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네 어미가 했던 말이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손의 발톱이 리안을 공격할 것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충격받은 얼굴의 그 자체인 공작가의 사람들에 알리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리나를 내쫓았을 때부터 진즉 알았지만, 이 정도로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공작가의 피를 이은 널 찢어 죽이고 싶은데.”
늑대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위협에 클리프가 허리춤의 칼을 빠르게 꺼내 들어 알리샤에게 겨누었다.
“떨어져라!”
발톱이 리안의 볼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핏방울이 볼에 맺혔지만 리안이 신경 쓰지 않은 채, 알리샤의 목을 겨누고 있는 칼을 밀어냈다.
“클리프 경, 칼을 거두세요.”
“하지만 공자님……!”
“어서요.”
하지만 클리프가 볼 안쪽을 꾹 짓씹었다.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알리샤가 비웃듯 웃었다.
“네 어미가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나 보지?”
알리샤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리안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제 어머니가 이리나의 친부를 죽였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리나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 어떤 심정으로 공작가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이야긴지 자세히 듣고 싶…….”
“해줄 말 따윈 없으니까.”
볼에서 핏줄기가 주륵 흐르는 감각에 리안이 손등으로 대충 닦아낼 때, 알리샤가 가파른 한숨을 내쉬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생각 따위 하지 마.”
다시 한번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다니엘을 입에 담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뒤로한 채 알리샤가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 * *
공작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에이프릴의 입맛대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바뀌지 않은 곳이 그래도 몇 군데는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을 손으로 꼽아보자면 한 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고, 다른 한 곳은 바로 공작가의 서재였다.
서재는 원목 책장 가득하게 꽂혀 있는 책들과 더불어 살짝 열린 붉은 커튼 사이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볕이 공작가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공작가에서 지냈을 때,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던 곳이 도서관이기도 했다.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 딱히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
날 본인들 딸로 대할 것이라고 했지만, 옅은 불안함은 늘 가슴 깊숙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친딸을 찾게 된다면,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내가 필요 없어졌다고 버려질까 봐.
에이프릴이란 딸 역할도 했어야 했지만, 이 집안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공작가의 인물들이 나를 버릴 수 없도록 말이다.
옛날 기억들이 새록새록 나네.
공작가 사람들 중에서 나를 가장 싫어했던 바라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연금술 책을 얼마나 읽었던지. 지금도 필요한 게 연금술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우습다.
뭐, 그때는 바라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더라면 지금은 내게, 그리고 고쳐지지 않는 에이프릴의 다리를 위해 필요한 책이었으니까.
에이프릴 앞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있을 생각은 없었다.
본인의 다리를 고쳐주려고 하는 게 나라는 걸 알게 된다면, 에이프릴 본인이 내게 했던 일을 생각해서라도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이다. 아마 본인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서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지.
‘피부를 재생시키기 위한 연금술’, ‘키메라 합성 연금술’ 책장 가장 높은 곳에 꽂혀 있는 책을 챙기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손을 쭉 뻗었다.
“으으.”
왜 안 닿아. 그렇게 작은 키도 아닌데, 닿지 않는 책에 받침대 하나라도 챙겨 들고 와야 할까 싶을 때였다.
얼핏 나는 화약 냄새와 등 뒤로 느껴지는 커다란 몸과 더불어 내 손 위로 덮는 매끈하고 하얀, 큰 손에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뒤에 서 있는 이가 누군지 직감했다.
“이 책이 네가 왜 필요해.”
한마디, 한마디 재수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치의 빗나감이 없었다.
“너한테 그 책 더 이상 필요 없지 않나?”
발꿈치를 내리고 뒤를 돌아보자 내가 빌릴 책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바라크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도서관에 왜 있는 건지.
책을 대신 꺼내줬으면 돌려주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 것 없이 멀뚱히 책만 보고 있는 그에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공작가 누구에게도 잘 보이고 싶은 생각 없다며?”
“…….”
“근데 이 책이 네가 왜 필요해? 옛날처럼 다시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읽으려고 드는 건 아닐 거고.”
바라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 앞을 알랑거리며 기웃거렸던 기억 때문에 낯이 후끈거렸다.
망할. 바라크 개자식. 어렸을 때 한 행동이 지금에 와서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잘 보이고 싶었다는 속마음을 바라크 힐 라이즈 저 개자식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날 열 받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 모르지는 않았겠지.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 번씩 주는 그 눈길이 좋아서 관심받고 싶은 개마냥 움직여 댔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순순히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바라크에 그의 손에 있는 책을 뺏었다.
“너 때문에 읽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
“네가 키메라 이식법에 대한 연금술을 읽을 필요는 없을 텐데.”
노골적으로 말했는데도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에 얼굴을 와작 일그러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방 안 서랍에 숨겨두었던 구속구로 위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적당히 나대.”
그냥 무시하고 도서관을 나서려고 했던 걸음이 멈칫했다. 불처럼 타오르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헛웃음이 절로 나오면서 입꼬리가 비뚤게 말려 올라갔다.
“네가 여기 공작가로 온 건 에이프릴 대역이 필요해서 온 거고.”
“…….”
“돈 받고 대역 노릇 하는 거면 눈치껏, 주제 파악하면서 내 신경 긁지 말고 움직여.”
“왜? 네 동생이 내가 대역 노릇 하고 있는 1년 동안 다 나을 거라고 되게 자신하는 모양이네.”
책을 대충 훑어보던 내가 탁! 소리나게끔 덮으며 말했다.
“……뭐?”
“동생이 마차 사고 때문에 별장에 있는 거잖아. 집에서 요양 못 하고, 신관한테 보여주지도 못하는 거 보니까 꼬락서니가 귀족 꼴은 아닐 텐데 뭘 믿고 1년 동안 다 나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냉큼 멱살을 잡으면서 날 위협하는 얼굴에 내가 웃음을 흘렸다.
“네가 에이프릴 상태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잖아!”
실제로 봤으니 다 알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한 번 떠보는 말투에 냉큼 넘어오는 바라크의 꼬락서니도 웃기기 짝이 없었다.
“네가 마차 사고를 일부러…….”
되도 않은 말을 이어가는 바라크에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냉큼 그의 머리를 퍽 내려쳤다.
“윽!”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바로 머리를 붙잡고 무너지는 바라크를 보면서 옷깃을 정리했다.
“너, 미쳤어?”
금방이라도 마법으로 공격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변한 것 없는 여전히 폭력적인 모습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딱 그 꼴이네.
그리고 본인의 폭력적인 행동을 과거와 마찬가지로 순순히 당해줄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그 정도 상상력이면 넌 연금술부 부부장이 아니라 소설가가 됐어야 해. 피해망상도 정도껏이지.”
“이리나 데빈!”
“내 이름 함부로 입에 담지 마. 역겨우니까.”
별장으로 가는 길이 장마 때문에 지반이 약해져서 일어난 사고였다. 그걸 내가 일부러 낸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꼴이 못나기 그지없다.
그 정도 피해망상이면 바라크는 공작가에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 신전에 처박혀서 생활해야 했다.
두꺼운 책으로 얻어맞았기 때문인지 몸을 단번에 일으키지 못하고, 머리를 붙잡고 있는 바라크를 보니 속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당한 것의 새 발의 피만큼 돌려줬을 뿐인데 조금 개운한 감각이 들었다.
전부터 그를 한 대쯤 세게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에이프릴을 계단에서 밀었을 거라 생각해?”
일어서지 못한 채 옆통수를 손으로 감싸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화로 이글거리고 있던 눈빛에 일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에 다시금 천천히 물었다.
“내가 정말로, 계단에서 밀었다고 생각하냐고.”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바라크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정말로 밀지 않았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이프릴의 편을 든 건 두 가지 이유였겠지. 혈육이었고, 겨우 찾아낸 잃어버린 진짜 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