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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50)화 (50/109)

50화

내 앞에서 노골적으로 페르포네의 이야기를 했던 베로니카를 향해 빙긋 웃어주고는 시선을 돌릴 때, 의자 끌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났다.

“곧 약혼자가 절 데리러 올 시간이라서요.”

베로니카의 옅은 갈색 눈이 부드럽게 휘면서 날 똑바로 향했다. 웃고 있으나 날 향한 눈동자가 묘하게 날카로웠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온실 정원에서 점점 멀어지는 베로니카의 뒷모습과 더불어 묘하게 굳어진 공기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할 때, 베로니카와 가까이 지내는 줄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혼자분이랑 괜찮아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어렴풋이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베로니카와 약혼자의 사이가 나빴나?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티타임에서 약혼자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야기가 몇 번 나오기도 한 데다, 약혼자가 이번 건국제 파티를 위해서 드레스와 꽃 코르사주까지 보냈다는데 뭐가 문제인 거지?

누가 봐도 사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베로니카 양이랑 약혼자분이 싸웠나 봐요?”

걱정스럽다는 듯이 조성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건 부지불식간이었다.

약간 날 탓하는 듯한 눈동자들에 내가 움찔했다.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서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을 때 줄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발슈타인 경 때문에 그렇죠.”

데미안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머릿속에 물음표가 연속적으로 떠올랐지만 내색할 수 없는 내 상황이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베로니카 양이 아카데미 시절에 데미안 경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거, 공녀님도 알고 계셨잖아요.”

처음 들어보는 말인 데다, 베로니카가 데미안을 짝사랑하는 것과 날 탓하는 눈빛들의 연관성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론이 뭔데. 귀족들의 빙빙 돌리는 말이 영 답답해지는 순간이었다.

“베로니카 양이 발슈타인 경을 짝사랑했다는 걸 약혼자분께서 아셔서 싸우셨나 봐요.”

“그거 때문에 파혼을 하니 마니 이야기가 제법 나왔던 모양이더라고요. 두 분 다 내색은 안 했지만.”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좀생이 같은 약혼자의 행동에 내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약혼자 되시는 분은 베로니카 양이 사교모임에 참석하는 이유가 발슈타인 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어요.”

정보를 얻고자 주최한 티타임이었건만, 쓸데없는 정보만 얻은 바람에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 * *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

아카데미 시절 동기이자, 내가 가진 능력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황실 복도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카데미 시절 절친한 친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데미안 한 사람뿐이었다.

그를 둘러싼 대공가의 가정환경이 나와 엇비슷해서 내적 친밀감을 혼자 갖고 있던 찰나에, 그가 내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물며 페르포네의 사촌이었으니 보통의 학우들과 다르게 가까이 지내는 건 당연했고.

“베로니카 양이 사교모임에 참석하는 이유가 발슈타인 경 때문이라고 오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 말을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귀족 영애 한 명을 붙잡고 좀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법이고, 사교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 이런 소문에 대해 알고 있을 리도 없을 테고.

“이상하긴 하네.”

별장에서 요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별장에도 한 번 방문하지 않았던 눈치였고…… 또, 내가 수도로 돌아왔음에도 짧은 서신 한 장 보낸 적 없었다.

“도대체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데미안에게…… 들키기라도 했나? 그럴 듯한 추리가 머리를 쿵 하고 때렸다.

그도 그럴 게 데미안은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만큼, 그 앞에서 작은 상처라도 난 적이 있었다면 바로 들켰을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면서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 섰을 때 근위대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약혼자라고 해도 출입은 안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가능했기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한 사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근위대원 한 사람은 딱딱한 얼굴로 굳건하게 문 앞을 지킬 때 내가 슬쩍 물었다.

“베트리체 경은 오늘 휴무인가요?”

“예.”

깔끔하고 짧게 떨어지는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제에 있을 검술대회는 참석할까?

쿡 찔러보듯이 한 말이긴 했지만, 아도니스가 그에 응할지 말지는 오롯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아들놈에 눈이 멀어서 재능있는 다른 자식은 본 체도 안 하는 베트리체 백작 가문에게 아도니스 경은 너무 아까운 존재였다.

“공녀님, 들어가시면 됩니다.”

페르포네의 허락이 떨어지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다섯 걸음을 내디뎠을 때, 보이는 건 조금 당황한,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페르포네의 얼굴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여실한 그의 얼굴이 내가 알고 있던 어린 시절의 페르포네와 똑같아 웃음이 픽, 작게 터졌다.

“언질도 없이 공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어설프게 행동하는 페르포네를 뒤로한 채 레르비앙이 묻자 눈을 데구룩 굴리다 되물었다.

“약혼자를 보러 오는 것도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작게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꾹 다무는 페르포네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나와 페르포네를 번갈아 보던 레르비앙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곧 건국제라 귀족들이 한껏 들뜬 건 아시지요, 전하?”

“네.”

“딱 한 번만 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저희가 파혼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올곧게 응시하는 금빛 눈동자가 마치 바람결에 나부끼는 커튼처럼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며칠 전 새벽에 날 향하던 눈동자와 비슷했다.

웃지 말라고 말을 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다른 건 그때의 페르포네는 살짝 울고 싶어 했고, 지금은 그런 기색은 없었다.

이내 시선을 거둔 그가 퍽 냉랭하게 대꾸했다.

“누가 그런 소문을 흘렸는진 모르겠지만, 관찰력이 꽤 좋다고 말하고 싶네요.”

페르포네는 황실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싶어 했기에 모두에게 공평하게 상냥했다. 아버지의 애첩을 자처하고 있는, 한때 본인의 목숨을 위협하게 만들 뻔했던 로지안에게도 말이다.

그런 페르포네에게서 나온 노골적인 냉랭함에 눈을 끔뻑였다. 애써 선을 긋는 태도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내가 공녀가 별장에서 지냈던 한 달 반 동안 찾아가지 않았으니 그런 소문이 도는 건 당연하죠.”

“지금.”

그리고 그가 냉랭하게 대하고 있는 게 ‘일부러’인 것을 바로 눈치챘다.

“일부러 차갑게 말씀하시는 거죠?”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금세 들킨 점이 창피해서 그런 건지, 페르포네의 하얀 귀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던 그의 입술이 오밀조밀하게 작게 움직였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싶어서 보자, 페르포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어떻게 안 건가요?”

“모르는 게 이상하죠. 함께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요.”

페르포네가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슬플 때, 당황했을 때, 멋쩍어할 때, 민망해할 때, 그리고 진심으로 즐거워할 때 늘 그의 곁에 있어왔던 게 나였다.

“제가 몇 년 동안 전하를 알아왔다고 생각하세요?”

비록 3년의 공백기가 있어도, 그 시간 동안 내가 알던 페르포네의 모습이 전부 사라지는 건 무리였다.

“저한테 뭘 숨기려면 아직 5년은 이를 겁니다, 전하.”

입버릇처럼 익숙하게 나온 말이었다. 이렇게 말을 할 때면 페르포네가 종종 웃곤 했기에 부러 한 말이었건만, 정작 페르포네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별달리 이상할 건 없었을 텐데.

적막 가운데 앉아 있던 페르포네가 숨을 나직이 뱉었다. 파르르 떨리는 숨소리는 꼭 그가 긴장한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다고요?”

“곧 있으면 건국제이기도 하니까 전하와 함께 외출하고 싶어서요.”

“그럴 시간 없습니다.”

“1년 후에 파혼하기 직전까지는 협조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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