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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41)화 (41/109)

41화

망할 계집애. 이리나에게 짓밟혔던 손을 허공에서 탈탈 털어낸 바라크가 인상을 보기 싫게 구겼다.

그 계집애가 공작가에 미련이 없다는 말, 에이프릴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 없다는 말도 이제 믿기 싫어도 믿어졌다. 오늘 봤던 이리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이리나가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어린애도, 제 관심을 받고 싶어서 주위에서 얼쩡거리던 애도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왜 돌아온 거야.”

이해가 안 가네. 자존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건가. 그래도 공작가에서 10년 가까이 지내왔으면 태생부터 귀족은 아니어도 귀족처럼 행동할 수는 있을 텐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이리나는 누구보다 귀족 같은 아이였으니까. 공작가에 있는 모두가 보기 싫을 텐데.

바라크가 복잡한 얼굴을 하다가 밟힌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공작가의 서재에서 나온 바라크가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고 할 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인영을 확인했다.

“형?”

이리나가 공작가로 데리고 온 당사자 중 하나였기에 요 며칠 데면데면하게 굴었지만, 지금만큼은 당황스러워서 리안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침착함을 잃지 않던 리안이 다급하게 뛰어가면서 제 옆을 스쳐 지나갔으니까.

“뭐야?”

얼핏 보기론 눈물까지 맺힌 얼굴이었다. 쌩하니 옆을 지나가는 리안에 바라크가 짤막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에이프릴이 다쳤을 때도 저런 모습은 보인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바라크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일 때, 뒤이어 따라오는 클리프를 발견하고는 그를 덥석 잡았다.

“클리프 경.”

“아, 공자님.”

어디 다녀오기라도 했는지 행장도 풀지 않은 모양새였다.

클리프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바라크가 눈짓으로 리안이 달려간 쪽으로 곁눈질했다.

“형 왜 저래?”

바라크의 질문에 클리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해도 된다는 알렉시스 공작의 허락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만약 자신이 들을 말을 그대로 옮긴 이후의 여파도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바라크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더더욱.

“죄송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죄송합니다라니. 바라크가 퍽 언짢은 얼굴로 바라봤으나 클리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여는 리안의 행동에 알렉시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둘째인 바라크와는 달리 집 안에서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던 리안이 문을 벌컥 열었던 만큼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저와 제 부인이 이리나를 집에서 내보내겠다 결정했을 때조차도, 차분하게 자신들을 설득시키던 자식이었다.

숨을 잘게 헐떡이는 리안에 알렉시스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알고 계셨던 건 아니시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리안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하고 싶은데 차분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빙빙 맴도는 말들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신을 답답한 기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버지에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머니께서 이리나의 아버지를 죽였다뇨.”

“……뭐?”

예상하지 못한 말이 리안의 입에서 떨어지자 알렉시스의 표정이 굳었다.

구겨지는 것도, 당혹감을 표하는 것도 아닌 그저 그대로 굳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였다니, 누가?

이리나의 친부가 죽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병색이 완연한 자였으니까.

10년 가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아서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친부라는 작자가 연락 한 번 없는 자라 무정하다고 욕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딸을 위하는 척하더니, 결국 제 몸 하나 건사하기 급한 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 그게.”

그저 죽은 게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니. 그것도…….

“누가, 누구를 죽여?”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난 알렉시스에 리안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못난 모습에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상황에서도 제 아버지는 이런 걸 몰랐다는 사실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독단적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이 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형편없는 놈.’

형편없다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아버지께서 클리프 경에게 지시하신 걸 들었습니다. ……제가 클리프 경의 일에 억지로 동행했습니다.”

“네가 함께 동행한 점에 대해 묻는 게 아니다.”

“…….”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어머니께서, 이리나의 아버지를요.”

마음 같아서는 이미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고 싶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관 속에 있는 안젤리카에게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보고 싶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알렉시스 공작이 심장을 옥죄는 감각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을 때면 느끼는 통증이고는 했다.

바라크가 에이프릴을 수도 시가지에서 잃어버리면서 아내인 안젤리카가 단단히 미쳐 버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딸을 잃어버리게 만든 바라크를 신랄하게 탓하다가 또 어느 날은 제 자식이라며 무작정 예뻐하기도 했었다.

지나친 우울감과 분노, 그리고 기쁨이 오락가락할 때 만났던 게, 잃어버린 딸과 똑같이 생긴 이리나였다.

“이리나를 공작가에서 데리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에 친부에게 사람을 보낸 모양입니다.”

“…….”

“집에서 같이 지냈던 수인이 전부 얘기했습니다.”

잘게 떨리는 리안의 말에 알렉시스가 의자에 털썩 앉고는 눈을 꾹 감았다.

젠장할. 도대체 이리나에게 몹쓸 짓을 얼마나 해댄 거지.

친딸을 찾았다는 이유로 한겨울에 내보낸 것도 용서받기 힘든 잘못인데, 제 아내가 그 아이의 친부를 죽였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친부에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어떡해요?”

이리나가 결국 공작가로 오겠다 결정했던 날 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던 안젤리카를 떠올렸다.

안젤리카는 이리나를 에이프릴의 대역으로 생각하면서도, 친딸처럼 아꼈고, 동시에 꽤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워했다.

이리나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다시금 마음이 바뀌어 돌아가고 싶다 말하는 게 아닌지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불안한 기색이 없어져서 좀 나아진 거라 생각했었는데…….

“하…….”

실상은 나아진 게 아니라 더 엉망으로 만든 상태였다.

돌아갈까 싶어 겁까지 냈었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리나를 다시 돌려보내자는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었을까.

“……이리나가, 이 사실을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다시금 공작가로 돌아와 달라는 자신들의 말이 얼마나 역겹고 혐오스러웠을까.

알렉시스가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이리나가, 정말로…….”

고개를 푹 숙인 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미안하다고 사죄하고 또 사죄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전과같이 가족같이 지내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사이가 회복되지 않을까라고 희망을 가졌던 자신이 우스웠다. 이런 희망을 품고 있던 자신을 그 아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겠지.

얼마나 어이가 없고 웃겼을까. 이리나와 마주쳤을 때도 눌러 참던 눈물을 끝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아래로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 딸이 될 네 딸의 미래를 위해서 얼른 죽어줘.”

“네 어미가 했던 말이다.”

알리샤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저, 단순히 돈을 벌겠다는 이유로 공작가로 왔을까요?”

리안의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중요하지가 않았다. 단순히 사정이 어려워서 온 것이든,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 공작가로 돌아온 것이든 말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알렉시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래, 지금에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자신들이 아무리 잘못했다 생각하더라도, 안젤리카가 그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었다고 해도 잘못은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죽은 아이의 친부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이리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건 자신들이었으니까.

알렉시스가 한 손으로 꺼끌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리샤란 수인을,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알렉시스가 안 된다고 말을 하더라도 데리고 올 것이라는 선포이기도 했다.

알렉시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홀린 시선으로 리안을 바라봤다.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닦아낸 리안이 고개를 들어 뒤이어 말했다.

“그자가 이리나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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