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리나…….”
“그런데 오라버니도 참 대단하시네요.”
“…….”
“공녀님께서 다쳤다는 걸 아셨으면서 저한테…….”
그가 날 공작가로 데려오기 위해 했던 한마디가 있었다.
“널 공녀로 대우할 것이다, 란 말씀을 어떻게 하실 수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요.”
리안의 목울대가 짧게 일렁였다.
“제가 1년 동안 또 대역으로 이용당할 거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셨을 텐데요.”
“이리나, 난 정말…….”
“아니면 정말로 제가 이용당하지 않고, 공녀로 대우받을 거라 생각하셨던 건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리안은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다.
상황으로만 봐도 내가 이용당할 거라는 걸 알았을 텐데.
“이리나, 너를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비난하기 위해서 드린 말은 아니에요. 그저.”
내가 그의 어깨 위에 붙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고는 웃었다.
“공자님도 역시 라이즈 가문의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상대방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게 말이다.
상대가 원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원하니까 밀어붙이는 일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그에게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라이즈 공작가 사람답다는 말을 들으면 뿌듯해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내가 한 말이 이죽임이라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라버니.”
그를 스쳐 가면서 알렉시스 공작이 있을 서재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내가 나갔다가 돌아온 걸 확인한 하녀가 조르르 내게로 다가왔다.
“공녀님? 외출하고 오는 길이세요?”
하녀의 입에서 나오는 ‘공녀님’이라는 호칭에 움찔했다. 내 빤한 시선에 움찔한 하녀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무리 1년간 공녀로 대우할 거다라고 말했지만, 노골적으로 날 공녀님이라고 부르는 애가 있을 줄이야.
내가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지만, 이 저택에 에이프릴이 있었다면 바로 표적이 될 만한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저택에 계시고?”
“예, 서재에 계십니다.”
“아버지를 뵙고 올 테니까 로브는 방에 갖다둬.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를 서재로 들고 오도록 해.”
“예, 공녀님.”
입고 있던 로브를 하녀에게 건네주고는 서재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바라크랑 에이프릴이 없는 것만으로도 공작가는 굉장히 조용한 상태였다.
태풍의 눈과 같은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서재 앞에 선 내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저예요.”
기척 없는 방 안에 다시 한번 똑똑, 노크를 하고 나서야 안쪽에서 “들어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때 전쟁터를 누비던 공작답지 않게 꽤 지친 목소리였다.
얼굴에 혈색이 없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냉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전에 있었던 바라크와의 소란 때문인가? 서재에 알렉시스 공작 한 명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패트릭도 함께 있었다.
패트릭이 가져다준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날 향해 애써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냐.”
“대역을 하는 동안 제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주겠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래서 제가 원하는 걸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대고 있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재에 있는 소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원하는 게 무엇이지?”
공작의 물음에 막 답하려 할 때, 노크 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들어와.”
공작의 허락의 말에 소리 없이 열린 문 사이로 하녀의 순진한 얼굴이 보였다.
“아가씨께서 들고 오라고 하셔서…….”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하녀가 종이를 건네주고는 빠르게 서재를 나갔다.
난 하녀가 갖고 온 종이를 책상 위에 올리면서 말했다.
“계약서에 공작님의 사인을 해주세요.”
읽어보면 알겠지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불리한 계약이 아니었다.
앞으로 1년간 나는 공작이 원하는 대로 충실히 ‘대역’으로 공녀인 척 연기를 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고,
“월마다 10만 루크를 지급하라……?”
글자를 빠르게 읽어 내리던 공작의 입에서 마지막 조항 하나가 비죽 흘러나왔다.
“예, 공작님. 공녀님이 사고로 별장에서 요양하는 동안 제게 지불해 주실 금액입니다.”
그 대역의 값을 공작가에서 지불하는 것이다.
“이리나.”
계약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적은 돈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가에서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도 아니라는 거 압니다.”
10만 루크는 제국의 수도에서 평범한 4인 가구가 1년간 쓰는 생계비였다.
큰돈이지만 공작가에선 큰돈은 아니지.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을 10초만 쉬어도 돈을 벌어들이는 게 공작가였다.
제국의 남쪽에 위치한 루벨라 광산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만 해도 얼마인가.
“원하는 게 고작 돈뿐인 거냐.”
“제게는 고작 돈이 아니어서요.”
계획했던 일을 전부 끝내고 난다면 제국을 떠나서 살 것이다.
그간 고생한 알리샤에게 제 몫의 반을 나눠주고, 신전의 눈을 피해서 성력을 쓰는 일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작가에서 그 정도 돈은 받아야 가능했다.
하물며 내 아버지와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아 죽게 만들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면 10만 루크는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금액이 아닌가.
“이 정도 금액은 제게 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나는 네가 돈 말고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할 줄 알았다.”
“뭘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여성 둘이서 살아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희생이나 가족, 애정, 배려, 시간 이런 것들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공작가에서 쫓겨난 이후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선, 그리고 공작가가 나와 내 아버지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가족이나 사랑 희생, 배려 같은 고귀한 단어보다 돈과 권력이 더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패트릭에게도 들었습니다. 1년 뒤에 큰 보답을 해주실 거라고요.”
종이에 박혀 있던 청회색의 눈동자가 느리게 날 향했다.
오늘따라 희게 질린 모습을 보니, 어째 병색이 완연한 환자 같다는 생각도 일순 들었다.
“그런데 그런 큰 보답도 필요 없습니다.”
공작의 목울대가 짧게 일렁였다.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아까 전 보았던 리안과 똑같은 모습이었던지라 참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계약서에 서명만 해주세요.”
공작의 손에 있는 종이가 꾸깃 하고 구겨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살짝 구겨진 종잇장이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게 했다.
내가 방금 한 말 중 뭔가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했나?
하아.
곧이어 땅이 꺼져라 무겁게 떨어지는 한숨을 쉰 알렉시스 공작이 깃펜을 들었다.
“10만 루크면 충분하겠느냐?”
그가 날 올려다보는 것도 없이 되물었다.
내가 원한 질문에 그가 보고 있지 않음에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
펜의 촉이 하얀 종이 위에 닿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공작의 깃펜이 느리게 움직였다.
“……이리나.”
천천히 써내려가는 사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널 데리고 온 이유가 대역만 하게 하기 위한 건 아니다.”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시선을 내게 주지 않은 채 말하는 공작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에이프릴이 다치지 않았어도, 널 불렀을 것이다.”
“그러시군요.”
말은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겸사겸사로 대역으로 이용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
“아가씨.”
더는 매섭게 말하지 말아달라는 듯이 날 제지하는 패트릭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제 정체에 대해 말하는 건 원치 않으실 일이잖습니까.”
“…….”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의 사인이 완성되자 내가 계약서를 챙기면서 웃었다.
“저도 이제는 그런 말에 위안 삼는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공작가에서 하는 말에 바보같이 얼마나 휘둘렸었는지.
챙긴 계약서를 돌돌 말고는 서재를 나서자,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하녀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여기에 있니?”
“공녀님이 안에 계시니까요. 괜찮으세요?”
“…….”
“분위기가 심상찮은 거 같아서요.”
공녀님이라니. 하녀의 순진함이 나쁘지 않아 웃었다.
라이즈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하녀에게는 어느 정도 조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공작가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다면 다른 귀족가에서 일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 공녀님이란 호칭은 바라크 오라버니나 진짜 에이프릴 아가씨 앞에선 꺼내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