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럼 왜 그 차남은……. 그럼, 앞으로 어쩌시려고요?”
질문을 다시 돌린 앨런에게 음, 하고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에이프릴의 다리를 고쳐줄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번을 기회로 에이프릴이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진짜지만 남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채로, 에이프릴을 비롯한 공작가에 배신감과 절망감만을 안겨줄 것이다.
한동안 진짜이면서 대역 뒤에 숨어 지내는 걸 보는 것도 재밌겠지.
그러기 위해선 에이프릴은 이 별장이 아닌 공작가에 있어야 했고, 지금 현재 공작가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아야만 했다.
아버지가 날 공작가로 보내려고 했을 때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우리 집이, 정확히는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가 평범한 제국민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골 마을이 아닌 산속 오두막에서 집을 짓고 살았던 것도, 한 번도 인적이 많은 곳에 내려가 살지 않았던 것도.
아버지가 지나칠 정도로 나약하고 유약했던 것도. 그래서 열세 살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가 통속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작위를 버리고 도망친 귀족인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이리나, 네가 더는 어리지 않으니까 말하마. 어쩌면 너도 눈치채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공작부인이 아버지 옆에 있던 나를 억지로 끌고 가려 했었다.
그녀는 홀에 걸려 있던 아름답고 고아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미친 여자였다.
“엄마랑 아빤 도망자야.”
알렉시스 공작과 똑같은 청회색의 눈동자에 미안함으로 눈물이 가득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나, 우린 사람들 앞에서 네가 우리 자식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였던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이었다.
“공작가로 가렴.”
“아버지.”
“널 공작가로 보내면, 거기서 내 치료비를 지급해 주기로 했다.”
“…….”
“그러니 제발 공작가로 가다오. 나를 위해서.”
하지만 아버지가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를 공작가로 보낸 건,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였으니까.
부모가 도망자라면 자식도 도망자일 수밖에 없었다. 떳떳하게 이리나 데빈이라는 이름도 꺼낼 수가 없겠지.
하지만 난 도망자여도 좋으니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었다.
산속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도 괜찮았으니까.
그런데도 공작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핏줄의 연은 끊어지는 게 아니니, 공작가에서 아버지의 치료비를 대준다면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저 하나 희생하면 많은 게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공작가에서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는 건 괜찮다.’라는 말도 했었으니까.
연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도 꼬박꼬박 오곤 했으니까.
“이리나.”
알리샤의 목소리가, 그리고 올리브색 눈동자에서 떨어지던 눈물이 생경하게 그려졌다.
“……공작가에선, 약속을 지킨 적 없어요.”
공작가에서 쫓겨났어도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공작부인을 통해 꾸준히 들어왔었고, 부고에 관한 건 듣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알리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했던 말은 절망 그 자체였다.
“이리나가 공작저로 간 지 몇 달 안 돼서 다니엘은 죽었어요.”
“공작가에서 약속했던 약값 같은 건 보내주지 않았어요.”
“공작부인이 찾아와서 다니엘한테, 자기 딸한테 친부는 필요 없다고 했어요. 걸리적거리기만 한다고.”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감았던 눈을 느리게 뜨자, 알리샤의 얼굴 대신 앨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긴.”
“……예?”
“돌려줘야지.”
공작가가 내게 주었던 만큼.
“공작가에서 받은 것들이 너무 과했거든.”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공녀가 낫지 않아야 날 계속해서 원할 테니까.”
“공작가가요? 아님, 공녀가요?”
눈치 빠른 물음이었다.
달리 대답하진 않았지만, 명민한 앨런은 눈치챘을 것이다. 본인의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둘 다’라는 것을.
앨런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나빠하거나 공작가의 위세 때문이라도 엮이고 싶지 않아 할 줄 알았는데, 앨런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날 물끄러미 보는 짙은 포도주빛 눈동자의 뜻을 읽을 수 없을 때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웃은 그가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아가씨?”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손등에 그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와주려고?”
“이리나 님께서 절 살려주셨는데, 제가 무엇인들 못 도와드리겠어요.”
야살스럽게 웃는 앨런을 보며 얄팍한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 변덕으로 도와주었던 선의가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내가 본인을 살려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선뜻 도움을 주겠다는 것도 신기했다.
앨런은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정작 공작가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꽤 마음에 들어 그를 오랫동안 내 곁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친해져.”
“네?”
무릎을 꿇은 채 날 올려다보고 있는 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의아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그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바라크도 없이, 우리 둘뿐인 공간이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들을까 싶어 작게 속삭였다.
내가 공작저로 돌아감으로써 공작가의 사람들의 기대감이 터져 버릴 것도 모르는 채 하늘 위로 높게 높게 올라가는 풍선 같기를 바랐다.
“누구랑요?”
“방금 본 공녀랑.”
성력으로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한동안은 앨런이 그녀를 살필 것이다.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볼을 쓸었다. 손길에도 가만히 있는 그에 내가 나직이 속삭였다.
“공녀랑 친밀감을 형성해 둬.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
“아마 심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한다면 제가 이리나 님께 도움이 될까요?”
“당연하지.”
그가 자신의 볼에 닿은 내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너밖에 해줄 수 없는 일이기도 해.”
“그렇다면 할게요.”
내가 하는 말에 한 번도 싫다 한 적이 없던 앨런이니만큼 이번에도 긍정 어린 대답이 나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보다는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리고 편지도 더 이상 보내지 않아도 되고.”
“네……?”
이제 수도로 와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전처럼 그가 나를 애타게 찾을 필요는 없단 소리였지만, 부러 설명하지 않은 채 일어났다.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어주고는 가게 문을 열 때였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말을 안 했네.
다시 몸을 돌리자 놀란 고양이처럼 눈을 뜨고 있는 앨런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성력 때문에 네 몸이 다 나은 건 맞지만.”
맨 처음 앨런을 보았을 때 몸 상태를 떠올렸다.
쓰레기라는 표현이 아까울 정도로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몇 번이나 구타당하기를 반복한 자국과 어째선지 제 기능을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신체 능력이 저하된 몸도, 어딘가 중독된 것처럼 덜덜 떨던 손발까지도.
그런 몸으로 산속까지 뛰어와서 도망쳤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성력으로 치료하면서 부러진 뼈나 엉망이었던 몸을 원래대로 돌려놓기는 했지만,
“약물중독 같은 정신적인 부분은 나도 못 고쳐.”
‘약물중독’이란 말에 그대로 굳은 앨런에게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까 괜히 약 같은 거에 손대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앨런을 뒤로한 채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 * *
공작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이 완전히 튼 상태였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움직였던지라 살짝 피곤했다.
나는 입을 가리고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공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갈 때는 개구멍으로 나갔지만, 이미 사용인들이 전부 깨어 있어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날 발견한 사용인들 모두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리나?”
방으로 가려고 할 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리안의 모습에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프릴이라고 부르셔야죠, 오라버니.”
“아…….”
여기에 온 이유도 대역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날 이리나라고 부르면 어쩐단 말인가.
내 지적에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침음을 삼켰다.
리안은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마주칠 게 뭐람. 그를 곁눈질하다가 방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그가 다시금 날 붙잡았다.
“새벽부터 어디 외출이라도 하고 오는 모양이구나.”
“볼일이 좀 생겨서요.”
“무슨 볼일……?”
내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걱정하면서도 궁금증을 숨길 수 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시가지 구경을 하고 왔습니다, 오라버니.”
“…….”
“이만하면 만족한 답이 되었을까요?”
이제 귀찮게 그만 물으라는 표현에 리안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내 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그쪽으로 다시 돌렸다.
“시가지를 둘러보다가 알게 된 건데…… 공녀님이 크게 다치셨다면서요?”
“이리나.”
“아무도 저한테 알려주지를 않으셔서 제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어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오라버니.”
입고 있는 로브 자락이 드레스 자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짝 올리면서 묵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