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아도니스가 우승을 따내지 못한다면 그만큼 창피한 일도 없을 텐데.
아니, 아도니스 개인의 창피뿐만이 아니라 페르포네 디니아 다우스의 수치이기도 했다.
물론 여성 최초 근위대 기사로서 실력은 이미 입증된 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씩 불안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도니스 경이 그런 말을 한 건 의외네. 공녀와는 친분이 없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어봐도 아무런 말도 없고요.”
“입이 무거운 게 아도니스 경의 두 번째 장점이니까.”
“첫 번째 장점은요?”
“그건 당연히 검술 실력이고.”
살짝 뿌듯한 듯 웃고 있는 페르포네에 레르비앙이 이마를 짚었다.
세상만사를 전부 걱정하고 있는 레르비앙을 뒤로한 채 페르포네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금 떠오르는 에이프릴의 얼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도니스 경이 공녀와 친분이 없다고 할지라도,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으니 뭔가를 느꼈다고 봐도 무방하기는 했다.
“제 생각엔 그 이유가 저와 공녀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일 것 같군요.”
데미안도 뭔가를 느낀 거라 봐도 무방하겠지. 데미안을 떠봐야 할까.
볼 안쪽을 꾹 씹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가벼운 노크와 함께 시종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레르비앙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면서 페르포네가 누구냐며 가볍게 턱짓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 공녀님입니다.”
“뭐?”
찌이이익―
받아 들던 서류 찢어지는 소리가 집무실에 퍼졌다.
“들어오시라 할까요?”
시종의 말에 페르포네가 자리에 일어나서는 약간 불안한 듯 옷매무새를 다듬다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저가 뭐 하고 있는 건지.
“그래.”
이내 풀썩 앉으며 허락하는 페르포네를 레르비앙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 * *
“아가씨, 도대체 새벽에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앰버가 공작저에서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울상으로 물었다.
내가 눈을 데구룩 굴렸다.
밤 외출을 들키면 귀찮아질 인물들은 공작이나 공자들일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복병이 있었다.
바로 앰버.
그나마 공작가의 다른 이들처럼 크게 불쾌해하지 않는 건 앰버의 언행이 내가 정말 걱정되어서 보이는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안 계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래서 공작님께 말씀드렸니?”
그 물음에는 앰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게 막 들켰을 때, 내가 공작저로 돌아왔기 때문이겠지.
아주 마음에 드는 대답에 내가 씩 웃었다.
“잘했어. 앞으로도 말씀드리지 마렴.”
“앞으로도 계속 외출하시려고요?”
“들켰네.”
“공녀니임……!”
발을 동동 구르는 앰버를 뒤로한 채 오늘 티타임이 진행되는 장소로 갔다.
아직 봄 같은 푹신한 잔디를 밟으면서 온실 정원 쪽으로 향하자 계절과 맞지 않은 꽃향기가 물씬 코를 찔렀다.
가을에 가까워지고 있건만 정원에 핀 꽃들은 하나같이 봄꽃들뿐이었다.
연분홍의 꽃잎이 바람결에 따라 보기 좋게 살랑거리며 일렁였다.
역시 사교모임이 이뤄지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마법으로 유지하고 있는 꽃이다 보니 대관료가 어지간한 귀족들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비쌀뿐더러, 시간별로 하루에 다섯 팀 정도밖에 받지 않는, 사교계의 핫플레이스다웠다.
주인공은 늘 늦게 도착하는 법이니만큼 온실 정원에는 몇몇 영애가 이미 도착한 뒤였다.
“제가 늦었네요.”
얼핏 소란스럽던 정원이 내 등장과 함께 조용해졌다. 죄다 내 쪽으로 모이는 시선에 가볍게 웃었다.
“반가워요. 다들 오랜만이네요.”
티타임에 참석한 영애들 전부가 아는 얼굴이었다.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졌다뿐이지,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내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티타임을 주최한 호스트였으며, 동시에 가문 중에서도 라이즈 공작가를 뛰어넘는 영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진작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완쾌하신 거 맞으시죠?”
“네.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네요. 한 달 푹 쉬니 더 건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짜맞추기라도 한듯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하고 똑같은 반응이 흘러나왔다.
황족인 페르포네에게 폭언과 같은 말을 해서 혹시나 다른 귀족가의 여식들과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초대장을 보낸 이들 모두가 참석한 걸 보아하니 딱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공작가의 공녀가 보내니만큼 어려웠던 걸 수도 있겠지만.
“아, 이건 돌아오신 기념으로 준비한 선물이에요.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공녀님.”
“이렇게 신경 써줄 필요는 없는데.”
쾌유 선물이라면서 건네주는 꽃다발에 방긋 웃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받은 꽃다발을 앰버에게 건네주며 자리에 있는 영애들에게 기대가 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들 어떻게 지내셨나요?”
티타임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었다.
흠…….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귀족 영애들을 바라봤다.
별장에서 요양했다는 핑계가 있었던 만큼, 말을 하는 것보단 듣는 것을 우선시하긴 했지만, 날 대화에 넣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영애들과 나쁘지 않은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썩 좋은 사이도 아닌 듯 모양이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소외감을 묵묵히 견디고 있을 때였다.
“아 참, 곧 있으면 건국제잖아요.”
가볍게 손뼉을 친 영애가 눈을 반짝였다.
곧 있으면 진행될 건국제는 제국민들이라면 모두가 관심을 가질 법한 축제였다.
화려한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타국조차도 관심을 가지는 검술대회에, 건국제의 마지막 날 황실에서 열리는 엔딩파티까지.
특히 귀족가의 어린 자제들은 마지막 날 개최되는 황실 파티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법인데, 건국제 마지막 날 뜨는 핑크빛 보름달 밑에서 사랑을 고백한다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약혼자가 있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음에 품고 있는 상대가 있는 귀족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할 법한 주제였다.
“줄리안 님은 이번에 기비스텐 가의 도련님께서 에스코트를 신청하셨다면서요.”
역시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젊은 영애의 볼에 분홍빛 홍조가 떠올랐다.
“마지막 파티 때 신고 와줬으면 좋겠다고 구두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어머나.”
“베로니카 님은 약혼자 되시는 분께 이번에 드레스를 받으셨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그렇게까지 돌았나요? 꽃코사지와 함께 보내주셨어요. 저랑 붉은빛 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요.”
그리고 그만큼 사랑을 과시하기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공녀님께서는 무얼 받으셨어요? 전하이시니만큼 화려한 선물을 받았겠죠?”
화기애애하고 꽃 피우는 분위기가 베로니카의 말로 인해 순식간에 굳어졌다.
수도에 떠도는 황색신문을 봤다면 에이프릴과 페르포네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유추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을 한다는 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본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에이프릴에게 상처를 주고 싶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고 있자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보내지 않으셨어요.”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공녀로 보낸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기에 연한 미소와 더불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파티 때 입을 옷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드레스는 후에 함께 볼 예정이랍니다.”
떠도는 소문과 달리 나와 페르포네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지 자리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하와 함께요?”
“네.”
놀라운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영애들을 향해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색신문에서 하는 말이 진짜라고 생각됐던 거겠지. 페르포네가 날 대하는 모습을 보면 사이가 틀어진 건 제법 됐을 거고, 떠도는 신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이런 말을 했으니까 귀족가에 빠르게 나와 페르포네의 소문이 돌게 될 것이다.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정보 수집과 더불어 나와 페르포네의 불화설이 헛소문이었단 게 빠르게 퍼지기를 바라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별장에 있는 진짜 에이프릴이 공작가로 돌아와야 했으니까.
아직 몸이 완벽하게 낫지 않은 에이프릴을 바라크가 데리고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공작저로 오게 하는 마지막 방법은, 에이프릴 본인이 공작가로 가고 싶다고 해야 성립했다.
양 입술 끝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저와 전하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세간에 떠돌고 있더라고요. 참 말도 안 되는 소문이죠.”
“맞아요. 공녀와 전하의 사이가 흔들리다뇨. 말도 안 되죠.”
“수도 내에서 모두가 동경하는 사이잖아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네요.”
그에 대한 말은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볍게 대꾸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