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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40)화 (40/109)

40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찻잔을 테이블 위로 조심히 올려두었다.

달그락, 거리는 유리 마찰음이 짧게 들리기만 하고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작 들리는 거라고는 활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생활소음뿐이었으니까.

후우,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타미타르테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타미타르테 역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으면서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솔직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녀님의 몸을 고쳐주신 신관에 대해, 만약 신관이 아니더라도 그자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

“한 번만 만나게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무릎 꿇고 애원하라고 한다면 그렇게라도 할 모습이었다. 다급함이 잔뜩 드러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서 공녀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들어드리기는 힘든 부탁이네요. 절 고쳐준 이가 만약 신관이 아니라면.”

“…….”

“공작가는 제국법을 어긴 가문이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가의 위세가 대단하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로지안에게 흠 하나 잡혀주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대신전을 떠나셨다는 그 신관님께서 절 고쳐주신 거라 생각하시면 될…….”

“떠난 게 아닙니다.”

타미타르테가 내 말을 싹둑 자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신전에서 이용당하는 게 싫어서.”

“…….”

“도망친 겁니다.”

봉사도, 선교를 위한 것도 아니고 도망친 거라고? 신전이 꽁꽁 숨기려고 할 게 분명한 비밀을 이렇게 들을 줄은 몰랐다.

“제가 부탁을 이렇게 드리는 건, 그리고 이런 사실까지 말씀드리는 건 그자를 신전이 더는 찾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요.”

도대체 찾는 이가 누구기에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타미타르테가 찾는 이와 나에 대한 건 무관할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내 친어머니는 성력이라고는 없는 분이셨으니까.

“그자의 이름은 알고 계십니까?”

앉아 있던 타미타르테가 소파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공녀님을 고쳐준 그자의 이름이.”

이름을 쉽게 내뱉지 못하고 있는 연홍빛 입술이 오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름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저주를 내뱉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망설이며 흔들리던 연푸른빛 눈동자가 다부지게 바뀌었다.

“다니엘입니까?”

어머니의 이름에 뒤이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이 다시금 타미타르테의 입에서 나오자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귀족으로 살아왔기에 어느 정도는 표정 관리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신관은 도대체 누구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돌아가시기 전, 그리고 공작가로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했던 ‘도망자 신세’라는 말이 다시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눈앞의 청초한 인상의 이 미남은 날 고쳐준 이가 내 아버지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공녀님, 그분을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이미 숨기는 것도 늦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신관님의 무얼 믿고요? 타미타르테 님께서는 로지안 님의 측근이시잖아요.”

로지안의 몸을 주로 살펴주는 이였다.

“신전의 작은 비밀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이 응접실에서 나가는 순간 저와 공녀님이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잊을 겁니다.”

제발,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부분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였다.

내가 한 말이, 지금의 이 상황이 나중에 어떤 나비효과로 돌아올지 쉽사리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일이 변수로 작용한다고 해도…… 지위가 꽤 있는 신관에게 빚을 달아두는 건 나쁘지 않았다.

이자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찾는 건 무리일 것이고, 어머니의 얼굴을 한 날 찾는 것도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날 고쳐준 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일순 절망에 빠진 눈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대신, 만날 자리는 만들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나온 당사자가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타미타르테 신관님께서 확인하시면 될 일이니까요.”

애원하듯이 붙잡고 있는 손을,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덮었다.

어차피 버니스 데빈의 얼굴로 나가도 타미타르테에게는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이 남자가 부모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바깥에서 일을 하셨고,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환해지는 타미타르테의 얼굴에 내가 방긋 웃었다.

“대신 조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 자리를 만들어준다면.”

여리고 청초한 얼굴이지만, 목울대의 목젖이 크게 일렁이는 걸 보고 그가 새삼스레 남자라는 걸 실감했다.

“신관님께서는 제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요.”

“좋습니다. 이렇게 빚 하나 달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일어서세요, 타미타르테 님.”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뒤따라 그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흰 제복 위로 늘어뜨려졌다.

안도감이 열매처럼 맺은 얼굴을 보면서 내가 따라 웃었다.

도대체 제 부모와 무슨 관계였기에 이런 얼굴인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서로 주고받는 거래인데요. 뒤에 신관님이 말을 바꾸는 일이 없을 거라 믿겠습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절대로라는 말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뒤이어 창밖의 소란에 잠시 그의 어깨 너머로 곁눈질하다 응접실 문을 열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났으니 계속 응접실에 있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날짜는 언제쯤 괜찮을까요?”

“이틀 후 대릴 마을 광장에서 자정에 뵙도록 하죠. 절 치료해 준 사람에게는 따로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예, 공녀님.”

그가 안도한 듯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응접실을 벗어나 홀로 나가자 보이는 건 온갖 다급함을 드러내며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리안과 클리프 경이었다.

특히 리안의 꼴을 보기가 꽤 재밌었는데, 그 잘나고 준수한 얼굴에 선혈 자국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오늘 새벽부터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일 때,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 에이프릴.”

나를 부르는 리안의 목소리가 진흙 늪처럼 질척거리고 무거웠다.

나와 눈이 마주친 리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모습이었다. 내가 한마디라도 한다면, 아니, 쿡 찌르기만 해도 바로 눈물방울이 그의 눈동자에서 투둑 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새삼스레 나한테 죄책감에 시달려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아닐 거고.

슬쩍 그의 뒤를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날 보면서 감정을 눌러 참고 있는 클리프의 얼굴에 미간에 주름이 살짝 졌다.

밖에서 생긴 일이 나와 관련된 느낌일 때 그가 애써 미소 지었다.

“아버지 좀 뵙고 오마.”

“그러세요.”

어서 가보라는 의미로 몸을 살짝 비켜서자, 리안이 뛰다시피 하는 걸음으로 올라갔다.

꾸벅 인사한 클리프도 리안의 뒤를 따라 다급하게 올라가는 걸 물끄러미 보다 옆에 서 있는 타미타르테를 배웅하기 위해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문 앞에 선 타미타르테를 보면서 입술을 조용히 열었다.

“이틀 후 자정, 대릴 마을 광장에서 보도록 하죠.”

눈물기가 옅게 남아 있는 눈동자로 고개를 작게 끄덕인 타미타르테는 내가 굉장히 고마운 눈치였다.

저치와 도대체 무슨 사이였기에 어머니는 물론이거니와 아버지를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 늘 바빴던 어머니와 달리, 기억 속의 아버지는 딱 한 번을 제외하면 수도로 내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를 보니 그러잖아도 청초한 인상이 더 가녀리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내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까지 맞추면서 경외와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에 내가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며 답했다.

“오늘 일이 로지안 님과 관련이 없다는 신관님의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한 치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을 얼굴에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부모님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심에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게 잘한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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