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리나가 집무실에서 나선 뒤로 무거운 적막감이 집무실을 맴돌았다. 도와주겠다고 한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부터 결판 내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오늘의 에이프릴은 페르포네의 말처럼 평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 힐 라이즈 같지가 않았다.
마차 사고가 그녀에게 무슨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은 오늘처럼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인물이 아니라 감정적인 인물이었다.
본인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가 없어서 늘 불안해하는 이가 에이프릴이었으니까.
“이만 나와도 돼요.”
침묵을 깨뜨린 건 페르포네의 한마디였다.
동시에 레르비앙의 눈동자가 집무실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의 말에 끼익, 창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걷어져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창밖, 테라스 밖에 있던 이가 안으로 들어온 기척이 느껴지자 페르포네가 슬쩍 뒤로 눈짓을 보내면서 웃었다.
“데미안은 좋겠네요.”
페르포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보자 보이는 건 남자였다.
그의 고모가 결혼한 대공과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황실 가계도 내에서 유일한 제 또래 사촌이었기 때문이다.
밀레나 디니아 다우스와 대니언 발슈타인의 양자였으니까. 양자이니만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던지라 두 사람 사이를 사촌이라 생각하는 이는 황실 내에서는 아무도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당장 페르포네의 오른팔인 레르비앙만 보더라도 ‘사촌이긴요!’ 하고 질색하면서 펄쩍 뛰었으니까.
“뭐가 말입니까?”
새삼 페르포네는 데미안이 신기했다.
대니언 대공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고 했는데 하는 행동거지나 굉장히 낮은 목소리는 꼭 대공과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대공 본인이 불임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혹시 데미안이 혼외자인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1년 뒤에 파혼하면 본인 감정 억누르지 않아도 되잖아요.”
“…….”
“귀족 아가씨들 사이에서 데미안이 에이프릴 공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에이프릴 힐 라이즈와 데미안 발슈타인이 아카데미 동문이라는 건 또래의 귀족가 자제들이라면 알 만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제법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세 사람의 친분이 좋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데미안에게 에이프릴은 사촌의 약혼녀였고, 에이프릴에게 데미안은 약혼자의 사촌이었으니까.
사이가 틀어질 만한 이유가 없는 게 에이프릴과 데미안의 관계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은 2년 전 와장창 부서졌다.
북부에서 수도로 온 데미안이 에이프릴과 만나면서 사이가 틀어졌는데, 에이프릴은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그가 자신에게 고백하면서 억지로 입맞춤을 하려고 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긴가민가하는 이야기였지만, 데미안 측에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니 수도 사교계에서는 ‘데미안이 오랜 시간 동안 에이프릴을 짝사랑했다’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진 상태였다.
“당연히 농담이죠.”
살벌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데미안에 페르포네가 산뜻하게 웃었다.
오고 가는 분위기에 레르비앙이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데미안이 농담을 농담으로 치부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성격을 가졌다면, 페르포네는 농담이 아닌 말을 농담으로 가볍게 할 수 있는 유들함과 능청스러움을 가진 이였다.
“진심인 것처럼 느껴지네요.”
데미안이 근처 소파에 자리를 잡으면서 등을 기댔다.
에이프릴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페르포네 쪽에서 그 애에게 파혼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정말 공녀와 파혼하실 겁니까?”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있던 페르포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글쎄. 페르포네가 짧게 중얼거렸다.
오늘의 에이프릴 힐 라이즈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에이프릴 같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의 에이프릴은 저가 알고 있던 에이프릴 같았으니까.
자신이 오랫동안 좋아해 온, 한때는 누나이길 바라고, 지금은 제 연인이길 바라는 에이프릴로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이렇게 휙휙 바뀔 때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찾고 싶은 건 과거의 에이프릴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에이프릴이 ‘공작가에 견주는 집안의 여식이냐.’라고 물어보았을 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공녀께서 한 말은 전부 맞는 말입니다.”
레르비앙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동시에 집무실의 두 쌍의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은 날카로운 데미안의 눈매에 레르비앙이 숨을 훅 들이마셨다.
페르포네는 데미안이 귀족 영애에게 함부로 대할 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이였다.
“지금 당장 파혼을 공표해 봤자 로지안 님 좋은 일밖에 안 되잖습니까.”
“…….”
“다들 공작가 때문에 혼담을 안 넣는 것뿐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약혼녀가 없다면 또 다른 이야기죠.”
에이프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레르비앙은 페르포네의 승계에는 공작가의 힘이 있으면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렇겠지.”
“…….”
“본인이 1년 후에 파혼하겠다고 말을 했으니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페르포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붙잡았다.
“아니면 공녀가 말하던 것처럼 마음에 둔 이가 따로 있어서 그런 겁니까?”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데미안의 물음에 페르포네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예. 달리 마음에 둔 이가 있습니다.”
“누굽니까?”
“누군지 알려주면 도와주기라도 할 겁니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에 데미안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페르포네에 데미안은 늘 망설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페르포네에게만큼은 사실대로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에이프릴 힐 라이즈, 그 여자가 ‘데미안이 제게 고백을 하더니 강제로 입 맞추려고 했어요.’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대로 놔두고 있는 건 겁에 질린 쥐새끼의 발악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이 바깥의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두려워서 무작정 던진 말이었겠지.
“근데 오늘따라 공녀께서 좀 평소와 다르신 것 같더라고요.”
차분해서 그런가, 아니면 가볍게 한 어린 시절 이야기 때문에 그런가. 레르비앙의 말에 데미안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평소와 다른 게 아니라.
“원래라면 그게 평소의 모습이에요.”
무심결에 자신이 말한 건가?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제 머릿속을 그대로 읽어낸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데미안이 대각선 자리에서 흘러나왔다.
아까 전 보여주던 짓궂은 모습은 사라지고 차분함만이 남은 페르포네에 데미안이 긍정했다.
그래,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의 모습은 원래 그런 모습이다.
데미안은 2년 전의 자신이 에이프릴에게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너, 대체 누구야.”
그리고 페르포네와 약혼한 에이프릴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이 아니었다.
에이프릴의 비밀에 대해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가 데미안이었다.
제 말에 자신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의 미소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던 여자에게 당혹스러운 기색이 짧게 스쳐 지나갔었다.
여전히 그 미소를 따라 한 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기울였을 때, 데미안은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왔다.
가짜가 진짜인 척 연기하는 모습에 불쾌함만 가중되었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던 제게 가짜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너 누구야. 진짜 에이프릴 어디 있어.”
그 말에 생글생글 웃는 낯이던 가짜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부드럽게 휘었던 눈매가 굳고, 말아 올렸던 입꼬리가 내려가는 모습을 봤을 땐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을 때를 보는 것처럼 소름 끼치기도 했었다.
“데미안?”
상념을 깨뜨린 건 페르포네의 목소리였다.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역겨움을 꾹꾹 누른 채 그가 고개를 들어 페르포네를 바라봤다.
금빛 눈동자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에 대한 걱정과 또 방금 전 만났던 에이프릴과의 틀어짐에 대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페르포네가 데미안을 향한 시선을 거두면서 레르비앙에게 문 쪽으로 눈짓했다. 이내 눈치껏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레르비앙에 페르포네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공녀와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뭡니까?”
사교계에 떠도는 두 사람의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공가의 입양아인 그가 황태자의 약혼녀에게 함부로 다가갔다는 소문이 돌면 귀족사회에서 뭐라 수군거릴지 모를 것도 아닐 터다.
만일 데미안이 그리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에이프릴을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여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