릿속을 알았더라면 내게 이런 개 같은 제안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금도 말했다시피,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들어줄 수 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눈을 가볍게 휘었다.

나를 다시 부른 이유는 에이프릴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단순히 나를 내쫓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작가가 아버지와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되갚아주기 위해 다시 온 것이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 있다면 에이프릴 아가씨께서 불쾌해하지 않으실까요?”

“…….”

“아가씨께서는 제가 아가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주장하고 계시잖아요.”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지붕 밑에서 생활하는 건 무리이지 않나.

애초에 공작가에서 나를 쫓아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가짜 아가씨가 진짜 아가씨가 되고 싶어서 위해를 가하려 들었다고.

그렇기에 벌이라며 나를 아무도 오지 않는 별채에 가두어 생활하게 하기도 했었고.

“에이프릴은 현재 별장에서 지내는 중이다.”

알렉시스 공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년 동안은 별장에서 지내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다.”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고요?”

별장이니만큼 에이프릴이 그곳에서 지내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다만 궁금한 건 그 애가 왜 1년 동안 별장에서 지내냐는 점이었다.

“그 애한테, 아니, 에이프릴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저 말이 그저 단순한 휴가를 지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한동안 자숙하기 위해 보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물음에 대한 답이 빠르게 나오지 않는 걸 봐서는 대답을 해주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질문을 계속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질문을 바꾸는 게 나을 듯했다.

“그렇다면 이건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

“아가씨의 대역이 갑자기 필요하신 이유가 뭔가요?”

대답하기 위해서 입술을 달싹이던 알렉시스 공작이 다시금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이 역시 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에이프릴의 대역이 필요한 이유가 에이프릴이 1년간 별장에서 지내는 것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말을 해주기 싫은 것과, 해주지 못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일까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에이프릴과 페르포네 전하와의 약혼 때문에.”

한참 동안 망설이던 알렉시스 공작이 차분히 말했다.

“그래서 네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거다.”

하긴, 에이프릴이 황태자인 페르포네에게 첫눈에 반한 데다 어떻게서든 연을 맺고 싶어 하는 걸 공작가에서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별장에서 1년 동안 지낸다 하지만 어지간히 에이프릴을 위하는 모양새였다.

뭐, 에이프릴의 일 따윈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공작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리안을 곁눈질할 때, 공작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1년 동안은 나를 비롯한 집안의 사람들 모두가 너를 공녀로 대우할 것이다.”

공녀로 대우해 주겠다는 것도 날 위한 게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서였다.

공녀의 대역이 있다는 걸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이들이니까. 하지만 내게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정도라면 내 입장에서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이리나, 고맙고…… 미안하다.”

이리나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이 상황이 그저 우습다.

6년을 에이프릴로 살았고, 그렇게 간절해서 아버지 손에서 나를 앗아갔으면서도, 친딸인 에이프릴을 찾고 난 뒤로는 나를 부르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원래 지내던 집으로 쉽게 보내주지 않았던 것도, 에이프릴이 귀족들 사이에서 쉽게 녹아들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지.

차라리 이리나라는 원래 이름으로 불러달라 애원했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이들이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이리나라니.

다시 한번 대역이 되고 나서야 날 타인으로 인지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작게 숙이고는 서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지내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재 앞을 지키고 있던 집사장, 패트릭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내 앞을 걸어갔다.

홀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데, 알렉시스 공작이 주로 이용하던 서재 층은 그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단정하고 클래식한 분위기였다.

홀은 에이프릴의 취향이군.

걔가 그런 화려한 취향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에이프릴과 함께 지냈던 순간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갸름하게 떴다.

좀…… 말도 안 되는 비유이긴 하지만, 에이프릴을 공작가로 데리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에는 자매처럼 붙어서 지냈었다.

옷도 비슷하거나 아예 똑같은 걸 입었고, 가정교사를 통해 매너 공부를 할 때도, 티타임을 가질 때도 말이다.

친구들을 만날 때와 수면을 취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함께 공유했었다.

그랬기에 제법 잘 지내왔다는 생각도 했었고.

진짜 딸을 찾았지만, 나를 버리지 않고 에이프릴과 자매로 함께 가족으로 지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던 시기였다.

대우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던 시점은, 에이프릴이 완벽한 귀족 영애가 되었던 순간부터였다.

“이리나!”

상념을 깨뜨린 건 뒤에서 날 부르는 리안의 목소리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자, 다급한 얼굴의 리안 힐 라이즈가 날 향해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뛰는 법이 없던 리안의 모습은 낯설고 신선했다.

“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핏방울이 맺힐 것처럼 아랫입술을 꾹 무는 그에 조용히 되물었다.

“뭐가 이렇게 될 줄 모르셨다는 건가요?”

“난, 아버지가 너를 딸로 다시 데려오는 것이라…….”

답지 않게 순진한 발상을 하고 있는 리안에게 작은 웃음을 흘렸다.

공작가의 장남씩이나 되어서는 자기 좋을 대로 판단하는 게 웃기기 짝이 없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공작이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을 텐데.

도대체 무엇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복도의 커다란 창으로 강하게 내리쬐고 있는 태양이 그대로 들어왔다.

공작가를 떠났을 때는 비 오는 겨울이었는데, 공작가에 다시 돌아올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날씨였다.

날씨가 꼭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공작가로 돌아온 게 청량한 여름과 잘 어울리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1년간 공녀로 대우받으면 네 기분도 풀어질지 모르고.”

“…….”

“또 아버지도 네게 그만한 보상을 해줄 것이니. 너한테도 좋지 않겠느냐.”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가 매우 우스웠다. 날 버린 집안에서 날 대접하는 걸 과연 기쁘게 받아들일 이가 누가 있겠나.

“공작가에 많은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날 버렸다는 사실을 후회할 사람들도 아니고, 후회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을 것이고.

“그냥.”

한심하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오랜 시간 마차를 달려서 공작가로 온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승차감이 좋은 비싼 마차를 탔었지만, 리안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으니까.

“여기 있는 동안에 바라크 공자님이나 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날 발견하자마자 미친 개마냥 시끄럽게 왈왈 짖어댈 꼴이 뻔했던지라 더.

“부탁드리죠.”

더는 붙잡지 않는 리안을 뒤로한 채 다시 긴 복도를 걸었다. 슬쩍 뒤를 쳐다보자, 못 박힌 듯 동상처럼 멀거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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