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던 페르포네가 약간 피곤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파혼하기가 싫어 구구절절 이유를 댄다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전 왜 전하께서 본인이 가진 패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가가 뒷배로 있다면 로지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일 텐데.
“황위에 대한 건 제 문제지, 공녀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닙니다.”
“전하의 요구에 응하겠습니다.”
나와의 대화가 시간 낭비라 생각했는지, 레르비앙에게 날 내보내려고 신호를 보내던 페르포네가 멈칫했다.
원하는 말을 들었기에 덤덤하거나 기쁨을 애써 숨기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혼을 원했던 공녀가 이제는 요구에 응하겠다고 하니 당황하기라도 한 걸까, 싶을 때 페르포네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원하시는 대답을 드린 거 아닙니까?”
“…진심입니까?”
“어렸을 땐 누나라면서 쫓아다니셨던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 섭섭하네요.”
“에이프릴 공녀.”
과거를 꺼내는 말에 그가 언짢아지기라도 한 건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심이냐는 물음에 내가 짤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뒷말을 덧붙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파혼은 1년 후에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일단 왜 하필 1년 뒤인가요?”
그때가 내가 공작가를 벗어나는 시기이고, 동시에 에이프릴이 혼자 견뎌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에이프릴이 완치되지 못한다면 결국 황태자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에이프릴의 몸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기도 했으니까.
“제가 원하는 일이 1년 후에 일어날 테니까요.”
“원하는 일이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전하와 파혼을 하게 됐을 때 보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내 말에 그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약혼자 앞에서 다른 사내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파혼을 먼저 요구하셨던 건 전하셨잖습니까.”
내가 숨겨놓은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상대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그게 라이즈 공작가의 사랑스러운 딸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페르포네가 어떤 오해를 갖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의 파혼이 아니라 1년 후의 파혼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파혼을 하게 된다면 전하께서도 피곤한 일을 겪게 되실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를 귀찮게 굴 대표적인 예가 로지안일 것이다.
이때다 싶어 제 입맛에 맞는 귀족가의 영애들을 페르포네에게 들이밀겠지.
“1년이란 유예기간 동안 전하께서도 필요한 일을 준비하시면 되잖습니까. 로지안 님께서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
“1년 뒤, 서로의 완벽한 파혼을 위해서 말입니다.”
“공녀의 말을 순순히 믿긴 힘들군요.”
“그리 생각하셔도 이상하지 않죠. 하지만 전하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
“이 1년 동안 저를 이용하세요,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요. 그리고 제가 갖고 있는 것들도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당혹스럽네요, 공녀.”
“전 전하께서 저를 못 믿는 게 더 이상하네요.”
“마음이 바뀐 이유가 대체 뭡니까?”
가볍게 넘기려는 말에 그가 피하지 말라는 듯 노골적으로 물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더 이어가고 싶은 겁니까?”
말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길게 늘어뜨렸다.
페르포네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그 이유는 1년 후에 알게 되실 거예요.”
“…….”
“그리고 겸사겸사, 전하께서 마음에 둔 이와 잘되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아, 다시 공작가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파혼을 해도 더는 페르포네를 붙잡을 수 없어서 슬퍼하고 무너지는 에이프릴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저를 방패로 사용하세요, 전하.”
“…….”
“저 역시 1년까지는 전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필요해요.”
“공녀.”
“누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청을 들어줘요.”
옛날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원하는 일이었다.
페르포네의 실어증이 나은 후에 내가 누나였으면 좋겠다고 그가 종종 말하곤 했으니까.
케케묵은 옛날 옛적의 이야기에 나는 그가 조금은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그런 내색은 달리 느껴지지 않았다.
“1년 후에는 원하지 않으셔도 파혼하게 되실 겁니다.”
“확신할 수 있나요, 공녀.”
“확신합니다.”
만약 페르포네가 제 기반을 제대로 잡아놓지 않는다면, 바로 로지안부터 라이즈와의 파혼을 노골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이 말에 제 모든 걸 걸어도 좋습니다.”
믿지 못하는 눈치의 페르포네에 내가 살짝 웃어 보였다. 레르비앙과 페르포네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저들도 고민하는 눈치였다.
마음에 두었다는 여성 때문이기라도 한가.
목이 살짝 말라오는 느낌에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는 물론이거니와 물컵 같은 것도 없었다.
빙긋 웃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마음에 품었던 영애가 신경 쓰이는 얼굴을 하고 계셔서요. 어렸을 때부터 전하를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네요.”
뭔가 이상한 듯 그가 눈을 가름하게 뜨다 목에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널널하게 풀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낸 게 꽤 부끄럽고 멋쩍은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키득거리다 웃음을 삼키면서 숨을 정돈했다. 매번 어리게만 느껴졌던 페르포네가 이제 미청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어렸을 땐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저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러셨습니까?”
레르비앙의 놀란 듯한 물음에 페르포네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정말 옛날 이야기이기는 했다. 내 기억 속 페르포네는 의지가 되는 사내라기보다는 보살펴야 하는 동생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공작가에서 쫓겨나기 3년 전만 해도 풋풋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만나지 못했던 3년 만에 완전히 청년이 되어 있었다.
미청년이 된, 친동생과 같던 페르포네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해서 파혼을 요구하는 모습도 신선했다.
만약 내 상황이 이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정말로 공작가의 공녀가 되어 그와 약혼을 한 관계였다면 그가 맨 처음 그 제안을 내밀었을 때 순순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금색의 눈동자에 불신이 느껴졌다.
내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런 제안을 한다고 받아들이는 건가?
내가 한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걱정이 있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연분홍빛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공녀께서 이렇게 굴 때면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오늘 같은 모습이면 제가 알고 있던 원래의 당신 같기도 해서요.”
“…….”
“지난 3년간의 당신은 내 유년 시절을 함께한 공녀 같지 않았는데, 지금은 또 내가 알던 공녀 같아서요.”
어디선가 숨을 몰아마시는 소리가 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숨을 앗아간 느낌이었다.
페르포네에게 들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던지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냄으로 살짝 가벼워졌던 집무실의 공기가 다시금 딱딱하게 굳어졌다.
필요하다면 페르포네에게 내 정체를 말할 것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이프릴이 공작가로 다시 왔을 때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었다.
“저 역시 전하와 파혼을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 1년 동안 에이프릴이 원하던 것을 하나둘 뺏을 것이다.
동시에 공작가가 에이프릴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들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건네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저는 전하를 도와드릴 겁니다. 그러니 믿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