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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39)화 (39/109)

39화

바라크 힐 라이즈가 보기에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버림받지 않으려고 에이프릴인 척 연기를 해오고 노력해 왔던 애였다.

에이프릴을 계단에서 미는 걸로 인해 내 입지가 약해지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협박해서 밀었다고 해도 에이프릴이 공작 부부에게 말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내가 정말로 에이프릴을 밀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안 중요했잖아. 그렇지?”

“……너.”

“날 내쫓고 싶어 했던 핑계에 불과했잖아. 사실 여부는 상관없이 말이야.”

일순 바라크의 얼굴에 죄책감이 물들었다. 하지만 표정이 흔들렸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한 번 숙인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뭐.”

“…….”

“넌 진짜 라이즈 핏줄도 아니잖아. 내가 내 동생 챙기겠다는데 뭐가 잘못됐어?”

그래,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삼켰다.

“넌 내가 네 신경 긁지 말라고 했지만, 반대로 말해야겠네.”

“…….”

“내 신경 긁지 마.”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내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결국엔 내가 이곳에 1년을 있어야 하는데.”

“…….”

“내가 이 1년 동안 어떻게 행동할 줄 알고 이렇게 날 막대해.”

“네가 함부로 행동하면 죽여 버릴 거다, 알겠어?”

내게 손을 뻗으려고 하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며 바닥으로 밀쳤다. 바닥에 뚝 떨어지는 손에 발을 들어 그 손등을 질근 밟았다.

“윽!”

“두 번 다시 나한테 이따위로 손 올리려고 하지 마, 바라크 힐 라이즈.”

“발 안, 치워?”

“오늘은 네 머리를 한 번 치는 걸로 참았지만.”

발을 치우기는커녕 굽으로 더 질근질근 밟으면서 대꾸했다.

“다음은 날 위협한 네 손목을 없애는 걸로 할 거야, 네 말처럼.”

입술을 얼마나 세게 짓씹었는지 바라크의 입술에 핏방울이 살짝 맺힌 채였다.

쯧쯧, 혀를 짧게 차면서 그가 과거에 했던 그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손 하나 없다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잖아?”

손을 빼내기 위해 노력하던 그가 멈칫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뭔가 못 들을 거라고 들었다는 듯이 멍한 얼굴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굽혔던 무릎을 펴고 허리 역시 세울 때였다.

“아가씨.”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입구 쪽에서 앰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찾는 듯이 ‘아가씨’ 하고 몇 번 부르면서 타닥, 타닥, 가볍게 뛰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에이프릴 아가씨!”

그 호칭에 바라크의 얼굴이 살벌하게 구겨졌다. 나중에 앰버를 쥐 잡듯이 잡아댈 모습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래서 에이프릴 아가씨라 부르지 말라고 한 건데.

내 앞에서 주저앉아 있는 바라크를 보면서 서재로 들어온 앰버가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 망둥이 같은 바라크 힐 라이즈가 이런 못난 꼴로 있으니 영 이상했겠지.

“무슨 일이야?”

채근하는 말에 바라크를 보고 있던 앰버가 퍼뜩 날 보다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보고도 못 본 척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딱 하녀의 모범 같은 자세였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딱히 날 찾아올 만한 손님은 없는데. 내가 눈을 느리게 깜빡일 때, 앰버가 말을 이었다.

“신전의 타미타르테 신관님이십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다.

그 신관이 날 왜 찾아와.

내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바라크를 곁눈질했다.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그래.”

필요한 책도 찾았겠다, 도서관에는 더 있을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바라크랑 더는 함께 있고 싶지도 않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빤한 시선을 무시하며 손에 들고 있던 책 두 권을 앰버에게 넘겼다.

“내 방에 놔둬.”

“네, 공녀님.”

날 꼬박꼬박 공녀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앰버를 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공녀라고 부르던 것 때문에 바라크한테 시달릴 게 분명했다.

공작가의 하녀이니 시달리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에이프릴이 아닌데도 처음부터 이 공작가의 아가씨를 대하듯이 대하고 있는 앰버를 보면 또 미련하다는, 도와줘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앰버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공녀님?”

왜 그러시냐는 눈빛에 얄팍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혹시라도 바라크가 널 불러서 뭐라고 한다면, 내가 시켰다고만 말해. 내가 시킨 대로 안 하면 벌을 주겠다고 말을 했다라고 하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이었지만,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

이만 가보라고 눈짓하자 내가 건넸던 책을 품에 꼭 안은 앰버가 꾸벅 인사하고는 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앰버가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방금 전 서재에서 봤던 나와 바라크의 모습은 그녀의 착한 성격과는 달리 공작가 내에서 소문으로 빠르게 퍼질 법한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퍼져서 곤혹스러워지는 건 바라크 하나뿐이겠지. 내가 바라크와 맞먹으려고 들었다고 해도 날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라크 입장에서야 1년만 지나면 날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할 텐데, 내가 에이프릴을 고쳐주지 않는 이상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에이프릴의 속을 뒤집을 만한 소식과 함께 어서 빨리 그 애를 다시 공작저로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응접실의 문을 부드럽게 밀었다.

응접실의 열린 창문 사이로 등나무꽃 향이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그리고 옅은 등나무꽃 같은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일렁이며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보여주었던 당황함과 놀람이 섞인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에 나도 불안함과 두근거림을 숨긴 채 살짝 미소 지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가벼운 인사치레의 말을 주고받은 뒤 내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내가 그날 봤던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니, 다른 꿍꿍이속 때문에 왔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아마 그 꿍꿍이속은 타미타르테가 가진 꿍꿍이라기보단 로지안이 가진 생각이겠지.

타미타르테 신관은 단순한 로지안의 장기말에 불과할 것이고.

“그날 이후로 걱정이 되어 따로 뵈러 왔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다.”

“…….”

“다리도 멀쩡하고.”

슬쩍 치맛자락을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발을 몇 번 굴렸다.

무언가에 의지해서 걷는 것도 아니었고, 생활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뛰는 것도 아무 문제 없다는 의미로 활짝 웃었다.

물론 다친 게 내가 아니니 멀쩡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연한 푸른 눈동자가 내 발 쪽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며 걱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신전에 있는 여신상이 짓는 미소와 똑같은 미소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신전에서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이렇게 찾아뵈러 왔습니다.”

살짝 긴장되는 대화 주제에 몸이 움찔했다.

“어쩌면 공녀님을 치료한 신관이 그분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예. 타미타르테 신관님께선 그 신관님은 신전을 떠나셨다고 했고요.”

보통은 떠났다는 말 대신 다른 곳으로 봉사하러 갔다 혹은 선교를 위해 움직이셨다라고 말하지만.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바짝 긴장했다. 조금의 말실수가 어떤 식으로 꼬투리를 잡힐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로지안의 측근이기도 했으니까.

“그분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오는 말에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만약 타미타르테가 친모에 대해 아는 이가 아니었더라면 이 상황을 웃으면서 넘어갔을 것이다.

제 다리를 치료해 준 이는 공작인 아버지께서 알아보신 것이라며 가볍게 떠넘겼겠지만, 지금 그 말이 나오지 않은 건 저 사람이 내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에 앞에 있는 찻잔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로지안 님께서 그런 것도 알아 오라고 하시던가요?”

갑자기 여기서 로지안의 이름이 왜 나오냐는 눈짓에 내가 덧붙였다.

“로지안 님께서 신전에 큰 후원을 하신다는 걸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로지안이 신전 고아원 출신의 애첩이다 보니 더더욱.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로지안의 이름을 꺼내자 웃고 있던 신관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로지안 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믿기는 어렵죠.”

도둑놈들이 자기 도둑질 안 했다고 하지, 도둑질을 했다고 하겠나. 믿을 만한 소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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