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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42)화 (42/109)

42화

자신들은 다시는 이리나의 가족이 될 수 없었다.

알렉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시스의 시선이 느리게 약병이 들어가 있는 서랍으로 향했다.

이리나를 다시 공작가로 데리고 오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에이프릴의 마차 사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점점 굳어가고 있는 심장 때문에 제게 남은 시간이 1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년 전 그렇게 이리나를 공작저에서 내쫓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이리나를 다시 데리고 온 것이었다.

3년 동안 힘들었을 이리나에게 사죄하고 싶었고, 그에 따른 배상도 하고 싶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이리나를 딸로 키워왔었으니까.

저가 죽고 난 뒤 공작가 소유의 루벨라 광산을 그 아이 몫의 유산으로 남겨줄 생각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아버지.”

리안의 나직한 물음에 알렉시스가 숨을 거칠게 삼켰다.

숨을 내쉬는 게 힘든 이유가 아픈 몸 때문인 건지, 아니면 지금 느끼고 있는 죄책감이란 감정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작가는 이리나에게 사과도, 그리고 적절한 보상도 해야 합니다.”

“그래. 네가 데리고 오도록 하거라.”

“예,”

리안이 조금 진정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새삼 이리나가 어떤 생각으로 공작가로 들어온 건지 궁금해졌다.

자신이 이리나였다면 공작가의 모두를 없애 버려도 시원찮을 테였으니까.

“형, 무슨 일 있었어?”

바짝 마른 입술을 세게 깨물 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창가로 향했던 리안이 바라크가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라크가 이리나에게 날 서게 굴어도, 에이프릴을 향한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더는 바라크의 이런 태도도 묵과할 수 없었다.

“바라크.”

“어?”

울기라도 했는지 발간 눈가도 그렇고, 기사단의 입단 시험 때보다 더 날 선 리안의 모습에 바라크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달리 대체적으로 무던한 성품인 리안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이리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라.”

“형!”

“네가 이리나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인다면, 그때는 정말 너를.”

무어라 따지고 들려 해도 그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리안이 저렇게 화난 모습은 어린 시절에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걱정했던 내가 등신이지.”

친동생인 에이프릴보다 이리나 데빈을 걱정하는 리안의 모습에 그가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매번 그 계집애를 챙기는 리안도, 그리고 그런 리안을 구워삶은 이리나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에이프릴만 안됐지. 피가 이어졌는데도, 공작가에서 지낸 지가 몇 년이 됐는데도 그 누구도 에이프릴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바라크가 심퉁맞은 얼굴로 몸을 팩 돌렸다.

긴 복도 끝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바라크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창가를 바라봤다.

공작가에 왔었던 신관을 배웅한 이리나가 다시 공작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프릴과 똑같은 연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나부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느리게 고개를 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리나가 무슨 생각으로 다시 공작가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속셈이든 간에 그녀의 속셈에 당해줄 생각이었다.

“……하.”

그게 이리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의 방법이었으니까.

* * *

“많이 나아졌어.”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많이 나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상처는 아물었고, 에이프릴이 걷는 것에도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걸을 때 필요한 지팡이는 필요했지만 말이다. 절뚝거리고 있긴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기린마냥 걷던 처음과는 달랐다.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물었다.

“흉터가 남긴 했지만, 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네요.”

“흉터 따위야, 뭐.”

몸에 상처 하나 생기면 큰일 난 것처럼 굴던 보통의 귀족 영애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에이프릴이 귀족 영애답지 않고, 무던하게 구는 이유는 아무래도 평민으로 살아온 삶이 더 길기 때문이었을 거다.

“흉터 같은 걸로 날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로 그녀가 씩 웃었다.

그건 그렇겠지. 다리의 상처로 대하는 게 달라질 리가 없었다.

어느 귀족이 감히 황태자의 약혼자인, 공작가의 공녀에게 그리 간 크게 행동하겠나.

페르포네가 파혼을 요구했지만, 가족도 모르는 걸 다른 귀족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걷는 데 지장은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걷는 연습만 계속하신다면 지팡이 없이도 걸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에이프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느리게 꼬였다.

저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오래 갈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내가 공작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겠지.

어떻게 해서든 에이프릴의 귀에 내 존재가 들어가지도 않도록 노력하는 꼴이 가상했다. 에이프릴의 귀에 내 이야기가 들어가려면 앨런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했으니까.

“그럼 이 정도만 하고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증이나 아픈 게 있다면…… 앨런에게 말씀하시면 되세요.”

의자에 앉은 에이프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공작가로 들어가게 된 지금, 에이프릴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은 늦은 밤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타미타르테와 만나기로 한 날의 자정이었기에 빨리 별장을 벗어나야 했다.

에이프릴의 방을 나선 뒤, 바라크에게 마법을 시전해 달라고 눈짓할 때였다.

어딘지 모르게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바라크가 저런 얼굴을 하고 지낸 게 하루 이틀이냐만은, 이 얼굴을 한 내게는 처음 보인 모습이었다.

“에이프릴 다리는 언제쯤 완치가 될 수 있지?”

제게 못마땅한 점이라도 있으시냐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낸 바라크에 팔을 꼬았다.

“방금 들으셨잖습니까. 시간이 좀 걸린다고요.”

“아니, 지금 치료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다리가……!”

“차도가 없던 다리를 제가 이만큼 치료한 건 기억도 안 나시나 봅니다.”

계속 별장에 있던 모양새라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대체 왜? 마음이 조급해진 이유에 대해서 굳이 꼽자면, 내가 공작가로 돌아왔다는 것 때문일 텐데……. 며칠 전에 막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공작가에 있을 때도 별다른 이유 같은 건 없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내게 시비 거는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마 도서관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았고.

에이프릴이 얼른 완치되어서 날 내쫓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사람 마음이 이래서 간사한가 봐요.”

날 채근하던 바라크가 멈칫했다. 내 언사에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완쾌될 때까지는 날 봐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위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상태만 봐줘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엄연히 계약을 했으니까, 이 정도 물어보는 건 괜찮다고 생각되는데.”

바라크가 이렇게까지 참는 모습은 참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동생에게는 극진하게 대하네.

“차도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미덥지 못하시거든 다른 사람 알아보셔도 상관없습니다.”

“…….”

“지금이라도 대신전의 신관을 부르셔도 상관없고요.”

“…….”

“뭐, 소문밖에 더 나겠나요.”

공녀가 마차 사고로 크게 다쳤는데 어째서 완쾌한 공녀가 수도에 있지? 공녀가 원래 쌍둥이였나? 아니면…….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어차피 대신전에 가더라도 나만큼 효과를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 답답한 얼굴을 한 바라크에 내가 방긋 웃을 때, 방에서 나온 에이프릴이 바라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왜 그래. 내 은인이잖아.”

“아니, 나는 네 다리가 아직도…….”

“오라버니가 한 말에 너무 마음 쓰지 않으면 좋겠어. 날 많이 걱정하셔서 그런 거니까.”

“그럼요. 괜찮습니다.”

맨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여유로워진 에이프릴의 모습에 빙긋 웃었다.

“그래서 이제 가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도와주시겠어요, 바라크 님?”

후, 짧은 한숨과 함께 그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시야에 들어오는 환한 오렌지 빛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대릴 마을의 초입부였다.

가게의 위치를 알고 있는 바라크가 일부러 가게 안이 아니라 마을 초입부로 떨어지게 한 건 일종의 시위 혹은 심술이겠다.

“일부러 여기로 떨어뜨린 모양이네요.”

앨런 역시 바라크의 성격을 다 파악했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게.”

여태까지 나한테 보였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이 정도 심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지라 내가 잘게 웃고는 물었다.

“일상생활하는 데 무리 없겠지?”

“네, 지팡이만 있으면 지내는 데 무리는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바로 알아들은 앨런이 곧바로 긍정 어린 말을 들려주었다.

에이프릴을 계속 옆에서 지켜봐 왔으니만큼 그녀의 상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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