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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54)화 (54/109)

54화

그녀의 눈짓 한 번에 열려 있던 가게의 모든 문이 닫혔고, 가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유리창의 커튼 역시 내려졌다.

나 혼자 왔으면 모르겠지만, 황족이 온 마당에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는 없는 듯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그런 걸 요구하거나 눈치를 준 사람은 없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부티크가 늘 잘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부티크 안에 있는 직원들이 긴장으로 인해 눈에 띄게 굳었다는 걸 알아차린 페르포네가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했다.

“오늘은 에이프릴 공녀를 위해 온 것이니,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페르포네의 그 말에도 어느 누구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신경 쓰지 말라곤 했지만, 황족이, 하물며 다음 황위에 오를 황태자가 왔는데 모르는 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없는 사람 취급을 할 수 있습니까, 전하.”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쉽게 꺼내지 못한 말을 데미안이 아무렇지 않게 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데미안다운 행동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마담을 바라보자, 그녀가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가볍게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럼 공녀님과 어울릴 만한 옷들을 꺼내 오도록 할게요. 얘들아, 안 움직이고 뭐 하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라는 마담의 재촉에 부티크의 직원들이 바지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서 멀뚱히 둘러보는 페르포네에 나 역시 소파에 앉고는 그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시죠?”

“아무래도 올 일이 없으니까.”

“마음에 두었다는 분과 다음에 와보세요. 수도의 영애들에게서 가장 인기 많은 부티크이기도 하니까요.”

도대체 누구를 마음에 품은 건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페르포네가 다른 여성과 이 부티크에 온다면 마담에게 은근히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음에 다른 여성과 함께 오라는 말에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던 페르포네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황금색의 눈동자에 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가 온전하게 비쳤다.

어차피 파혼하게 될 사이이니만큼 가볍게 한 말이었으나 페르포네가 짓고 있는 표정은 무표정도, 가면처럼 쓰고 있는 다정한 미소도 아닌…… 묘한 얼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그날 새벽 보여주었던 얼굴과 비슷했다.

“전하?”

왜 그런 표정이신 거냐고 묻기도 전에, 부티크 마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올해 가을 신상은 바로 이거예요.”

부티크의 직원들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네킹을 여러 개를 내 앞에 주르륵 전시했다.

요즘 수도 드레스는 노출이 유행인가.

마네킹이 입은 드레스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양어깨를 훤히 드러낸 드레스 아니면, 등을 시원하게 드러낸 드레스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놀랐다.

내가 수도에 없던 3년 사이 영애들 사이의 유행이 크게 달라진 건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손을 뻗어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마담이 색상만 다르고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들고 와서는 내게 내밀었다.

“공녀님은 피부가 하얀 편이시니까 이런 푸른색 드레스를 입으시고, 머리카락을 위로 가볍게 올려 묶으면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

“요즘 건국제가 코앞이다 보니, 약혼녀를 위해 드레스 선물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하거든요.”

“예쁘네요.”

페르포네가 가볍게 대꾸했다.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마네킹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벗기면서 마담이 물었다.

당연히 내가 한 번은 입어볼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이었지만,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며 준 디자인이었지만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편에 속해 있었다.

“다른 옷들은 없나?”

취향도 아닐뿐더러, 어깨나 등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맹수에게 물렸던 흉터가 없는 하얗고 깨끗한 어깨나 등을 보인다면 모두가 이상하게 여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는 가볍게 신력의 힘으로 흔적 없이 깨끗하게 나은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로지안이 한때 제 아버지의 능력을 착취시켰다면, 그리고 아직까지 아버지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면 상처 하나 없는 몸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옷이요?”

“저렇게 드러난 옷들 말고.”

“있긴 있지만, 지금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과는 다른데 괜찮으시겠어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쉽다는 듯이 마담이 직원들을 향해 손짓하자, 다른 옷들이 몇 벌이 나왔다.

시원하게 노출된 옷이 아닌 제법 단정한 옷으로 확실히 요즘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는 무난한 드레스들이었다.

“왜 드레스는 안 사는 건가요?”

부티크 안을 전부 둘러본 뒤 그곳을 벗어나려고 출입구 문 바로 앞에 서 있을 때 페르포네가 내 뒤에 몸을 바짝 붙이면서 다가와서 한 물음이었다.

왜 안 사냐니……. 부티크에 들어왔다고 해서 꼭 옷을 사야 할 이유는 없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옷들도 제법 있었기에 구입하지 않은 것이다.

부티크 안에서도 아무 말 없이 보고 있기만 하던 페르포네가 조심스럽게 한 말에 내가 가볍게 침음성을 흘렸다.

“사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어야 하나요?”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면 사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날 똑바로 보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향했다.

“사지 않는 건, 나 때문에 생긴 상처 때문인가 싶어서.”

옛날 옛적의, 케케묵은 이야기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한데 섞인 얼굴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페르포네 그대로였다.

사고가 있던 직후에 꽃을 들고 공작가로 찾아왔던 어린아이가 지었던 얼굴 그대로. 하나도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과거에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던 페르포네에게 했던 말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가 완전히 잊은 눈치였다.

“전하, 제가 늘 말씀드렸죠.”

주먹을 둥글게 말아 쥔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조금은 엄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다친 건 전하 때문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도 공녀가 날 감싸다가 다친 건 사실이잖아요?”

흠. 은근히 고집이 있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했던 말, 전혀 기억나지 않으세요?”

“무슨…….”

부티크 안에 있는 이들 중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원들은 움직이기에 바빴고, 데미안은 바깥에서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마담 역시 드레스 대신 내가 구매한 향수를 포장하느라 바빴다.

안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뒤꿈치를 살짝 들었다.

나와 파혼하고 싶어 하기에 이런 행동을 하면 거리를 두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내가 말하기 편하게끔 허리를 살짝 숙였다.

본래의 다정한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랬기에 에이프릴이 페르포네를 좋아한 것이겠지.

“그때도 전하만 알고 있으라, 말씀드렸잖아요.”

“……무슨…….”

“제 몸에 상처는 남지 않았다고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몸을 떨어뜨리자 그가 눈을 가름하게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린 황태자에게 보여준 하얀 거짓말인지 가늠하는 모습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나?”

“거짓말인지 사실인지는 전하께서 판단하셔야죠.”

안 그래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스르륵 열리는 입술이 무슨 말을 할까 싶을 때였다.

“공녀님, 말씀하셨던 장신구들은 사람을 통해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웃는 낯으로 등장하는 마담에 페르포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참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가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건지 젊은 사내들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걸 보았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많이 안 보이네요.”

“아, 못 들으셨나요?”

내 중얼거림에 배웅하기 위애 뒤따라나온 마담이 대신 대답했다.

뭘?

“건국제 검술대회 토너먼트전을 하는데, 오늘 출전자가 아주 흥미진진한 분이거든요.”

“누군데요?”

도대체 누가 나오길래?

“아도니스 베트리체.”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마담이 아닌 데미안에게서 나왔다.

“베트리체 장녀가 나온다는군.”

“아도니스 경이 나온다고요?”

예상외의 인물에 짧게 감탄했다. 황태자인 아도니스가 허락을 해주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그다음에 그녀가 정말로 건국제에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백작가로 갔을 때 했던 말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걸까.

건국제에 나선 이유가 내가 했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궁금했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를 때, 그 호기심을 더 자극하는 말이 부티크의 마담 입에서 나왔다.

“게다가 토너먼트전의 상대가 동생분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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