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폐하께서 로지안 님을 아무리 아끼고 어여삐 여기신다고 한들, 사내시지 않습니까.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알렉시스 공작의 한마디에 로지안이 멈칫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예,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몸을 보이는 건 어렵겠습니다. 걱정해 주신 점 감사하나, 괜찮습니다.”
몸 상태를 살피러 온 신관만이 헛고생을 한 것이라 생각하면 내가 혀를 짧게 찼다.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저 말을 이었다.
“황실에만 계시기에 잘 모르시는 거겠지만.”
잘 모른다는 말에 로지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숨 막히는 공간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무릎을 꿇고 있는 타미타르테 신관이었다.
성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눈치까지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성력까지 가진 인물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하는 로지안도 이상했다.
타미타르테가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로지안에게 콧대 높고 오만불손하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하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닌데…….
일단 그런 것들을 뒤로한 채, 로지안을 상대하고 있는 공작을 곁눈질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작가 가주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는 이는 집사장과 후계뿐입니다.”
노골적인 거절에 로지안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신관까지 데리고 와 권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몸을 보일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긴, 알 리가 없겠지. 로지안은 황실에서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성별이 여성이었다면 황실 내의 안살림과 더불어 사교계의 법도나 다른 소소한 예법 같은 걸 공부했겠지만 여성도 아닌 남성이 어떻게 알겠나.
황실에서 로지안은 공중에 붕 뜬 존재였다. 그나마 하는 것이라고는 황실 예산으로 사치나 부리는 것이겠지.
“일어나거라.”
더는 로지안과 대화할 필요 없다는 듯 내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공작의 태도에 로지안은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모습이었다.
공작의 말 때문이라도 로지안이 억지로 붙잡는다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차 사고를 겪었는데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몸도 이상하게 느껴질 게 분명했고, 또 괜히 표범에 물린 상처에 대해서 다시금 이야기가 나와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표범에게 물렸을 당시에는 큰 흉으로 남을 것이라고 모두가 말했지만, 그 말과 다르게 물렸던 어깨에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함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방문했군.”
“어디 아프십니까?”
로지안의 방을 나와 황실의 긴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내가 던진 물음이었다.
앞서 걸어가던 공작의 걸음이 우뚝 멈추면서 느리게 날 향해 몸을 돌렸다.
로지안과 달리 표정 변화라고는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공작이 말한 ‘쓸데없이 한 방문’이라는 말은 공작이 쓰러진 것에 대해 말한 점 때문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공작은 내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가 알 필요 없는 부분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작에 내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공작님의 몸 상태는 집사장과 후계만이 알아야 하는 것이라 하셨죠.”
궁금해서 물어보기는 했지만 공작이 말해줄 것을 기대하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공작가로 돌아가기 전에 누구 좀 잠깐 만나고 오겠습니다.”
“황실에서?”
“네. 안 되나요?”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에 공작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짧게 저었다.
“그럴 리가.”
“…….”
“네가 원하는 대로 언제든 자유롭게 움직여도 된다.”
공작의 그 말을 뒤로한 채 몸을 페르포네가 있는 황성 쪽으로 돌렸다.
* * *
“망할!”
타미타르테를 비롯한 황실의 다른 사용인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지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와장창!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이제는 익숙했던지라 가만히 듣고 있던 타미타르테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것들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사내가 황제의 애첩이 되었다고 무시하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여성이 아니었으니 후손을 볼 수 없는 몸이라 더더욱. 망할 자식들.
황실 것들이 어떤 상상을, 동시에 무슨 상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가 황제의 밑에 깔려 교성을 내뱉는다 생각하고 있겠지.
“멍청한 것들.”
그리고 현실은 그 상상의 정반대라는 걸 도대체 언제쯤 알려나 모르겠다.
그 작태를 본 황태자, 페르포네가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하긴, 살아 있는 송장이라고 해도 아비를 욕보이는 건 싫은 모양이지.
“이리 와.”
로지안의 손짓에 타미타르테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로지안의 손을 타미타르테가 조심스럽게 쥐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성력에 몸의 상태가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이 몸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더군.”
로지안의 느릿한 목소리에 타미타르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간은 노화가 진행되니 주름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라는 말이 목에서 빙빙 맴돌았다.
오히려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로지안의 미모 쪽이 이상한 것이고.
“다음에 황실로 들어올 때 약제를 챙겨 오겠습니다.”
“그것보다.”
“…….”
“도망친 그 새끼는 아직도 못 찾았나?”
도망친 그 새끼를 의미하는 게 다니엘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타미타르테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로지안이 한쪽 눈을 치켜올렸다.
“그 새끼를 못 찾으면 그 새끼 자식이라도 내 눈앞에 데리고 와.”
침묵이 제법 길게 이어질 때 타미타르테가 조용히 내뱉었다.
“……예.”
타미타르테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에이프릴 공녀?”
페르포네가 일하는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는 아도니스가 제법 놀란 목소리로 날 알은체했다.
“안녕하세요, 경.”
“황실엔 어쩐 일로 오신……. 아, 전하를 뵈러 오신 겁니까?”
“예. 잠깐 들어가려고 하는데…….”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가, 아도니스 경은 조금 난처한 얼굴이었다. 내가 파혼 때문에 난동이라도 부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소란스러운 일 같은 건 만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다짐을 해야 문을 열어주려나.
아도니스 경이 나를 향해 전과는 달리 조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무실 안에 지금 손님이…….”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하고 열리자, 보이는 레르비앙에 내가 주춤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공녀께서 어쩐 일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일단은 약혼자니까요.”
“지금은 조금 힘들 듯한데요.”
안에 정말 손님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그의 등 뒤로 곁눈질을 했다.
어떤 대단한 손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만큼 중요한 손님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페르포네에게 현재 있어 나보다 중요한 사람 있었다. 바로 페르포네가 마음에 두었다고 한 사람.
“파혼에 대한 답을 들려 드리기 위해서 왔다고 전해주세요, 레르비앙 경.”
“…….”
“그래도 전하께서 절 안 만나실지 궁금하니까요.”
겸사겸사 페르포네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이가 누군지 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귀족 아가씨들이 페르포네를 짝사랑하는 건 쉽게 상상이 가지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페르포네는 상상도 가지 않았고, 상대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내 안의 페르포네는 여전히 숙맥에 자주 울던 울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고.
내 말에 잠깐 망설이던 레르비앙 경이 고개를 한 번 주억이고는 집무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 긴 대화를 주고받을 필요 없었기 때문인지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레르비앙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손님이 있을 거라 예상했던 집무실 안에는 페르포네 한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책장과 햇살이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을 쳐둔 창가까지. 기억에 남아 있던 집무실 그대로인 상태였다.
“앉아요.”
근처 소파에 자리를 권하는 페르포네가 자리에 일어나 내 맞은편 자리에 먼저 앉았다.
뒤이어 내가 자리에 앉자 한 쌍의 눈동자가 쿡 하고 박혔다. 파혼에 대한 내 답이 어떤 것인지 기대와 궁금증이 섞인 눈동자였다.
“그래서……. 공녀는 결정을 어떻게 내렸나요?”
“대답하기에 앞서서 오늘 로지안 님을 뵀어요. 마차 사고 때문에 걱정이 되셨는지 신관까지 부르셨고요.”
갑자기 나오는 로지안의 이름에도 그다지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로지안이 나와 알렉시스 공작과 만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로지안 님께서 전하와 저를 파혼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라는 거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그리고 전하께서 황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공작가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파혼에 대한 답은 거절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