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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53)화 (53/109)

53화

굳이 진짜, 가짜를 나눈다면 나는 가짜 에이프릴일 텐데.

내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데미안, 네가 찾는 에이프릴이 왜…….”

진짜 에이프릴일 거라고 생각해? 목 안에 턱 하고 막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갑작스럽게 열린 문으로 인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준비를 금방 끝낸 페르포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화해하기라도 한 건가요?”

누가 봐도 데미안이 위협하고, 내가 위협받고 있는 모습일 텐데 저런 말이 잘도 나오네.

페르포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게서 떨어진 그에 꾹꾹 참아왔던 숨을 짧게 내뱉었다.

반쯤은 욱해서 내뱉으려고 한 말이지만,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한 뒤, 어색해질 분위기도 불편했고. 어떻게 보면 페르포네가 타이밍 좋게 문을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썰렁한 응접실의 상황을 눈치 못 챌 정도가 아닐 텐데도 페르포네가 악의 없이 물었다.

“두 사람, 이야기는 좀 나누었어요?”

“덕분에요.”

내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 데미안에게서 나온 대답이었다. 답지 않게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능청스럽게 하는 거짓말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페르포네가 기거하는 궁에서 나올 때 시야를 빼앗는 진달래 같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로지안과 페르포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으니, 페르포네를 보러 온 것은 아닐 거고.

“폐하께 가시는 길이신가 봅니다.”

태양궁을 가기 위해서는 페르포네가 생활하는 궁을 거쳐야 하니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할지 딱 마주친 꼴이었다.

황제가 오늘내일하고 있는데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로지안의 곁에는 신관인 타미타르테가 함께였다.

예를 갖추며 인사하는 그와 짧게 눈이 마주쳤지만, 타미타르테는 나를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는 게 당연했지만, 정작 타미타르테의 이런 행동을 보니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이 마냥 꿈처럼 느껴졌다.

“예, 날이 서서히 추워져서 그런지 더 신경 써야 할 시기이니까요. 한데 세 분이서 사이좋게 티타임이라도 가지실 건가 봅니다.”

“곧 건국제를 맞이해서 공녀께 약혼자 행세 좀 하려고요.”

산뜻하게 웃는 페르포네에게 짧게 감탄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만 해도 로지안을 무서워했던 애였는데, 지금은 은근하게 로지안의 속을 긁어대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영 신기할 따름이었다.

로지안이 라이즈 공작가 말고 다른 가문의 아가씨를 페르포네의 곁에 두고 싶어 하니 당연히 불안하고 신경 긁을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늙은 여우가 어디 가지 않는지 페르포네의 한마디에도 표정 변화 없이 고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반달로 접힌 녹색 눈이 나를 향한 그 순간, 로지안의 입술이 열렸다.

“세 사람이서 함께 있다 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

“그런데 약혼자 행세를 하실 거라면 두 분만 있는 게 낫지 않나요.”

로지안은 장미 그 자체였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온몸에 가시를 두른 장미. 그의 가시는 내뱉는 한마디의 말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괜한 소문에 힘만 더 실어주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네요.”

은근하게 흘기는 시선이 날 폄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나를 깎아내린다면 약혼자인 페르포네의 값어치 역시 절로 깎이는 모양새였으니까.

“그러잖아도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많은데 조심하셨으면 좋겠어요.”

“…….”

“전하의 아주 어린 시절도 떠오르고요. 한동안 말씀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어서 그때 저나 폐하께서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산뜻한 미소를 계속 유지하던 페르포네의 표정이 일순 깨졌다.

페르포네가 실어증을 앓던 시기는 황후의 장례 날부터였다.

사람들은 어린 나의 황태자가 일찍이 어머니를 잃어 충격을 받아 말문을 닫은 것이다…… 라고 알고 있었지만, 황후는 원래부터 병약한 인물이었다.

어머니의 병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페르포네가 그 때문에 말문을 닫았다고? 오히려 실어증이 생기게 된 계기는 황후의 죽음이 아니라 로지안과 관련된 일일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얼 떠올렸는지 페르포네가 페이스를 잃자, 내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다가갔다.

“로지안 님께서 옛날 이야기를 말씀하시니 저도 떠오르는 기억이 많네요.”

날 향하는 눈동자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로지안이 퍽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열넷 그즈음에 로지안 님을 처음 뵀었는데, 그날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그래요? 도대체 어떤 기억이기에? 시간이 제법 흘렀고, 공녀께서도 어리셨었는데.”

“그럼요. 로지안 님처럼 아름다운 분은 그때 처음 봤거든요.”

내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는지 조금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 로지안과 달리, 페르포네나 데미안은 나를 미친 인간처럼 보고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로지안의 존재 자체가 제국의 수치였기 때문이다.

“근데 참 신기하네요. 시간이 근 10년이나 지났는데…….”

당장 페르포네만 보아도 3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3년 동안 페르포네도 많이 변했으니까.

비슷했던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목소리는 좀 더 낮아지고, 어린 시절의 앳된 모습은 사라진 훌륭한 미청년이 되었다.

3년의 시간만 해도 훌쩍 큰 페르포네를 보다시피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로지안은 달랐다.

“로지안 님은 지난 10년간 변한 게 하나 없으시네요. 늘 그대로세요.”

마치 로지안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말이다..

“꼭 늙지 않는 약을 따로 드시는 것처럼 보일 정도네요.”

호호,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에이프릴이 가볍게 말을 건네자,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대로 굳는 로지안에 내가 표정 변화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불로불사의 존재 같으세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 둘은 날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내 비밀을 공유한 타미타르테만이 희게 질린 낯이었다.

이런 식으로 훅 들어오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겠지.

“먼저 자리를 비켜도 될까요?”

“……그러세요, 공녀.”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로지안의 모습이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됐을 텐데, 타미타르테에게 모든 걸 듣고 난 후이다 보니 그의 표정 변화가 쉽게 눈에 들어왔다.

로지안과 둘만 남게 될 타미타르테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로지안을 뒤로하며 걸음을 성큼 옮기며 물었다.

“전하는, 그리고 데미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내가 하는 말을 그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사람이 1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말이에요.”

유지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두 사람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어머, 공녀님!”

프리엘 부티크에 들어서자마자 마담이 호들갑스러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커지고, 넓어진 부티크의 모습에 짧게 감탄했다.

프리엘 부티크가 제국의 유행을 이끌어가는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내가 이곳을 자주 이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죠. 그랬으면 오늘 손님들을 따로 안 받았을 텐데.”

“그럴까 봐 연락 안 하고 온 거예요. 그래도 사업인데 마담이 손해 보는 건 싫으니까.”

“어머, 어머.”

스스럼없는 행동에 마담이 가볍게 싱긋 웃다 말고 내 뒤를 따라 부티크 안으로 들어온 페르포네와 데미안을 보고 놀랐다.

남성복도 구비해 놓고 있는 부티크이긴 하지만, 가게 안에 있는 옷을 비롯한 주얼리, 신발, 향수 등의 판매품은 귀족 여성들을 위한 것들뿐이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두 사람이 답지 않게 귀여워 보여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살짝 가렸다.

페르포네는 그렇다 하더라도, 데미안이 귀족 영애와 함께 이런 곳에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몇 년 만에 이렇게 같이 오신 거 같아요. 한동안은 혼자 오셨었잖아요.”

이렇게 셋이서 움직였을 땐, 내가 아직까지 공작가에서 아카데미를 다니던 때였다.

황실과의 약혼이 어느 평범한 귀족가 자제와의 약혼과 같을 리가 없겠지만서도, 마담의 말을 들어보면 에이프릴은 그렇게 원하던 페르포네와 약혼을 했으면서도 이런 곳에 한 번도 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3년 만인가. 절 위해 바쁜 약혼자께서 일부러 시간을 빼셨더라고요.”

내 말에 마담에게서 별다른 부정이 없었고, 페르포네와 데미안에게서도 이상한 기색은 없었다.

정말로 3년간 ‘혼자’서 이곳에 온 거였군.

“오늘만큼은 꼭 함께 가고 싶다 하시더군요.”

내가 같이 가자고 한 거지만, 거짓말이 아주 능청스럽게 나왔다.

약혼자인 페르포네야 그렇다 치지만, 왜 데미안도 함께인지는 모르겠다는 눈치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데미안도 오랜만에 수도로 와서 제가 같이 가보자고 했고요.”

마담이 ‘아.’ 하고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황족이 행차한 사실에 살짝 당황한 마담이 페르포네와 눈이 마주쳤는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마담의 인사에 페르포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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