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내가 지낼 방으로 가는 길은 해가 가장 잘 들어오는 남향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쪽은 역대 공작가의 자제들이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가장 높은 층은 하나뿐인 여식인 에이프릴이, 그 밑으로는 공작가의 차남이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계단을 밟고 올라가 3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공녀로 대우하겠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님이 와 닿았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그리고 복도를 장식하고 있는 화병과 꽃마저 전부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것들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누군가가 날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내 눈길이 화병에 있는 꽃에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집사가 헛기침을 큼큼, 하고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복도 역시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꽃과 그림으로 전부 꾸며두었습니다.”
“……잘도 기억하고 있었네.”
“예?”
“아무것도. 내 방은 어디지?”
“아, 이 방입니다.”
집사가 성큼 뛰어가서 가리킨 방은 에이프릴 힐 라이즈의 방이었다.
1년간 정말 이 집에 없는 건가?
황태자인 페르포네와 약혼을 한 마당이니만큼 더 의아했다.
에이프릴이 그 시간 동안 집에 없다고는 해도,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나를 친딸의 방으로 안내한 건지 그 속내를 모르겠다.
어쩌면, 공작과 에이프릴의 사이가 과거처럼 마냥 좋은 게 아닐지도 모르지.
의문만을 가득 품은 상태로 내가 쓸 방문을 세게 밀었다.
“……하.”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넓은 방 안의 가구들이 보였다.
세 사람이 누워도 거뜬할 정도인 커다란 침대와, 금으로 장식된 작은 책상과 더불어 그 위에 있는 작은 오르골까지.
뚜껑이 열린 오르골에서는 자장가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이프릴이 이 집에 들어오기 전 내가 사용했던 그 방을 그대로 재현한 방이었다.
그간 날 생각하고 그리워하기라도 했다는 듯,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방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에이프릴이 귀족 영애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 공작부인이 나를 다용도실에서 지내게 만든 이유가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방이 싫었다기보단, 그때 상황으로 깨닫게 되는 내 처지가 싫었을 뿐이지.
내가 이 집안의 굴러온 돌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존재가 될 거라는 걸 알려주는 경종이었으니까.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내가 에이프릴을 밀었다는 오해가 생기자마자 다른 별채에 가둬놓기도 했었다.
“아가씨께서 오실 거라고 리안 도련님과 공작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콕 짚어 널 위해서 준비했다는 말이 이렇게 역겹게 들릴 줄이야. 저 말에 고마워하고, 그간의 응어리를 풀기라도 바란다는 듯한 말로 들려왔다.
어둡고 습한 감정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혀 오던 감정이 다시 한번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 감정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무척이나.”
토가 나올 것 같은 역겨움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네. 방이 꼭…….”
열린 창문으로 선선하게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꼭? 내 뒷말을 조용히 따라 하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지난 시간을 되새김질한 게 마치 나뿐만은 아닌 것 같아서…….”
3년을 평민으로 살면서 귀족의 예법 같은 건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토악질이 나올 거 같은 이 감정을 눌러 삼키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무척이나 기쁘고, 또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그 한마디에 집사장인 패트릭이 조금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늙은 패트릭의 얼굴에서 다정함과 온화함이 물씬 느껴졌다.
공작가에서 직계 가족들을 제외하면 내가 가장 잘 따랐던 인물이기도 했다.
바라크가 내게 냉랭하게 굴 때마다 그를 저지해 주는데,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
어린 시절 내가 그를 할아버지 같다고 했을 때, 난처해하면서도 그래도 그리 말해주어 기쁘다고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너무 퇴색되어 버린 옛날 기억이지만.
“아가…….”
“왜 돌아오셨습니까?”
집사장이 내게 무어라 말하려다, 짐을 가져다주면서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오는 하녀장, 카나의 말에 멈칫했다.
굉장히 노골적인 데다 공격적인 질문이었던지라 내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실수라도 한 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자 패트릭이 카나를 퍽 엄한 눈빛으로 제지했다.
그 제지에도 카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였다.
리안이 날 데리고 오기 위해서 일주일이란 시간을 허비한 걸 보면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님을 알 텐데.
“아가씨, 카나의 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냐, 하녀장도 궁금하겠지.”
비단 카나만 궁금하겠나, 공작저에 있는 모든 사용인들이 궁금해할 것이다.
나를 부른 공작의 저의도, 그리고 내가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꼴을 겪고도 내가 돌아온 이유 말이야.”
최대한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카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곳에 욕심이란 건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공녀라는 자리도, 라이즈 공작가의 후광도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그게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궁금증이 아니었을 뿐이지 궁금했던 건 사실이었다.
굳었던 카나의 얼굴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이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돌아오셔도 얻을 수 있는 건 없으실 텐데요.”
“얻을 수 있는 게 왜 없겠어.”
카나가 계속 들고 있으려고 하던 내 가방을 대신 들고 가면서 빙긋 웃었다.
일순 카나의 손과 내 손이 겹쳐지자, 그녀가 크게 움찔했다.
“오랜만에 공작님도, 공자님들도, 그리고 그대들을 보게 되어서 좋은데.”
“진심이세요?”
“겸사겸사, 뭐로 보상해 주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에이프릴 아가씨의 대역으로 왔으니, 1년 동안은 에이프릴이라고 불러줘.”
살짝 미간만 찌푸리던 카나의 얼굴이 마지막 말과 동시에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카나가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무슨 말을 하려다가 몸을 팩 돌렸다. 내가 돌아온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나 보네.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지. 날 데리고 오라 시킨 게 공작이었으니까.
풀지 않은 가방을 침대 위로 툭 던지고는 흰 시트에 엉덩이를 붙였다.
리안을 제외하면 모두가 카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날 보고 있을 것이다.
사용인들 모두가 공작이 무슨 생각으로 날 데려왔는지, 그리고 대역을 시키는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그저 사용인이란 역할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패트릭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내는 또 어떨지 모르지.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차라리 카나처럼 노골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드러내는 게 훨 좋긴 했다.
아군과 적군을 편하게 가를 수 있는 상태가 될 테니까.
방에서 나가지 않는 패트릭을 곁눈질하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알겠지만, 굳이 날 싫어할 이유는 또 없지 않나?”
“예?”
“3년 전에 내가 에이프릴 아가씨를 계단에서 밀었고, 위협했다는 소문이 났지만, 아가씨가 공작가에 없는 상황이라면 굳이 내가 싫을 이유도 없을 것 같아서.”
뚜껑이 열려 돌아가는 오르골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어렸을 때는 마냥 듣기 좋은 자장가였는데, 지금은 그저 소음으로만 느껴졌다.
“대역은 일단 필요한 거니까.”
“아가씨를, 싫어한다고요?”
자기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패트릭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진리였다.
나는 이곳에 대역으로 돌아온 이였지만, 에이프릴은 공작가에서 애타게 찾아 헤매던 친딸이기도 했었고.
“하녀장만 해도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하니까.”
“아가씨, 카나는…….”
말을 마저 이으려고 하던 패트릭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외알 안경을 슬쩍 치켜올렸다.
이내 뻣뻣하게 서 있던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몸을 낮추어, 한쪽 무릎을 꿇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카나는 아가씨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
“아가씨가, 공녀님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마음도, 공작가를 향한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갑작스럽게 내침 당하셨으니 야속하고 미울 게 분명하겠죠.”
어깨가 일순 멈칫했다. 야속하고 미울 게 분명하다고? 내 감정을 고작 그런 가벼운 단어로 설명이 될까.
열세 살의 겨울, 공작가로 들어오기 전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널 공작가로 보내면, 거기서 내 치료비를 지급해 주기로 했다.”
“그러니 제발 공작가로 가다오. 나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애원하는 듯한 말도.
그 한마디 때문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던 공작가로 들어온 거였는데…….
하지만 공작가는 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약값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는 공작부인의 말을 순순히 믿었던 내가 너무 어리면서 동시에 멍청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걸까.
패트릭이 가지고 있는 단어의 세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공작가를 향하는 내 감정은 그 두 단어로 쉽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